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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원복
최원복 崔元福 항목체계 인물 이칭/별칭 신애충모님 출신지 황해도 개성시 성별 여 생년월일 1916년 [정의] 타락한 어머니의 입장에서 해와의 타락을 복귀하는 사명을 다한 신애충모님. [내용] 타락한 해와를 대표하여 참부모님을 충심으로 모시는 효녀의 사명을 완수하여 신애충모님의 휘호를 받은 원로이다. 1916년 개성의 유복한 양반집의 외동딸로 태어나 기독교 신앙을 하던 모친의 영향으로 어린 시절부터 하나님과 결혼하겠다고 말하며 성장하였다. 또한 호수돈여자고등학교 재학시절 광주학생항일운동에 동참하였다가 유치장에 끌려간 일이 있을 정도로 애국심이 남달랐다. 1933년 이화여대 영문학과에 입학하여 성적최우수상과 모범상을 받았으며, 전국 영어웅변대회에서 1등을 차지하기도 하였다. 혼인 이후에 대학원을 졸업하고 이화여대에서 조교수로 재직했으며, 1950년 미국 국무성 초청으로 도미하여 미시간대학교 언어연구원에서 대학원 언어학과 교수법과정을 이수했다. 그 후 귀국하여 부산에서 학생들을 가르쳤으며, 1954년 민족과 국가에 새로운 희망이 생기리라는 희망을 가지게 되었다. 기도와 정성을 들이던 중 1954년 12월 14일 한충화 교수의 인도로 ‘원리’를 듣고 입교하였다. 입교 후 1955년 1월 3일 예수님탄신기념일을 기하여 참아버님께서는 특별한 섭리적 사명을 부여하고 축도를 해 주었고, 그녀는 감동의 눈물로 그 사명을 받았다. 그러나 입교 후 학교에서 종교를 이유로 퇴직조치를 당했으며, 가정에서 이혼을 당하고 사회적으로 비난을 받게 되었다, 많은 핍박과 고난 속에서 1956년 이정옥, 이득삼과 삼위기대를 맺어 변함없는 충정의 마음으로 뜻 길을 갈 수 있었다. 특히 1960년 참어머님의 신부 확정 후 참어머님을 모시는 일을 전담하였다. 3월 26일 가약식 전에 대모님이 참어머님을 임계(臨界)한다는 맹세의식을 치렀는데, 참부모님의 성혼식 중 한국 재림에 관한 의식에서 복귀한 어머니로서 참어머님께 책임 인계의 뜻으로 금반지를 드리고 3배를 올리는 의식을 하였다. 이외에도 교회의 여러 예식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으며, 참부모님에 대한 절대신앙·절대복종·절대사랑의 자세로 모심의 생활을 하였다. 또한 뛰어난 영어실력으로 참부모님의 세계 순회를 보좌하였으며, 『원리강론』을 영어로 번역하는 일에도 참여하였다. 1975년 참부모님께서는 타락한 어머니의 입장에서 개인적, 가정적 십자가를 지고 해와의 실패를 탕감하는 주도적 역할을 하면서 충성으로 참어머님을 보좌하여 제2차 7년 노정까지 승리할 수 있는 사명을 완결하였음을 공표하고, 이제 효녀의 입장에서 참어머님을 모시고 하늘 법도를 세워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이러한 섭리적 사명을 완수하여 2006년 1월 15일 성화하여 ‘신애충모님(信愛忠母任)’이라는 휘호를 하사받았다. ☞ ‘한충화’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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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정순
최정순 崔貞順 항목체계 인물 출신지 함경남도 원산 성별 여 생년월일 1914.4 [정의] 원주와 춘천 등 강원도 교회의 기반을 닦은 원로. [내용] 원주에서 입교하여 강원도에서 목회와 전도에 전념하며 교회의 기반을 닦은 원로이다. 1914년 4월 함경남도 원산에서 출생하여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며 성장하였다. 1937년 3월 이화여전을 졸업하고 1남 4녀를 낳았으나 한국동란 중에 남편과 아들을 잃고 말았다. 1952년 4월 원주여자상업고등학교 교사로 재직하면서 친구인 최원복의 인도로 1955년 3월 통일교회에 입교하였다. 원주에 있으면서 동료교사와 감리교회 신자들을 전도하여 원주통일교회의 기반을 닦았으며, 식구들과 함께 흙벽돌을 찍어 1956년 6월 원주교회를 준공하였다. 문순영, 문난영 등 4명의 딸을 책임져야 했던 가장이었지만 종교를 이유로 핍박이 심해져 교사를 사직하고 목회와 전도에 전념하였다. 1958년 1월부터 원주육군병원의 적십자 봉사실에서 근무하면서 군인과 직원들을 전도하였다. 1959년 4월에는 적십자사 강원도 지사의 부녀과장 겸 청소년과장으로 승진하였다. 1965년 3월 춘천지방법원 가정조정위원, 1968년 1월 YMCA 이사 등으로 활동하면서 강원도에서 교회의 기반을 닦기 위해 노력한 공로로 1968년 7월 제1차 7년 노정 헌신상을 수상하였다. 1971년 1월 국제승공연합 부인회 부회장, 1975년 4월 국제여성승공연합 이사 등을 맡았다. 2000년 8월 26일 성화하였다. ☞ ‘최원복’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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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제우
최제우 崔濟愚 항목체계 종교일반종교학 [정의] 동학(東學)을 창시한 초대교주. [내용] 조선 말기에 민족종교인 동학을 창시한 초대교주이다. 호는 수운(水雲) 또는 수운재(水雲齋)였다. 몰락한 양반 출신으로 어려서부터 한학을 배웠으며, 1855년(철종 6)부터 양산군 천성내원암(千聖內院庵)에서 수도생활을 시작하여 1860년(철종 11) 4월 천주(天主) 강림의 도(道)를 깨닫고 동학을 창설하였다. 동학은 유교, 불교, 도교의 교리를 바탕으로 예로부터 우리 민족이 믿어 오던 한울님 사상을 통합해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인내천(人乃天) 사상으로 발전시켰다. 최제우는 자신이 창시한 종교의 이름을 서양에서 들어온 서학(천주교)에 대항한다는 뜻에서 ‘동학’이라고 지었다. 인간의 주체성을 강조하고 지상천국의 실현을 주창한 동학은 농민들 사이에 급속히 파급되었으며, 이로 인하여 중대한 사회문제가 되었다. 특히 충청, 전라, 경상도지방에 많이 전파돼 후일 동학농민운동의 주체가 되었다. 1863년(철종 14) 정부는 동학을 사교(邪敎)로 규정하였으며, 최제우는 “올바르지 않은 종교를 만들어 민심을 어지럽게 했다.”는 죄목으로 붙잡혀 1864년에 처형당하고 말았다. 이후 동학은 제2대 교주 최시형이 이끌게 되었다. ☞ ‘동학’, ‘최시형’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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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주찬
최주찬 崔周讚 항목체계 인물 출신지 일본 나고야 성별 남 생년월일 1937.1.20(음) [정의] 해양사업의 초석을 놓은 36가정 원로. [내용] 36가정으로 부산에서 입교하여 평생을 공직에서 헌신하였으며, 미국 해양사업의 초석을 놓은 원로이다. 1937년 음력 1월 20일 일본 나고야 아이치현에서 부친 최학술과 모친 김봉원의 4남 3녀 중 둘째로 출생하였다. 부친은 공부를 하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갔으나 다섯 살 때 별세했다. 해방 후 형과 함께 한국으로 돌아와 부모의 고향인 경북 선산에 정착하였다. 한국동란이 발발하자 부산 범냇골에서 살기 시작하였다. 범냇골에서 평소 친하게 지내던 송문규의 인도로 일요일 예배에 참석하여 참부모님을 뵙고 은혜를 받아 1956년 4월 입교하였다. 1960년 9월 충북 괴산군 영풍면으로 개척전도를 나가 성전을 건축하였다. 1961년 5월 이홍련과 36가정 축복을 받았다. 1965년 충남 천안 지역장, 1968년 6월 충북 충주 지역장을 거쳐 통일산업 총판매 경상북도 담당 영업부장을 맡았다. 1975년 5월 제1차 중남미 순회사, 1977년 12월 일신석재 상임이사, 1979년 9월 미국 I.S.A. 사장, 1988년 12월 미국 I.O.E. 사장(I.S.A. 사장 겸직)을 역임했다. 1992년 11월 일화 수석부사장, 1994년 1월 15일 일신석재 사장을 거쳐 이스라엘 국가메시아로 봉직 받고 수고하다 2016년 12월 1일 성화하였다. 참부모님께서 ‘축 조국광복필승봉신대표자(祝 祖國光復必勝奉身代表者)’라는 휘호를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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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 하계 40일 전도
최초 하계 40일 전도 最初 夏季 40日 傳導 항목체계 역사사건 [정의] 협회 창립 후 1957년 처음으로 실시된 하계 40일 전도. [내용] 1954년 세계기독교통일신령협회 창립 이후 처음으로 대규모로 실시된 최초 하계 40일 전도를 말한다. 참아버님은 1957년 7월 20일 전 식구에게 최초의 하계 40일 전도에 참여할 것을 말씀하시고, 전도활동이 시작되기 전 몸소 7일 금식을 단행하며 전 식구들에게도 7일 금식을 지시하였다. 이 7일 금식은 최초로 전 식구가 함께 한 금식으로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 금식 전통의 기원이 됐다. 이전에도 비조직적, 비계획적인 소규모 전도활동을 펼쳤지만 1957년을 계기로 대규모의 조직적인 전도활동이 시작되어 전국 70개 주요 도시의 120개소에 각 2명씩 총 240명이 파송되었다. 전도지는 본인의 지원과 협회 본부의 조정으로 결정됐다. 40일 전도기간 중 8월 15일자로 『원리해설』 초판이 발간되어 전도현장에 보급되었고, 식구들은 제일 더운 절기에 땀을 흘리며 탕감조건을 세우고 전도활동을 벌였다. 참아버님은 “3년간 복역하고 고용살이한다는 입장에서 충성하라. 마을에 가서 충성의 도리를 가르쳐 주고 실천으로 보여 주라.”고 훈시하였다. 또한 전도를 출발할 때 가는 차비와 두 벌 옷만 가져가도록 지시하였고, 식사도 보리밥 이상의 음식을 먹지 말고 점심을 먹지 말라고 당부하였다. 가장 고생하는 자리에서 정성을 들이는 마음으로 개척전도에 임하여 이후 40일 전도 전통의 기준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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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후의 만찬
최후의 만찬 最後의 晩餐 항목체계 종교일반종교학 [정의] 예수 그리스도가 죽기 전날 밤 12명의 제자들과 행한 만찬. [내용]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기 전날 밤에 12명의 제자들과 함께 행한 만찬으로 ‘주의 만찬’이라고도 한다. 신약성서 마가복음에 의하면, 이 만찬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을 배신할 사람이 있다는 것을 지적한 동시에 빵은 자신의 몸이며, 포도주는 그가 많은 사람들을 위해서 흘리는 계약의 피라고 하였다. 마태복음에도 동일한 내용의 기사가 있다. 이 두 복음서에서 최후의 만찬은 ‘유월의 식사’(유월제)와 결부되어 있다. 즉 유월제에서 어린 양의 피가 이스라엘의 죄를 속죄해 주는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은 사람들의 죄를 대속하는 죽음이라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오늘날 그리스도 교회에서도 기념되는 이 만찬 의식은 세례와 함께 중요한 성사이다. 세례가 단 한 번 신생(新生)의 표시로서 주어진 것에 대해서 ‘유월의 식사’는 그리스도의 피에 의한 새로운 계약, 그리스도와 교류의 표시로서 반복적으로 부여된다. 나중에 최후의 만찬은 기독교 회화의 주요 주제들 중 하나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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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구욕
추구욕 追求慾 항목체계 사상교리 [정의] 어떤 대상을 통해 자신의 성상과 형상을 상대적으로 느끼려는 욕망. [내용] 인간 자신이 그의 성상과 형상을 어떤 대상을 통하여 상대적으로 느끼려는 욕망을 일컫는다. 예컨대 꽃에 대한 인간의 추구욕은 하나님의 창조이상을 중심으로 그 꽃의 미로부터 오는 정적인 자극을 통해 자신의 성상과 형상을 상대적으로 느껴 기쁨을 얻으려는 욕망을 말한다. 인간의 이러한 추구욕은 하나님을 닮아난 것이다. 무형의 하나님은 ‘체’가 없기 때문에 형상을 가진 피조세계로부터 오는 자극을 직접 느낄 수 없다. 이에 하나님은 자신을 닮은 실체대상을 통하여 자체의 본성상과 본형상을 상대적으로 느껴 기쁨을 누리기 위해 인간을 창조하였다. 인간이 책임을 완수하여 하나님과 사랑의 일체를 이룬 애적(愛的) 존재가 되면, 하나님은 영과 육을 아우른 대상인 인간으로부터 오는 정적인 자극을 통해 완전한 기쁨을 얻게 된다.
가정연합 대사전은 천일국학술원에서 제공합니다.
이 사전은 2019년까지의 내용을 수록하였고 섭리의 변화에 따라 항목을 추가할 예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