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아버님의 서울 흑석동 시절
참아버님의 서울 黑石洞 時節
항목체계 역사사건
[정의] 참아버님이 1938년 4월 12일 경성상공실무학교 전기과에 입학한 이후 1941년 3월 8일 동교를 제3회로 졸업할 때까지 서울 흑석동에서 보낸 시절.
[내용] 참아버님이 1938년 4월 12일 경성상공실무학교 전기과에 입학한 이후 1941년 3월 8일 동교를 제3회로 졸업할 때까지 서울 흑석동에서 보낸 시절을 의미한다. 참아버님은 평양사범학교 진학시험에 응시하였다가 시력검사에서 색맹 판정을 받고 부득이 진로를 경성상공실무학교로 바꿔 서울로 오게 되었다. 경성상공실무학교는 일본인 도이요우지(土居山洋:1897-?)가 1934년 6월 경성부 연건동(京城府 蓮建洞)에 설립한 학교였다. 1936년 6월에 흑석정(黑石町), 즉 지금의 동작구 흑석1동 225-6으로 이전한 후 1945년 10월까지 운영했다. 그 후 변화를 거듭해 오늘날의 중앙대학교 사범대학 부속 중·고등학교로 정착했다. 전기과, 건축과, 상과가 있었으며 졸업 시점의 교직원은 30명, 전교생은 총 14개 학급 794명이었다. 동기생은 209명이었다. 참아버님의 학적기록에는 “명랑하고 활발하며, 꾸밈없이 진지하고, 강인하고 건전하며, 스스로 앞서서 모든 일에 대해 열심히 한다.”, “신체가 건강하고, 출석상황이 양호하며, 특히 축구를 좋아한다.”고 평가돼 있다. 참아버님은 학업은 물론 체력단련에 정진하여 아령, 철봉, 축구, 복싱, 씨름, 호신술 등 모든 운동을 섭렵하였으며 평생 건강을 위한 특수운동법도 이 시기에 고안하였다. 느린 평안도 말투의 교정을 위해 말을 빨리 하는 훈련도 하였다.
고행 감내와 이웃 돕기
참아버님은 자취와 하숙을 하며 고행에 가까운 생활훈련을 거쳤다. 노량진에서 통학하다가 흑석동으로 옮겨 생활하였다. 흑석1동 181-14 박운식의 하숙집, 3동 54-100 자취집, 2동 49-19 이기봉의 하숙집, 1동 190-18 김취도의 자취집, 2동 46-1 이기하의 자취집과 그 뒤편 49-40 자취집을 거쳐서 다시 이기봉의 집에서 마지막 자취와 하숙을 하였다. 주로 명수대 새예수교회 복음사(福音使) 권덕팔(權德八)과 친구 유구복(柳求福)과 함께 지냈다. 2학년 때부터는 같은 학교에 진학한 재종제 문승룡이 합류했다. 손수 요리를 해 식사를 하였으며, 점심은 늘 금식하였다. 점심 값으로는 어려운 이웃을 도왔다. 생일에도 금식을 하였다. 한겨울에도 보름씩 불을 넣지 않고 냉방에서 지냈다. 전구를 끌어안고 자다가 화상을 입기도 하였다. 30세까지 헌옷을 입었다. 여자들의 세계를 알아보기 위해 여장을 하고 시내를 다녀 보기도 했다.
방학에는 고향에 가지 않고 하늘과 나라와 갈 길을 놓고 정성을 들였다. 하숙비를 못 내는 하숙생들에게 돈을 빌려 주고 며칠간 금식을 했다. 전차비를 아끼려 걸어 다니며 걸인에게 적선하였다. 길에 쓰러진 사람을 학비로 약을 사 먹이고 기차를 태워 고향에 보내 주기도 하였다. 종로 3가 유곽 등 뒷골목을 조사하기도 하고 민족의 애달픈 사연을 놓고 걸으며 정성을 들이기도 했다. 한강변 빈민가를 주말에 찾아가 돕고 머리를 깎아 주면서 정을 나누기도 했다.
오순절교회와 새예수교회
참부모님은 서울 흑석동 시절 오순절교회와 새예수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였다. 오순절교회는 일제하 제도권 교회의 독선적 교회 행정과 신앙 양태에 저항의식을 가진 이들이 주도한 한국적 성령파 교회였다. ‘초대교회로 돌아가자’는 취지로 새로운 교회운동을 벌였다. 서빙고동 오순절교회 초기 신도였던 박운식 가족이 1937년 가을 흑석동 초가에 교회를 개척했다. 참아버님은 흑석동 시절 이 교회에 인연되어 출석하였다.
한편 이용도(李龍道:1901-1933) 목사를 중심으로 이호빈(李浩彬:1897-1986), 백남주(白南柱:1901-1949), 한준명(韓俊明), 박계주(朴啓周:1913-1966) 등 116명이 1933년 6월에 평양시 신양리(新陽里)에서 창립한 새예수교회도 흑석동에 자리를 잡았다. 이용도 목사의 타계 후 이호빈 목사가 선도감으로 이끌던 새예수교회는 1933년 11월에 평양시 하수구리 90번지 새예수교회 중앙선도원에서 창립선포식을 가졌다. 1938년 25개 처에 2천여 명의 신도로 성장하였다. 평양의 중앙선도원과 인연되었던 강숙경(康淑卿:1884-1941)은 자신의 서울 내자동 자택에서 새예수교회를 운영하였다. 1938년 강숙경의 둘째 딸 이기봉 가족이 흑석동에 하숙집을 짓고 이사한 후 1939년 강 씨의 주선으로 흑석 3동 48-71에 예수교 명수대예배당이 세워졌다. 참아버님은 이기봉의 댁에서 하숙하면서 교회 신축공사를 적극 도왔으며 이후 주일학생을 지도하였다. 참아버님은 틈나는 대로 상도동, 서울역 광장, 효창공원, 창덕궁, 창경궁에서 대중 전도와 노방강연을 하였다. 하루 12시간 이상 17, 18시간까지 기도하며 정성을 들였다. 밤이면 학교 근처 공동묘지 옆 솔밭, 교회 뒤편 서달산 바위언덕, 동작동 산기슭에서 처절한 담판기도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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