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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족중심주의
한민족중심주의 韓民族中心主義 항목체계 종교일반종교학 [정의] 한민족이 다른 민족보다 우월하다고 여기는 태도. [내용] 한민족의 문화와 역사를 중심으로 다른 나라의 문화와 역사를 해석하고 평가하는 태도를 말한다. 흔히 한민족이 다른 모든 민족보다 우월하다고 여기는 태도로 나타난다. 한민족 중심주의는 이른바 ‘자민족중심주의(自民族中心主義)’의 한 예라고 할 수 있다. W.G. 섬너는 자신의 『민속』(1906)에서 ‘자신의 집단을 모든 것의 중심으로 보며, 그 집단을 기준으로 나머지 모두를 측정하고 평가하는 세계관’을 자민족중심주의라고 했다. 자기 문화의 틀 속에서 다른 문화를 해석하고 평가하는 자민족중심주의는 지리상의 발견 이후 유럽의 해외 식민지의 건설 시기에 특히 현저했다. 예를 들어 인류학자인 영국의 존 러벅(John Lubbock)은 모든 미개사회(non-literate society)에는 종교가 없다고 했다. 중국 사람들의 중화사상도 전형적인 자문화중심주의의 산물이다. 이들은 세계 문명의 중심으로서 중화 문명은 다른 어떤 문명보다 우수하며, 다른 문명은 저급한 오랑캐 수준에 지나지 않는다는 중화사상(中華思想)을 신봉했다. 제2차 세계대전 시에 히틀러(Adolf Hitler)가 게르만 민족의 우월성을 내세우면서 다른 민족을 억압하고 대량 학살한 것은 자민족중심주의의 극단적인 예이다. 자국 문화에 대한 자부심과 우월감은 어느 나라에나 있을 수 있으며, 가벼운 정도의 자문화 애착은 집단 구성원들에게 자부심을 지니게 하여 사회 통합이나 질서 유지에 기여하는 긍정적 기능을 수행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극단적인 자민족중심주의는 한 민족과 다른 민족 또는 한 민족 내부에 분열과 갈등을 야기하며, 다른 문화에 대한 포용력을 약화시킬 수 있다.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은 한민족으로 재림주님이 오고 한국어가 세계어가 된다고 강조한다는 면에서 한민족중심주의를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으나, 한민족이 다른 민족을 더 사랑하고 참부모님을 알려야 하는 사명이 있다고 보아 자민족중심주의와는 구별된다. ☞ ‘한민족’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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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통일과 세계평화를 위한 천지인참부모 국민지지대회
한반도 통일과 세계평화를 위한 천지인참부모 국민지지대회 韓半島統一과 世界平和를 爲한 天地人참父母 國民支持大會 항목체계 역사사건 [정의] 한반도 통일과 세계평화를 위해 천지인참부모를 모실 것을 국민들이 지지한 대회. [내용] 2012년 1월 8일부터 15일까지 한국 8개 권역에서 한반도 통일과 세계평화를 위해 천지인참부모를 모실 것을 국민들이 지지하기 위해 개최된 대회이다. 경기권 일산 킨텍스(1.8), 충북권 청주 라마다플라자호텔(1.9), 대구·경북권 대구 엑스코(1.10), 강원권 춘천 호반실내체육관(1.11), 광주·전북·전남권 광주 염주체육관(1.12), 대전·충남권 홍성 홍주문화체육회관(1.13), 부산·울산·경남권 부산 벡스코(1.14), 서울·인천권 일산 킨텍스(1.15) 등 8개 권역의 대회들로 치러졌다. 2013년 기원절 선포를 앞두고 하나님의 조국인 한반도의 전 국민이 천지인참부모를 모시고 지지할 수 있도록 하고, 국민을 대표한 전국 평화지도자들이 참부모님을 모시고 2012년 섭리적 승리를 위해 활동을 결의하자는 취지에서 거행되었다. 참부모님은 이 대회에서 천지인참부모정착실체말씀선포대회 강연문 말씀을 선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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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봉기
한봉기 韓奉器 항목체계 인물 출신지 경상남도 마산 성별 남 생년월일 1944.4.26(음) [정의] 참부모님의 영적인 지도하에 원화도(圓和道)를 체계화한 인물. [내용] 1944년 경상남도 마산에서 태어났다. 부모의 영향으로 어릴 적부터 불교 신앙을 하였으며, 마산대학 불교학과에서 수학하였다. 이후 동양한의대(현 경희대학교)에서 한의학을 공부하였다. 1967년 공군 제대 후 주병규의 전도로 1968년 8월 서울교회에서 입교(협회번호 8451번)하였다. 입교 후에는 1970년 서울 용산지구 문화부장 서리를 시작으로 1972년 충북기동대, 1973년 충주교회 총무부장, 충주 성화학원 간사, 충주 도천 교회장, 1974년 진천 교회장, 1975년 청원 교회장, 1976년 국제승공연합 승공강사로 공직생활을 하였다. 1970년대 초 공직생활 중 금식과 철야기도를 하면서 영적 체험을 하게 되었으며, 이때 영계의 선인으로부터 어떤 몸짓 1만 2천 수를 전수받았다. 이 몸짓을 1972년 3월, 조익훈과 몇 명의 무도인들에게 처음으로 가르치면서 원화도가 출발되었다. 이후 1976년 청평성지에서 참아버님께 시범을 보였으며, 이때 참아버님이 원화도(圓和道)라는 명칭과 도복의 문양(마름모꼴) 그리고 색깔(녹색과 자주색)를 정해 주셨다. 이후로 참아버님의 부름에 한남국제연수원 경호책임자로 임명되어 참부모님의 경호를 맡았다. 1988년 세계통일국개천일 행사 때 참부모님과 전 세계 지도자들 앞에서 원화도의 기원과 전수과정에서의 영적 체험 그리고 원화도 동작의 통일원리적 구조와 우수성에 대해 보고했다. 1989년 참아버님의 환고향 말씀에 따라서 고향인 마산으로 내려가 칠원 중앙수련원을 개원하여 원화도 후학의 양성에 매진하였다. 이후 원화도의 확산과 보급을 목적으로 사단법인 세계원화도연맹을 창립하여 한·일 무도인교류, 세계평화와 한반도 통일을 위한 무도인의 역할과 책임에 대한 지속적인 연대, 원화도 지도자 양성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환고향 당시에 참아버님으로부터 체육계·무용계·무도계의 인사들로부터 원화도를 인정받으라는 말씀에 따라서 이 분야의 전문가들을 만나 원화도의 우수성을 소개하고 검증과정을 거쳤다. 2010년 한봉기의 성화를 보고 받은 참아버님께서는 원화도의 발전과 확산 공로를 인정하여 파주원전에서 원전식을 하라고 말씀하셨다. 1970년 777가정 축복(고유번호8-77)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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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승운
한승운 韓承運 항목체계 인물 출신지 평안남도 안주군 대니면 용흥리 99번지 성별 남 생년월일 1909.1.20(음) [정의] 참어머님의 부친. [내용] 참어머님의 부친으로서 대부님이라고 불린다. 1909년 1월 20일 평안남도 안주군에서 부친 한병건과 모친 최기병 슬하의 5형제 중 장남으로 탄생하였다. 1919년 평안남도 만성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하여 4학년 때인 1922년 중퇴하였고, 이듬해 1923년 사립육영학교에 입학하여 1925년 졸업하였다. 그 후 보통학교 교원검정시험에 응시해 합격하였으며 1930년 8월부터 1939년 6월까지 자립육영학교 교사, 1941년 8월부터 1945년 10월까지 황해도 연백군 모란면 탁영리의 탁영공립보통학교 교원으로 재직하였다. 이어 1945년 11월부터 1946년 3월까지 만성공립보통학교의 교감으로 재직하였다. 꼼꼼하고 알뜰한 성격에 건장한 체격과 뛰어난 체력을 갖춘 분으로 불우한 이웃을 돕는 데 힘썼다. 독실한 기독교 신앙을 하면서 개혁적인 성향을 가져 이용도 목사의 새예수교에서 중견 간부로 활약하였다. 1933년 8월 평안지방회 서기와 용흥 기도소 담임자로 임명되었다. 새예수교 설립 당일에 교육국 책임자에 선임되기도 하였다. 이때 이용도의 소개로 홍순애 대모님과 결혼하여 오랜 기다림 끝에 1943년 참어머님께서 탄생하였다. 1946년 공산당국의 위협을 피해 월남하면서 대모님에게 같이 남하할 것을 간청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여 홀로 서울로 향하였다. 1946년 5월부터 서울 종로구 교동초등학교에서 교사로 있다가 교장으로 승진하여 1946년 10월부터 양주군 장흥면 교현리 장흥초등학교, 1947년 6월 광주시 실촌면 곤지암리의 곤지암초등학교 교장을 역임하였다. 이곳에서 지희선과 재혼하여 1948년 장남 한위일을 얻었다. 이후 안평초등학교, 점동초등학교, 남사초등학교, 미원초등학교, 관인초등학교, 볼음초등학교, 금성초등학교, 운서초등학교, 부평북초등학교 등에서 교장으로 근무하다가 1974년 정년퇴직하였다. 교육자로서 한 길을 걸어 경기도지사 표창, 녹조근정훈장, 대통령 공로배지, 대한교육연합회장 공로표창장을 수상하고 국민훈장 동백장 등을 수훈하였다. 퇴임 후 농장을 가꾸며 조용히 전원생활을 하다가 1978년 3월 18일 성화하였다. ☞ ‘홍순애’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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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승운 대부님 추모일
한승운 대부님 추모일 韓承運 大父님 追慕日 항목체계 의례상징 [정의] 참어머님의 부친 한승운 대부님의 성화일을 매년 기념하며 추모하는 날. [내용] 참어머님의 부친인 한승운 대부님의 성화일을 기념하여 추모하는 날로 2016년 이후 대모님 추모일을 기준으로 통합하여 지내고 있다. 한승운 대부님은 1909년 1월 20일 평안남도 안주군에서 출생하여 평안남도 만성공립보통학교을 거쳐 사립육영학교를 졸업하고 보통학교 교원검정시험에 응시해 합격하였다. 이후 1930년 사립육영학교를 시작으로 교직을 시작하여 1974년 정년퇴임할 때까지 교직에 봉사하였다. 독실한 기독교 신앙을 하면서 이용도 목사의 새예수교에서 헌신하였으며 홍순애 대모님과 성혼하였다. 참어머님 성탄 후 공산당국의 위협을 피해 월남하면서 대모님과 헤어졌다. 1974년 퇴임 후 농장을 가꾸며 조용히 생활하다가 1978년 3월 18일에 성화하였다. 참부모님은 한승운 대부님 묘를 홍순애 대모님과 합장하도록 하여 2016년 3월 29일 경기도 파주원전에 함께 모셨다. 이후 홍순애 대모님의 기일에 합동으로 추모예배를 드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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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얼교
한얼교 한얼敎 항목체계 종교일반종교학 [정의] 단군을 모시는 신종교들 중 하나. [내용] 1965년 신정일(申正一)이 대구에서 창시한 신종교들 중 하나로서 단군을 개조(開祖)로 모시며 정일회(正一會)라고도 한다. 신정일(본명, 申浩相)은 1938년에 대구에서 태어났으며 경북대 법대 재학 시절에 본격적으로 구도를 시작해 이후 전국 사찰을 돌며 대덕고승들과 법 거래를 나눴다고 한다. 1965년 경북 달성군 하빈면 천불대에서 진리를 깨닫고 무등동에서 설법을 시작하였으며, 1967년 4월에 문교부로부터 사단법인 정일회의 공식 인가를 받아 이사장에 취임하였다. 1968년 3월에 신정일은 대구 근교에 중앙교회를 마련하고 종교의식과 절차를 마친 후 교명을 정일교(正一敎)라 하고 법통(法統)에 취임했다. 1978년 1월 한얼교 선언을 발표하면서 교명을 한얼교로 바꾸었고, 같은 해 6월 한얼교중앙회를 대구에서 서울로 이전하면서 한얼교의 교명으로 법인 재인가를 받았다. 한얼교 선언문은 “홍익인간의 뜻을 정립성화(正立聖華)로 계승하고, 한얼교를 만교일본(萬敎一本)의 일본이라 하고, 제법귀정(諸法歸正)의 진리를 ‘한얼’과 ‘바름’으로 나타내 한얼교의 종지로 삼는다. 그로써 창교의 문을 여니 진리의 광명은 온 누리에 밝았다.”와 같았다. 한얼교 성전에는 어떠한 형상이나 상징을 두지 않으며, 또한 진리의 본체가 하나라는 것을 교리적으로 밝혀서 모든 종교의 화합을 제시한다. 깨달은 존재를 완성된 인간으로 보고 ‘바른님’이라 하고, 본성을 깨우치지 못한 보통 사람은 ‘삐뚠님’이라고 하며, ‘삐뚠님’이 자신의 참된 본성인 ‘나얼’을 찾아 ‘바른님’이 되어야 한다고 가르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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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용운
한용운 韓龍雲 항목체계 종교일반종교학 [정의] 승려이자 시인, 독립운동가. [내용] 승려, 시인, 독립운동가(1879-1944)로서 충남 홍성(洪城)에서 태어났다. 법명은 용운, 법호는 만해(萬海, 卍海)이며, 본명은 봉완(奉琓)이었다. 일찍이 한학을 배우다가 동학혁명에 가담했으나 실패로 돌아가자 1896년 넓은 세계에 대한 관심과 생활의 방편으로 집을 떠나 1896년 설악산 오세암(五歲庵)에 입산하였다. 1905년 인제 백담사(百潭寺)로 다시 입산하여 연곡(連谷)을 스승으로 승려가 되고 만화(萬化)에게서 법을 받았다. 출가 후에는 주로 교학(敎學)에 관심을 가졌으며, 특히 한문으로 된 불경을 우리말로 옮기는 일, 즉 불교의 대중화 작업에 주력하였다. 1910년에는 불교의 유신을 주장하는 논저 『조선불교유신론』을 저술하였다. 한일합병으로 국권은 물론 우리말마저 쓸 수 없는 피지배 민족이 되자, 그는 중국 동북지방의 삼성(三省)으로 갔다. 그곳에서 만주지방 여러 곳에 있던 독립군의 훈련장을 순방하면서 그들에게 독립정신과 민족혼을 심어 주는 일에 전력하였다. 같은 해 부산 범어사에 들어가 『불교대전(佛敎大典)』을 저술하여 대승불교의 반야사상(般若思想)에 입각해 종래의 무기력한 불교를 개혁하고 불교의 현실참여를 주장하였다. 1918년 월간지 「유심(唯心)」을 발간하였으며, 1919년 3·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서 독립선언서에 서명하고 체포돼 3년 형을 선고받고 복역했다. 1926년 한국 근대시의 기념비적 작품으로 인정받는 시집 『님의 침묵』을 출간함으로써 「유심」에서 시작된 문학 활동을 본격화했다. 이듬해 신간회(新幹會)에 가입하였으며, 이듬해 중앙집행위원이 되어 경성지회장(京城支會長)의 일을 맡았다. 1931년 조선불교청년회(朝鮮佛敎靑年會)를 조선불교청년동맹(朝鮮佛敎靑年同盟)으로 개칭하고, 불교를 통한 청년운동을 강화했다. 같은 해 월간지 ‘불교’를 인수하였으며, 이후 다수의 논설과 글을 통하여 불교의 대중화와 독립사상 고취에 힘썼다. 1935년 조선일보에 첫 장편소설 ‘흑풍(黑風)’을 연재하였고, 1937년 불교 계통의 민족투쟁비밀결사단체인 만당사건(卍黨事件)의 배후자로 검거되었다. 그 후에도 불교 혁신운동과 각종의 저술활동을 계속하다가 서울 성북동의 심우장(尋牛莊)에서 중풍으로 입적했다. 1962년 건국공로훈장 중장(현재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주요 작품으로는 장편 『박명(薄命)』, 『흑풍(黑風)』, 시집 『님의 침묵』 등이 있고, 불교관련 저서로 『조선불교유신론(朝鮮佛敎有神論)』, 『십현담주해(十玄談註解)』, 『불교대전』과 『불교와 고려제왕(高麗諸王)』 등이 있다.
가정연합 대사전은 천일국학술원에서 제공합니다.
이 사전은 2019년까지의 내용을 수록하였고 섭리의 변화에 따라 항목을 추가할 예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