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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백문
김백문 金百文 항목체계 인물 이칭/별칭 初園 출신지 경상북도 칠곡 성별 남 생년월일 1917.10.19 [정의] 이스라엘수도원의 설립자이자 남성 신령역사를 담당했던 인물. [내용] 일제강점기의 기독교 지도자들 중 신령한 역사를 하였던 남성 지도자로 이스라엘수도원을 설립하고 참아버님을 증거했으나 믿고 모시지 못하여 사명을 다하지 못한 목사이다. 김백문은 김해 김씨로서 아버지 김광조와 어머니 문아지의 사이에서 4남 2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의사가 되고 싶어 함경북도 청진의 박 장로라는 사람이 운영하던 병원에서 약 짓던 일을 도왔다. 만 17세 되던 해에 회령에 살던 형을 방문했다가 김남조를 따라 신앙에 입문했다. 이후 신령파들과 교류하던 중 백남주를 만나 1935년 봄 김성도의 모임에 합류하였다. 1935년 10월 성주교단 창립행사에서 사회를 보았고, 백남주의 순회부흥회를 수행보좌하기도 했다. 1940년 4월 신령파의 진리체계를 세우기 위해 서울 조선신학원에 입학했다. 이후 신사참배를 거부하면서 고문을 당했고, 1943년 경기도 파주로 피신하였다. 재림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해야 한다는 하늘의 계시를 받고 1944년 파주에 예수교 이스라엘수도원을 열었다. 해방 후 1945년 10월 참아버님이 이스라엘수도원에 들어가 6개월 동안 이스라엘수도원 상도동교회를 인도하였다. 1946년 3월 2일 부활절 특별 집회에서 김백문이 참아버님에게 솔로몬의 영광이 임하게 될 것이라고 축복하였다. 세례 요한이 예수님을 증거한 것과 같은 입장이었지만 이후에 인간적 생각과 갈등으로 참아버님을 비판하였다. 참아버님이 이스라엘수도원을 떠나자 영적 능력이 퇴조하고 말았다. 이스라엘수도원은 서울 정릉에서 기독교 청수교회라는 이름으로 명맥을 잇고 있으나 20여 명의 소수 신도들만이 모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성신신학』(1954)과 『기독교 근본원리』(1958)를 집필했다. 일각에서는 『원리강론』이 이들 책과 유사하여 표절이라고 비판하지만, 『원리강론』은 1952년 집필된 ‘원리원본’에 기초하고 있으며 세부구조와 내용이 전혀 달라 근본적으로 상이한 경서라는 것이 밝혀져 이러한 비판은 근거 없다는 것이 중론이다. ☞ ‘백남주’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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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식
김병식 항목체계 인물 출신지 평양 성별 남 생년월일 1905.4.16 [정의] 1차 기성 축복을 받고 1차 7년 노정 표창을 받은 원로식구. [내용] 김병식은 우체국장과 국방부 이사관 등을 역임하며 교회의 외적 활동을 지원하고 은퇴한 후에는 목회를 하며 섭리의 일선에 참여한 원로식구이다. 1905년 4월 16일 평양에서 김세진의 3남 1녀 중 2남으로 태어나 10살 때 어머니를 여의고 할머니의 손에 키워졌다. 1919년 장대현교회에서 길선주 목사의 설교를 듣고 감명 받아 신자가 되었다. 이후 통일교회에 입교할 때까지 장로교회에서 21년, 감리교회에서 15년 동안 신앙생활을 하였다. 평양공립상업고등학교에서 수학한 뒤 문화사업에 종사하고자 1922년 체신학교에 진학, 일본인에게 지지 않겠다는 생각으로 학업에 매진하여 항상 전교 1등을 차지하였다. 1925년 졸업 후 평양우체국 전산과를 시작으로 여러 지역의 우체국장과 국방부 이사관까지 역임하며 사회적으로 존경을 받았다. 해방 후 북한에서 1년 반 동안 살았으나 종교 탄압을 피해 1947년 10명의 가족을 이끌고 자유를 찾아 월남하였다. 1955년 1월 아내 이인식을 통해 김인주와 오영춘을 만나 2월에 아들 김진환과 함께 흥인동교회에 출석했다. 입교 후 여러 시련과 시험이 있었으나 몽시를 통해 결심을 굳히고 신앙으로 극복하였다. 1960년 하계 전도부터 매년 동·하계 전도에 참여했다. 1963년 2월 제1회 기성가정 26가정으로서 축복을 받았고, 은퇴 후인 1965년 광주 지역장으로 임명되어 사역하였다. 이러한 활동으로 모범상과 1차 7년 노정 표창장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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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봉철
김봉철 金鳳哲 항목체계 인물 출신지 함경남도 북청 성별 남 생년월일 1932.7 [정의] 72가정 축복가정으로 초창기부터 헌신한 목회자. [내용] 교회의 초창기부터 교회에 헌신한 목회자로서 1968년 1차 7년 노정 대상을 받은 원로이다. 1932년 7월 함경남도 북청에서 외아들로 태어나 어린 나이로 한국동란에 참전한 뒤 인생에 관해 많은 고민을 하였다. 1954년 가을, 부산에서 교회의 찬송가를 듣고 무작정 들어간 곳이 통일교회였다. 부산 영도에서 참아버님이 기도하던 모습을 보고 감명 받아 입교를 결심했다. 이후 1957년 7월 20일 경북 영덕에서 특별 40일 하계 전도에 참여했다. 그해 10월 부산으로 가서 이요한 목사에게 가르침을 받았고, 1958년 4월 28일 교회의 청지기가 되자는 마음으로 통영교회에서 목회를 시작하였다. 이후 김제, 정읍, 울산, 밀양, 안동, 서울, 광주 등에서 목회를 하였으며 1977년 협회 본부의 가정부장을 거쳐 1984년 국제승공연합 국제국장을 역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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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봉태
김봉태 金奉泰 항목체계 인물 출신지 함경북도 청진 성별 남 생년월일 1944년 [정의] 777쌍 축복가정으로 청년·학생 활동을 이끈 지도자. [내용] 김봉태는 1968년 입교하여 47년 동안 공직을 하면서 청년·학생운동과 교육분야 등의 공직을 맡아 헌신한 지도자이다. 1944년 함경북도 청진군에서 출생하여 건국대학교에 재학 중 통일원리를 듣고 입교하였다. 참부모님이 그의 이름에 대해 “황금빛(金)같이 빛이 나는 대표, 아주 받들어(奉) 모시는 데 있어서 대표(泰)다. 좋은 이름이다.”라고 말씀하였다. 입교한 이래 47년간 공직의 길을 걸으며 한국대학원리연구회 회장, 세계평화청년연합 회장, 선문대학교 총장 등을 역임하며 청년·학생운동에 큰 공헌을 하여 2003년 천일국 주인상과 2013년 참부모님 기원절 특별공로상을 수상했다. 특히 청년대학생 통일운동을 개척하였고, 남북한 대학생들의 만남을 성사시켰다. 한국청소년순결운동본부를 통해 청소년 순결가치관의 교육을 위한 새 장을 열었다. 2015년 1월 14일 72세의 일기로 성화하였을 때 참부모님은 47년의 공직을 기려 ‘축 조국광복필승봉신대표자 김봉태 회장’이라는 휘호를 하사하셨다. 1970년 김명희 여사와 777가정으로서 축복을 받았으며 슬하에 4남을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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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철
김상철 金相哲 항목체계 인물 출신지 서울 종로구 성별 남 생년월일 1915.11.9 [정의] 영국과 미국에 말씀을 전한 초창기의 선교사이자 초종교운동가. [내용] 김상철은 초종교운동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많은 영적인 체험을 한 기반 위에서 통일교회에 입교하여 정부의 공직에 있으면서 영국에서 말씀을 전하고 미국 선교사로 활동하는 등 선교분야에서 공로를 세운 원로이다. 서울 종로구에서 초종교적 배경을 지닌 집안의 2대 독자로 태어나 어릴 적부터 다양한 종교를 섭렵했다. 1939년 연세대학교 영문과를 졸업하고 조선고무공업협회 전북 주재관으로 근무했으며, 1942년 강의홍과 혼인하였다. 해방을 전후하여 기독교와 불교에 관심을 가지고 초종교운동을 할 것을 구상하였다. 1954년 1월 이창환과 엄덕문에 의해 통일교회에 입교하여 협회의 창립에 참여하였다. 1954년 8월 유엔의 후진국 개발 원조프로그램의 정부 대표 3인에 선발되어 영국으로 가게 되었을 때 내적으로는 다윗과 같은 선교사의 사명을 가지고 간다고 생각하였다. 영국 웨일즈대학교 스원시대학에서 유엔 연구원으로 사회정책과 후생에 관해 공부하면서 ‘원리’ 말씀을 전파하였다. 1955년 ‘국제사도교회 연차대회’에서 말씀을 전했고, 귀국 후 6월에 호주 대표였던 여호수아 맥케이브 목사를 초대하여 80일 동안 외국인 최초로 ‘원리’를 깊이 있게 배우도록 하였다. 김영운과 함께 『원리해설』을 영어로 번역하여 1956년 출판하였다. 1959년 9월 18일 김영운에 이어 미국으로 선교를 떠났다. 침례신학대학원에 학생의 신분으로 입학하였으나 졸업을 두 달 앞두고 전도대상자의 밀고로 퇴학처분을 받았다. 이후 이민국에서 강제로 송환될 위기에 처했으나 대학을 옮겨 1965년 오레곤주립대학에서 교육학석사 학위를 받고 1967년 연방 정부의 일자리 센터에 상담원으로 취업하여 1971년까지 근무하며 공적인 기반을 만들었다. 시카고교회 등을 개척하며 유나이티드 페이스 그룹이라는 이름으로 초종교운동을 했다. 서부지역에서 목회를 하면서 ‘유나이티드 템플 불레틴(United Temple Bulletin)’이라는 소식지를 발간하였다. 이후 통일십자군의 책임을 맡아 활동을 이끌었으며, 1975년 미국 통일신학대학원 초대원장을 역임하였다. ☞ ‘엄덕문’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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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도
김성도 金聖道 항목체계 인물 출신지 평안북도 철산 성별 여 생년월일 1882년 [정의] 철산의 신령역사를 이끈 대표적 여성 종교 지도자이자 성주교단 교주. [내용] 김성도는 계시를 통해 재림주님이 한국에 오는 것을 알고 준비했던 신령파 성주교단의 교주이다. 만 17세에 27세 연상인 정항준과 혼인하여 불행한 결혼생활을 하다가 1906년 자신의 정신이상 증세와 아들의 질병이 치유되는 것을 경험하고 기독교에 입교하였다. 남편의 극심한 반대 속에서도 열성적인 신앙생활을 하다가 1917년 남편이 사망하자 본격적인 기도를 시작하였다. 기도 중에 입신하여 신비한 체험을 하고 1923년에는 예수님을 상봉하였다. 죄의 뿌리는 음란이며, 예수님은 유대인의 불신으로 억울하게 죽었고, 재림주는 인간으로 한국에 온다는 등의 계시를 12장의 종이에 기록하여 교회에 보고하였다. 그러나 장로교단에서 책벌을 받고 1925년 출교처분을 당하였다. 이후 교우들과 가정 집회를 가지다가 1933년 백남주, 이종현, 이호빈 등이 합류하여 1937년 성주교단을 창립하였다. 여성 중심의 신령파와 남성 중심의 신학파는 갈등을 하며 화합하지 못했지만 성주교단은 철산, 안주, 평양, 정주 등 20여 곳에 집회소를 확보하며 성장하였다. 그러다가 “머지않아 일본은 패망한다.”는 계시를 받았으며, 그것이 일본 관리들에게 알려져 1943년 가을 성주교단 중심신도 10여 명과 함께 투옥되었다. 고문의 후유증으로 1944년 4월 1일 타계하였다. ☞ ‘백남주’, ‘이호빈’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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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순화
김순화 金順華 항목체계 인물 출신지 함경남도 함흥 성별 여 생년월일 1912.1.4 [정의] 대한민국 정부에서 부녀국장으로 일하다가 입교하여 헌신한 초창기 여성 지도자. [내용] 김순화는 냉철한 이성과 뛰어난 리더십, 뜨거운 열정으로 대한민국 정부는 물론 초창기의 교회에서 부녀회장, 국제승공연합 부인회 부회장 등을 역임하며 헌신적으로 활동한 여성 지도자이다. 어린 시절부터 적극적인 성격으로 학업에 두각을 나타내 일본 공립여자고등학교에 입학하여 한국 학생대표를 맡기도 하였으나 2학년을 마치고 이화여고로 전학하였다. 이후 이화여자대학교 가사학과에 수석으로 합격하였다. 자연과학분야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각종의 운동도 잘해 운동선수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졸업 후 1935년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여자대학에서 연구원으로 있었으며 1937년 이화여고, 1938년 함흥영생여고에서 교편생활을 하였다. 결혼 후 교편생활은 그만두었지만 해방 후 1946년 애국부인회 서울시지부 조직부장에 이어 총무부장까지 역임하였다. 1948년 정부 수립 이후에는 사회부 부녀국 지도과장으로 발탁되어 행정부에서 일하였다. 1952년 구호사업에 헌신한 공로로 정부로부터 표창을 받고 1955년 부녀국장으로 승진하였다. 1956년 대한부인회 총본부 조직부장을 역임하는 등 여성 지도자로서 활발히 활동하였다. 1955년 1월 이화여대 선배인 이소담의 권유로 통일교회에서 ‘원리’ 강의를 듣고 입교하여 6월 사회 지도자들로 구성된 ‘선데이클럽’의 총무와 1956년 부인회 생활부장을 맡으며 교회의 일에 적극 동참하였다. 1957년 부인회장을 맡았으나 가정과 사회에서 박해가 있어 그 일을 그만두고 가정에서도 나오게 되었다. 남편과 아들들의 반대가 컸으나 큰아들 김영휘가 같이 입교하였다. 1960년부터 전국 순회사로 일하면서 사직공원에서 노방강의를 하기도 하였다. 1965년 서울 문화회관 강사를 맡았고, 전국적으로 구국강연을 다녔다. 1968년 공로상을 받았으며, 1971년 국제승공연합 부인회 부회장으로 임명됐다. 1974년 7월 8일 성화하였다. ☞ ‘김영휘’, ‘이소담’ 참조
가정연합 대사전은 천일국학술원에서 제공합니다.
이 사전은 2019년까지의 내용을 수록하였고 섭리의 변화에 따라 항목을 추가할 예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