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아버님의 도쿄 유학시절
참아버님의 도쿄 留學時節
항목체계 역사사건
[정의] 참아버님이 일본 와세다대학 부속 와세다고등공학교를 다니며 보낸 일본 유학시절.
[내용] 참아버님이 1941년 4월부터 1943년 10월까지 일본 와세다대학 부속 와세다고등공학교 전기공학과에 재학하여 ‘원리’ 구명과 자아 주관 완성을 위한 신앙훈련, 항일독립운동을 수행하면서 도쿄에서 지낸 유학시절을 의미한다. 참아버님은 일제의 야만적 황민화정책의 기도가 극에 달한 1941년 적국을 바로 알아야 그들을 극복할 수 있다고 보고 일본 유학을 추진하였다. 1941년 3월 31일 오후 2시경 서울역에서 경부선 히카리호 열차를 타고 부산으로 떠났으며, 4월 1일 새벽 2시경 부산부두에서 삼엄한 일본 수상경찰의 조사를 거쳐 관부연락선 쇼케이마루(昌慶丸)를 타고 일본으로 향했다. 시모노세키에 도착한 후 도쿄에 입성한 참아버님은 4월 초 요도바시구 도쓰카쵸, 오늘의 신주쿠구 니시와세다 소재 와세다대학 부속 와세다고등공학교 전기공학과에 입학하였다.
참아버님이 일본에서 사용한 이름은 에모토 류메이(江本龍明)였다. 1928년 4월 설립된 와세다고등공학교는 현장 공업기술인력의 양성을 위해 설립된 고등학교와 학부 중간의 전문학교였다. 이공학부 시설과 교수진이 야간수업을 했다. 전교생은 1,320명, 졸업동기생은 580명(전기공학과 125명)이었다. 참아버님은 4월 4-5일 입학전형을 통해 8일 합격자 발표를 보고 대학에 입학하였다. 참아버님은 수학적 감정력 배양과 현대 과학문명 습득 및 새 시대 이념 정립을 위해 전기공학을 전공하였다.
참아버님은 도쓰카초 잇초메(戶塚町 一丁目), 오늘의 니시와세다(西早稻田) 2-6-13의 미쓰하시 고우조(三橋孝藏:1902-1983)·미쓰하시 이토(三橋伊都:1904-2000) 부부의 댁에서 하숙을 하면서 학교를 다녔다. 도보로 학교에서 하숙집까지는 7분가량, 하숙집에서 다카다노바바역까지는 22분가량 소요되었다.
‘원리’ 구명과 사상정립
일본 하숙시절 참아버님은 ‘원리 구명과 체계화’를 위해 정성을 들였다. 한국어, 일어, 영어 성경을 책상 위에 펼쳐놓고 매일 정독하며 사색하였다. 참아버님은 일본 유학시절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부자의 관계(神人之關係 父子之因緣)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부모이신 하나님을 깨닫고 그리워하며 참사랑을 자각하였다. 전기학원론의 상응·상반작용의 원리를 비판적으로 성찰하여 상응·상보작용 원리를 깨닫고 하나님의 창조원리를 구명하기도 하였다. 하숙집에서는 성서 외에 종교관계 서적이나 철학서를 읽으며 하나님주의를 주창할 사상체계를 검토하였다.
항일 지하학생운동
참아버님은 나라를 잃어버린 한을 품은 섭리의 일선장병으로서 사탄 세계 정복의 게릴라가 되기를 자처하였다. 유학시절 내내 재일 한인유학생회(밀칭 엽전회) 항일운동 주동자로서 지하활동을 벌였다. 은밀히 전단을 뿌리며 배일의식을 고조시키기도 하고, 그런 일로 취조를 받기도 하였다. 일황 척결 결사를 모의하고 최고 실력자들과도 연결해 여러모로 지하공작을 펼쳤다. 일경의 한인유학생 단속이 급격히 강화되던 상황 하에 요주의 감찰대상으로서 형사들의 미행이 그림자처럼 뒤따랐다. 매달 한 차례는 경시청 산하 도쓰카경찰서에 소환돼 취조를 받았고 행방과 일상동태에 대해 감시를 당했다. 방학 때 한국을 오갈 때에도 일본 경찰조직이 제일 먼저 알았으며, 부두나 정거장의 개찰구에서는 사복형사의 마중을 맞곤 하였다. 참아버님은 정계, 학계, 여성계, 노동계, 하층부의 현실을 직접 조사하였다. 대학총장과 대신들의 필생(筆生)으로 일하고 학교 사무처장들과 교제하면서 기밀을 입수 분석해 일본 패망의 시운을 감지하였다. 김구 선생의 망명임시정부와 연계해 현해탄을 건너 부산서 중국 안동까지 열차의 밑에 붙어 오가며 임정에 연락을 전달하기도 했다. 일황 유일주의 타도의 공동목표 아래 공산주의자 학우들과도 연대해 투쟁하기도 했다.
자아 주관 완성을 위한 수행
참아버님은 30세까지 ‘우주주관 바라기 전에 자아 주관 완성하라’는 수행표어를 두고 생활했다. 1일 2식을 하며 지냈고, 새 옷을 사 입지 않았다. 냉방에서 옆으로 누워 다리를 오그린 채 잠을 청했고 몸을 함부로 내보이지 않았다. 추호의 미동도 없는 정욕 주관의 영점기준을 지키며 여성을 멀리하였다. 또한 오관의 통제 훈련, 일시에 웃음을 멈추는 훈련, 간지럼을 참는 훈련, 보고 싶은 것을 참는 훈련 등을 거듭하였다. 인정을 물리치고 천정을 앞세웠다. 또한 참아버님은 일본 유학시절 동안 인간이 겪는 온갖 고락을 최저에서 최고의 입장까지 전면적으로 체험하는 모진 수련을 거쳤다. 하나님을 찾아 시나가와(品川)와 야마다니(山谷) 주변 빈민가와 사창가를 탐문하였다. 타락한 인간이 고통을 받고 갈등하고 고뇌하는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한을 직접 체휼하였다. 집에서 보내온 생활비는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베풀고 지게꾼, 짐수레꾼, 가와사키 철공소와 조선소의 막노동, 항공회사 유산탱크 속 원료정화장치 교환 작업, 바지선에 석탄 싣는 일 등 다양한 노동 생활을 하였다. 노동 일, 목수 일, 농부 일, 목동 일, 어부 일, 염전 일, 탄광 일, 숯 굽기, 회사 급사, 대신 비서, 필생 등을 두루 거치며 노동자들과 고락을 함께하였다. 당시의 경험에서 참아버님은 ‘만고지승자(萬苦之勝者)’라야 ‘영고지왕자(榮高之王者)’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조기 졸업과 귀국
참아버님은 1943년 9월 30일 와세다고등공학교 전기공학과 제25회로 조기 졸업하였다. 일본의 미국 하와이 진주만 공격으로 발발된 태평양전쟁 때문에 반년 단축졸업을 하게 된 것이다. 참아버님은 10월 4일 발 부관연락선 승선표를 예매하였으나 발길이 떨어지지 않아 출발을 보류하고 후지산을 등반하였다. 당시에 예약된 부관연락선은 곤론마루(崑崙丸)였다. 10월 4일 오후 10시 5분 승객과 승무원 655명을 태우고 시모노세키항을 출항한 곤론마루는 다음날인 5일 오전 1시 15분경 오키노시마 동북 약 10해리 해상에서 미군 잠수함의 어뢰에 명중돼 침몰하였다. 구조작업 끝에 생존자는 72명뿐이었던 비극적인 사건이었다. 하늘의 보호로 생명을 구한 참아버님은 10월 중순경 귀향하여 메시아로서 출발섭리를 최종적으로 준비하는 노정을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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