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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아버님 소명
참아버님 소명 참아버님 召命 항목체계 역사사건 [정의] 참아버님이 예수 그리스도의 현현을 체험하고 하나님으로부터 천명을 받게 된 것. [내용] 참아버님이 1935년 4월 17일 부활절 새벽 정주군 묘두산 산상기도 중에 예수 그리스도의 현현을 체험하고 하나님으로부터 재림 메시아로서의 사명을 완수하라는 천명을 받게 된 것을 의미한다. 참아버님은 가문의 환란을 경험하고 장로교회에 입교하게 되었다. 입교 이후 신학문 수학과 함께 사고의 폭이 넓고 깊어지면서 장래 문제와 현실 문제에 대한 심각한 의문을 갖게 되었다. 영문 모를 집안의 환란, 일제치하 민족의 비참상, 인간의 고통과 비애를 깊이 체감하였다. 동시에 인생의 근본문제를 고심하면서 해결점을 찾고자 몸부림치며 기도하였다. ‘나는 누구일까, 나는 어디서부터 왔을까, 인생의 목적은 무엇일까, 죽은 후에 우리의 생명은 그대로 계속되는 것일까, 또 하나님은 과연 존재하는가, 하나님은 전능한가 혹은 무력한가, 만일 하나님이 전능하다면 하나님은 왜 인간세계의 문제를 해결해 주지 않는가, 이 지구상에는 왜 수많은 고통이 존재하는가?’ 등의 문제를 놓고 고민하였다. 그러던 중 정주군 묘두산에서 부활절 새벽 산상기도를 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현현을 체험하게 됐다. 예수 그리스도는 참아버님에게 메시아 사명을 인계하였으며, 하나님은 참아버님에게 복귀섭리의 종결과 인류 구원의 책임을 맡으라는 천명을 내렸다. 참아버님은 소명 이후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살면서 영계의 성현들과 끊임없이 대화하는 시간을 보냈다. 9년간의 준비기간을 거쳐 이때 받은 계시를 기반으로 참아버님은 ‘원리’를 구명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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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아버님 최후의 기도
참아버님 최후의 기도 참아버님 最後의 祈禱 항목체계 역사사건 [정의] 참아버님이 2012년 8월 13일 하늘 앞에 올린 최후의 기도. [내용] 참아버님이 2012년 8월 13일 천주성화를 앞둔 시점에서 섭리적 생애를 마감하며 하늘 앞에 올린 최후의 기도를 의미한다. 참아버님은 혹독할 정도로 성체에 무리를 가하는 섭리노정 끝에 2012년 8월 15일 폐렴과 그에 따른 합병증으로 중환자실에 입원하였다. 그 직전인 8월 12일 참아버님은 “하늘이여, 축복하소서! 끝을 맺게 허락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라고 하늘 앞에 기도를 올렸다. 이후 참어머님과 함께 2012년 8월 13일 섭리적 생애를 마감하는 특별한 최후의 기도를 “오늘 최종적인 완성 완결을 지어서 아버지 앞에 돌려드렸사옵고, 지금까지 한 생을 아버지 앞에 바친 줄 알고 있사오니, 그 뜻대로 이제는 모든 생을 정성 들여 종료하는 시간을 맞이하여 타락이 없었던 본연의 에덴동산으로 돌아가서 해와가 잘못되고 아담이 책임분담에 걸린 것을 다 초월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모든 것을 초월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모든 것에 대한 해방·석방의 권한을 가지고 누구든지 부모님의 뒤만 따라오면 4차원에서도, 14차원에서도 지옥 갈 수 있는 것을 천국으로 입양할 수 있는 4차원 입적과 14명의 아들딸들을 중심삼고 종족적 메시아가 국가를 대표할 수 있는 이름을 이루어 387개 나라(아벨 유엔권 194개국, 가인 유엔권 193개국)만 복귀하면 다 끝나는 것을 선포합니다. 그 일을 위한 모든 것을 다 이뤘사옵니다. 다 이루었사옵니다. 아주!”라고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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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아버님과 참어머님의 첫 만남
참아버님과 참어머님의 첫 만남 항목체계 역사사건 [정의] 참아버님과 참어머님이 청파동 전본부교회에서 첫 만남을 가진 섭리적 사건. [내용] 참아버님과 참어머님이 1956년 3월 청파동 전본부교회에서 첫 만남을 가진 섭리적 사건을 의미한다. 참어머님은 초등학교 졸업 직후 만 13세 때인 1956년 3월 “복중교에서부터 우리의 경배를 받으시던 분이 서울에 나타나셨으니 경배를 드리러 가자.”라는 홍순애 대모의 말에 따라 춘천에서 서울로 올라왔다. 이후 청파동 전본부교회에서 참아버님과 역사적인 첫 만남을 가졌다. 참아버님은 참어머님의 경배를 받은 후 이름을 물었고, 참어머님은 “한학자라고 합니다.”라고 대답했다. 참아버님은 “한국에 한학자가 태어났다.”를 3회 반복하고 “하나님, 한학자라는 이렇게 훌륭한 여성을 한국에 보내 주셨군요. 감사합니다.”라고 기도를 올렸다. 또한 참어머님에게 “한학자, 앞으로 희생해야지!”라고 말씀하였다. 참어머님은 참아버님과의 첫 만남에서 “재림주님의 상대로서 준비된 자신인 것을 은연중에 느꼈다.”고 말씀하였다. 역사적인 양위분의 만남을 기반으로 이후 참부모 현현을 위한 성혼 준비의 노정이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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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아버님의 도쿄 유학시절
참아버님의 도쿄 유학시절 참아버님의 도쿄 留學時節 항목체계 역사사건 [정의] 참아버님이 일본 와세다대학 부속 와세다고등공학교를 다니며 보낸 일본 유학시절. [내용] 참아버님이 1941년 4월부터 1943년 10월까지 일본 와세다대학 부속 와세다고등공학교 전기공학과에 재학하여 ‘원리’ 구명과 자아 주관 완성을 위한 신앙훈련, 항일독립운동을 수행하면서 도쿄에서 지낸 유학시절을 의미한다. 참아버님은 일제의 야만적 황민화정책의 기도가 극에 달한 1941년 적국을 바로 알아야 그들을 극복할 수 있다고 보고 일본 유학을 추진하였다. 1941년 3월 31일 오후 2시경 서울역에서 경부선 히카리호 열차를 타고 부산으로 떠났으며, 4월 1일 새벽 2시경 부산부두에서 삼엄한 일본 수상경찰의 조사를 거쳐 관부연락선 쇼케이마루(昌慶丸)를 타고 일본으로 향했다. 시모노세키에 도착한 후 도쿄에 입성한 참아버님은 4월 초 요도바시구 도쓰카쵸, 오늘의 신주쿠구 니시와세다 소재 와세다대학 부속 와세다고등공학교 전기공학과에 입학하였다. 참아버님이 일본에서 사용한 이름은 에모토 류메이(江本龍明)였다. 1928년 4월 설립된 와세다고등공학교는 현장 공업기술인력의 양성을 위해 설립된 고등학교와 학부 중간의 전문학교였다. 이공학부 시설과 교수진이 야간수업을 했다. 전교생은 1,320명, 졸업동기생은 580명(전기공학과 125명)이었다. 참아버님은 4월 4-5일 입학전형을 통해 8일 합격자 발표를 보고 대학에 입학하였다. 참아버님은 수학적 감정력 배양과 현대 과학문명 습득 및 새 시대 이념 정립을 위해 전기공학을 전공하였다. 참아버님은 도쓰카초 잇초메(戶塚町 一丁目), 오늘의 니시와세다(西早稻田) 2-6-13의 미쓰하시 고우조(三橋孝藏:1902-1983)·미쓰하시 이토(三橋伊都:1904-2000) 부부의 댁에서 하숙을 하면서 학교를 다녔다. 도보로 학교에서 하숙집까지는 7분가량, 하숙집에서 다카다노바바역까지는 22분가량 소요되었다. ‘원리’ 구명과 사상정립 일본 하숙시절 참아버님은 ‘원리 구명과 체계화’를 위해 정성을 들였다. 한국어, 일어, 영어 성경을 책상 위에 펼쳐놓고 매일 정독하며 사색하였다. 참아버님은 일본 유학시절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부자의 관계(神人之關係 父子之因緣)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부모이신 하나님을 깨닫고 그리워하며 참사랑을 자각하였다. 전기학원론의 상응·상반작용의 원리를 비판적으로 성찰하여 상응·상보작용 원리를 깨닫고 하나님의 창조원리를 구명하기도 하였다. 하숙집에서는 성서 외에 종교관계 서적이나 철학서를 읽으며 하나님주의를 주창할 사상체계를 검토하였다. 항일 지하학생운동 참아버님은 나라를 잃어버린 한을 품은 섭리의 일선장병으로서 사탄 세계 정복의 게릴라가 되기를 자처하였다. 유학시절 내내 재일 한인유학생회(밀칭 엽전회) 항일운동 주동자로서 지하활동을 벌였다. 은밀히 전단을 뿌리며 배일의식을 고조시키기도 하고, 그런 일로 취조를 받기도 하였다. 일황 척결 결사를 모의하고 최고 실력자들과도 연결해 여러모로 지하공작을 펼쳤다. 일경의 한인유학생 단속이 급격히 강화되던 상황 하에 요주의 감찰대상으로서 형사들의 미행이 그림자처럼 뒤따랐다. 매달 한 차례는 경시청 산하 도쓰카경찰서에 소환돼 취조를 받았고 행방과 일상동태에 대해 감시를 당했다. 방학 때 한국을 오갈 때에도 일본 경찰조직이 제일 먼저 알았으며, 부두나 정거장의 개찰구에서는 사복형사의 마중을 맞곤 하였다. 참아버님은 정계, 학계, 여성계, 노동계, 하층부의 현실을 직접 조사하였다. 대학총장과 대신들의 필생(筆生)으로 일하고 학교 사무처장들과 교제하면서 기밀을 입수 분석해 일본 패망의 시운을 감지하였다. 김구 선생의 망명임시정부와 연계해 현해탄을 건너 부산서 중국 안동까지 열차의 밑에 붙어 오가며 임정에 연락을 전달하기도 했다. 일황 유일주의 타도의 공동목표 아래 공산주의자 학우들과도 연대해 투쟁하기도 했다. 자아 주관 완성을 위한 수행 참아버님은 30세까지 ‘우주주관 바라기 전에 자아 주관 완성하라’는 수행표어를 두고 생활했다. 1일 2식을 하며 지냈고, 새 옷을 사 입지 않았다. 냉방에서 옆으로 누워 다리를 오그린 채 잠을 청했고 몸을 함부로 내보이지 않았다. 추호의 미동도 없는 정욕 주관의 영점기준을 지키며 여성을 멀리하였다. 또한 오관의 통제 훈련, 일시에 웃음을 멈추는 훈련, 간지럼을 참는 훈련, 보고 싶은 것을 참는 훈련 등을 거듭하였다. 인정을 물리치고 천정을 앞세웠다. 또한 참아버님은 일본 유학시절 동안 인간이 겪는 온갖 고락을 최저에서 최고의 입장까지 전면적으로 체험하는 모진 수련을 거쳤다. 하나님을 찾아 시나가와(品川)와 야마다니(山谷) 주변 빈민가와 사창가를 탐문하였다. 타락한 인간이 고통을 받고 갈등하고 고뇌하는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한을 직접 체휼하였다. 집에서 보내온 생활비는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베풀고 지게꾼, 짐수레꾼, 가와사키 철공소와 조선소의 막노동, 항공회사 유산탱크 속 원료정화장치 교환 작업, 바지선에 석탄 싣는 일 등 다양한 노동 생활을 하였다. 노동 일, 목수 일, 농부 일, 목동 일, 어부 일, 염전 일, 탄광 일, 숯 굽기, 회사 급사, 대신 비서, 필생 등을 두루 거치며 노동자들과 고락을 함께하였다. 당시의 경험에서 참아버님은 ‘만고지승자(萬苦之勝者)’라야 ‘영고지왕자(榮高之王者)’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조기 졸업과 귀국 참아버님은 1943년 9월 30일 와세다고등공학교 전기공학과 제25회로 조기 졸업하였다. 일본의 미국 하와이 진주만 공격으로 발발된 태평양전쟁 때문에 반년 단축졸업을 하게 된 것이다. 참아버님은 10월 4일 발 부관연락선 승선표를 예매하였으나 발길이 떨어지지 않아 출발을 보류하고 후지산을 등반하였다. 당시에 예약된 부관연락선은 곤론마루(崑崙丸)였다. 10월 4일 오후 10시 5분 승객과 승무원 655명을 태우고 시모노세키항을 출항한 곤론마루는 다음날인 5일 오전 1시 15분경 오키노시마 동북 약 10해리 해상에서 미군 잠수함의 어뢰에 명중돼 침몰하였다. 구조작업 끝에 생존자는 72명뿐이었던 비극적인 사건이었다. 하늘의 보호로 생명을 구한 참아버님은 10월 중순경 귀향하여 메시아로서 출발섭리를 최종적으로 준비하는 노정을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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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아버님의 메시아 노정 준비
참아버님의 메시아 노정 준비 참아버님의 메시아 路程 準備 / Ture Father’s preparation for Messiah course 항목체계 역사사건 [정의] 참아버님이 재림 메시아로서의 소명을 받은 이후 10년간 메시아 노정을 준비한 것. [내용] 1935년 4월 17일 묘두산에서 참아버님이 소명을 받은 이후 1945년 8월 15일 해방 때까지 10년간 메시아 노정을 준비한 것을 의미한다. 참아버님은 정주공립보통학교, 경성상공실무학교, 와세다고등공학교에 재학하며 학업을 수행하였다. 하나님의 진리를 밝히기 위한 정성을 들이며 ‘원리’ 구명의 노정을 10년간 보냈다. 성경강독과 기도의 정성, 인격 완성을 위한 다양한 노동과 직업 체험, 봉사활동을 펼치며 메시아·구세주·재림주로서 준비노정을 걸었다. ☞ ‘참아버님의 메시아 노정 출발준비’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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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아버님의 메시아 노정 출발준비
참아버님의 메시아 노정 출발준비 참아버님의 메시아路程 出發準備 항목체계 역사사건 [정의] 참아버님이 1935년 4월 17일 부활절 산중 기도 중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메시아 사명을 인계 받고 한국 해방 때까지 10년간 거쳐 온 내적인 공생애 출발준비의 노정. [내용] 하나님의 천명과 가족의 혼란기 참아버님은 장로교 입교 이후 신학문 수학과 함께 사고의 폭과 깊이가 달라지면서 장래문제와 현실 문제에 대한 심각한 질문을 갖게 되었다. 영문 모를 집안의 환란과 더불어 일제 식민지 치하 민족의 비참상, 약소민족의 고통과 비애를 마음 깊이 체감하였다. 이후 참아버님은 생가 뒤편에 있던 샛말잔등이라는 낮은 야산의 나무숲에 들어가 기도하는 시간이 많았다. 또 교회에서 가까운 묘두산 자락에 들어 홀로 깊은 사색에 몰두하는 가운데 울음으로 하늘과 담판하였다. 참아버님은 1935년 4월 17일 새벽 오랜 시간 산중 기도 끝에 형언할 수 없는 비상한 체험을 하게 되었다. 영적인 세계가 돌연히 눈앞에 펼쳐졌던 것이다. 홀연히 현현한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타락한 인류 때문에 고통과 슬픔 가운데 계신다고 말씀하였다. 기쁨과 행복 그리고 영광의 보좌에서 만천하를 군림하는 하나님이 아니라 자식을 잃어버린 부모로서 단장의 슬픔에 한 맺힌 외로움과 고뇌의 하나님이라는 것이었다. 예수 그리스도는 참아버님에게 하나님의 지상 역사에 대한 특별한 사명을 맡아 달라고 요청하였다. 인류를 죄악과 고통과 불행으로부터 건져내어 한 많은 하나님을 해방시켜 드리는 그 일을 해 달라고 당부한 것이다. 이후 참아버님은 하나님의 천명을 받고 10년간 메시아 노정의 출발을 위한 준비를 하였다. 정주공립보통학교 시절의 내적 준비 참아버님은 1935년 16세가 되던 해 4월 초 정주읍 소재 정주공립보통학교 4학년에 전학하였으며, 1938년 3월 25일 정주보통학교를 제29회로 졸업하였다. 당시의 졸업식에서 모든 식순이 끝나 갈 무렵 뜻밖에도 자진해서 단상에 나가 장시간 특별소견을 발표하였다. 일본의 식민지 교육정책의 허구성과 그 위선적 행태를 낱낱이 꼬집었고, 교사들 개개인에 대한 문제점도 일일이 지적하였다. 게다가 남의 나라에 와서 대우만 받으려는 일본인 지도자들의 소행을 신랄하게 공박하였다. 이를 계기로 참아버님은 일본경찰로부터 요시찰인물로 지목되기에 이르렀다. 경성상공실무학교시절의 내적 준비 참아버님은 고향 정주공립보통학교 졸업 후 서울로 올라왔다. 1938년 4월 12일 경성상공실무학교 전기과에 입학하였으며, 1941년 3월 8일 동교를 제3회로 졸업할 때까지 3년간 공부하였다. 3년간 자취와 하숙생활을 겸하였고, 매일 점심을 금식하며 인격 완성을 위한 침묵과 기도의 정성을 들였다. 신학문과 기독교 신앙에 열중하며 인생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성찰하였다. 오순절교회와 새예수교회의 신앙을 하였으며, 특히 명수대 새예수교회에서 주일학교 반사의 역할을 하며 헌신하였다. 와세다고등공학교 시절의 내적 준비 참아버님은 1941년 4월 8일 와세다대학고등공학교에 합격하였다. 1943년 9월 30일 졸업할 때까지 도쿄에서 ‘원리’ 구명과 심신 훈련, 항일 지하학생운동에 열중하였다. 원수 사랑을 실천하고 최저에서 최고까지의 생활체험을 하였으며 ‘우주주관 바라기 전에 자아 주관 완성하라’는 인생 수행표어를 실천하였다. 학창시절 독립운동을 한 혐의로 졸업 후 한국에서는 경기도경찰부에 구속되어 고문을 당하기도 하였다. 해방 전 메시아 노정 출발준비 참아버님은 1944년 3월 무렵 만주전업으로 취업하려던 진로를 바꿔 서울 용산의 가시마구미 경성지점 전기부에 취직하였다. 신령교단과 접촉하여 메시아를 고대해 온 기독교인들을 규합하여 메시아로서 출발을 준비하였다. 그러나 남성 3대 완성 사명자였던 김백문(1917-1990)이 참아버님을 재림 메시아로 증거했지만 모시는 사명을 다하지 못하여 해방 3년 전부터 전국의 유명한 목사, 부흥사, 신령교단, 사찰, 역술가 등을 답방하며 준비하던 참아버님의 메시아 노정 출발이 좌절되고 말았다. 참아버님은 “이 나라가 어디로 갈 것이냐? 위하는 천리의 대주재이신 하나님의 품을 떠나 가지고 어디로 갈 것이냐? 너, 대한민국아! 슬퍼하지 마라. 세상은 망하더라도 너는 망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나라와 세계를 위해 간곡한 기도를 올렸다. 하나님은 한국 기독교와 국가지도자들을 통해 메시아를 중심한 복귀섭리를 준비하고 해방 이후 7년 노정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되찾도록 준비하였다. 그러나 준비된 인물들이 참아버님을 받들어 메시아 노정 출발을 성사시키지 못하고 불신의 길로 갔다. 참아버님은 해방 직후 서울을 중심한 1차 출발섭리의 좌절 이후 1946년 6월 평양에서 2차 출발섭리를 모색하였으나 역시 허호빈 집단과 박을용 노파 등 준비된 인물들의 불신으로 좌절되었다. 참아버님은 최고 기준의 영광된 자리를 박탈당하고 최하의 옥중 수난 길을 통해 메시아 출발섭리의 기대를 재탕감복귀하여야 했다. 흥남에서의 2년 5개월 수감노정을 통해 생사지경을 넘어 옥중제자들을 전도하고 재출발의 기대를 확립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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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아버님의 서울 흑석동 시절
참아버님의 서울 흑석동 시절 참아버님의 서울 黑石洞 時節 항목체계 역사사건 [정의] 참아버님이 1938년 4월 12일 경성상공실무학교 전기과에 입학한 이후 1941년 3월 8일 동교를 제3회로 졸업할 때까지 서울 흑석동에서 보낸 시절. [내용] 참아버님이 1938년 4월 12일 경성상공실무학교 전기과에 입학한 이후 1941년 3월 8일 동교를 제3회로 졸업할 때까지 서울 흑석동에서 보낸 시절을 의미한다. 참아버님은 평양사범학교 진학시험에 응시하였다가 시력검사에서 색맹 판정을 받고 부득이 진로를 경성상공실무학교로 바꿔 서울로 오게 되었다. 경성상공실무학교는 일본인 도이요우지(土居山洋:1897-?)가 1934년 6월 경성부 연건동(京城府 蓮建洞)에 설립한 학교였다. 1936년 6월에 흑석정(黑石町), 즉 지금의 동작구 흑석1동 225-6으로 이전한 후 1945년 10월까지 운영했다. 그 후 변화를 거듭해 오늘날의 중앙대학교 사범대학 부속 중·고등학교로 정착했다. 전기과, 건축과, 상과가 있었으며 졸업 시점의 교직원은 30명, 전교생은 총 14개 학급 794명이었다. 동기생은 209명이었다. 참아버님의 학적기록에는 “명랑하고 활발하며, 꾸밈없이 진지하고, 강인하고 건전하며, 스스로 앞서서 모든 일에 대해 열심히 한다.”, “신체가 건강하고, 출석상황이 양호하며, 특히 축구를 좋아한다.”고 평가돼 있다. 참아버님은 학업은 물론 체력단련에 정진하여 아령, 철봉, 축구, 복싱, 씨름, 호신술 등 모든 운동을 섭렵하였으며 평생 건강을 위한 특수운동법도 이 시기에 고안하였다. 느린 평안도 말투의 교정을 위해 말을 빨리 하는 훈련도 하였다. 고행 감내와 이웃 돕기 참아버님은 자취와 하숙을 하며 고행에 가까운 생활훈련을 거쳤다. 노량진에서 통학하다가 흑석동으로 옮겨 생활하였다. 흑석1동 181-14 박운식의 하숙집, 3동 54-100 자취집, 2동 49-19 이기봉의 하숙집, 1동 190-18 김취도의 자취집, 2동 46-1 이기하의 자취집과 그 뒤편 49-40 자취집을 거쳐서 다시 이기봉의 집에서 마지막 자취와 하숙을 하였다. 주로 명수대 새예수교회 복음사(福音使) 권덕팔(權德八)과 친구 유구복(柳求福)과 함께 지냈다. 2학년 때부터는 같은 학교에 진학한 재종제 문승룡이 합류했다. 손수 요리를 해 식사를 하였으며, 점심은 늘 금식하였다. 점심 값으로는 어려운 이웃을 도왔다. 생일에도 금식을 하였다. 한겨울에도 보름씩 불을 넣지 않고 냉방에서 지냈다. 전구를 끌어안고 자다가 화상을 입기도 하였다. 30세까지 헌옷을 입었다. 여자들의 세계를 알아보기 위해 여장을 하고 시내를 다녀 보기도 했다. 방학에는 고향에 가지 않고 하늘과 나라와 갈 길을 놓고 정성을 들였다. 하숙비를 못 내는 하숙생들에게 돈을 빌려 주고 며칠간 금식을 했다. 전차비를 아끼려 걸어 다니며 걸인에게 적선하였다. 길에 쓰러진 사람을 학비로 약을 사 먹이고 기차를 태워 고향에 보내 주기도 하였다. 종로 3가 유곽 등 뒷골목을 조사하기도 하고 민족의 애달픈 사연을 놓고 걸으며 정성을 들이기도 했다. 한강변 빈민가를 주말에 찾아가 돕고 머리를 깎아 주면서 정을 나누기도 했다. 오순절교회와 새예수교회 참부모님은 서울 흑석동 시절 오순절교회와 새예수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였다. 오순절교회는 일제하 제도권 교회의 독선적 교회 행정과 신앙 양태에 저항의식을 가진 이들이 주도한 한국적 성령파 교회였다. ‘초대교회로 돌아가자’는 취지로 새로운 교회운동을 벌였다. 서빙고동 오순절교회 초기 신도였던 박운식 가족이 1937년 가을 흑석동 초가에 교회를 개척했다. 참아버님은 흑석동 시절 이 교회에 인연되어 출석하였다. 한편 이용도(李龍道:1901-1933) 목사를 중심으로 이호빈(李浩彬:1897-1986), 백남주(白南柱:1901-1949), 한준명(韓俊明), 박계주(朴啓周:1913-1966) 등 116명이 1933년 6월에 평양시 신양리(新陽里)에서 창립한 새예수교회도 흑석동에 자리를 잡았다. 이용도 목사의 타계 후 이호빈 목사가 선도감으로 이끌던 새예수교회는 1933년 11월에 평양시 하수구리 90번지 새예수교회 중앙선도원에서 창립선포식을 가졌다. 1938년 25개 처에 2천여 명의 신도로 성장하였다. 평양의 중앙선도원과 인연되었던 강숙경(康淑卿:1884-1941)은 자신의 서울 내자동 자택에서 새예수교회를 운영하였다. 1938년 강숙경의 둘째 딸 이기봉 가족이 흑석동에 하숙집을 짓고 이사한 후 1939년 강 씨의 주선으로 흑석 3동 48-71에 예수교 명수대예배당이 세워졌다. 참아버님은 이기봉의 댁에서 하숙하면서 교회 신축공사를 적극 도왔으며 이후 주일학생을 지도하였다. 참아버님은 틈나는 대로 상도동, 서울역 광장, 효창공원, 창덕궁, 창경궁에서 대중 전도와 노방강연을 하였다. 하루 12시간 이상 17, 18시간까지 기도하며 정성을 들였다. 밤이면 학교 근처 공동묘지 옆 솔밭, 교회 뒤편 서달산 바위언덕, 동작동 산기슭에서 처절한 담판기도를 했다.
가정연합 대사전은 천일국학술원에서 제공합니다.
이 사전은 2019년까지의 내용을 수록하였고 섭리의 변화에 따라 항목을 추가할 예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