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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우겐샤
코우겐샤 光言社 항목체계 해외 [정의] 일본어판 『원리강론』을 비롯해 일본 교회의 각종 교재 및 자료를 발행하는 출판사. [내용] 코우겐샤는 일본 교회의 각종 교재 및 자료를 제작하는 출판사이다. 일본어판 『원리강론』을 발행한 출판사로 1968년 4월 5일 설립되어 말씀과 전도를 위한 각종 교재를 출판하고 있다. 본사는 도쿄도 시부야구 오다가와쵸 37-18 토츠네 빌딩 3층에 위치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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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트디부아르공화국
코트디부아르공화국 Republic of Cote d’Ivoire 항목체계 해외 성격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의 선교국 [정의]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의 아프리카대륙권 선교국. [내용] 코트디부아르공화국은 1975년 참부모님에 의해 선교사들이 파송되면서 선교가 시작되었다. 독일인 모니카 올러(Monika Oelher)가 여선교사로 처음으로 파송되었으며, 이어 야마모토 테츠오 일본인 선교사가 파송되었고, 1975년에 다른 선교사들도 파송되었다. 선교사들은 언어의 장벽에도 불구하고 1976년부터 1978년까지 2일, 3일, 7일 수련회 등을 열성적으로 개최하였다. 이를 통해 새 식구들이 전도되기 시작하였다. 이후 코트디부아르공화국은 서아프리카의 본부 역할을 하여 1978년에는 김영운 선교사를 만나기 위해 아프리카의 모든 선교사들이 코트디부아르공화국에 집결하기도 했다. 1978년부터 1982년까지 베냉의 호웅벳지 피에르(Houngbedji Pierre)와 호웨드지씨 라모우(Houedjissi Rameau), 코트디부아르공화국의 안토인 보니(Antoine Bony), 조조 가브리엘(Zozo Gabriel), 디디 가보 길버트(Didi Gabo Gilbert), 그리고 치쎄 코네(Cisse Kone) 등 중심 식구들이 코트디부아르공화국과 서아프리카의 국가들에서 전도활동을 전개하였다. 이들은 선교사들로부터 전도하고 교육하고 만물을 복귀하는 법을 배웠다. 또한 이들은 개척선교를 시작하기 위해 미국에 파송되어 40일 수련에 참석하기도 하였다. 1976년부터 1980년 사이 아프리카의 많은 국가들에서 공산주의 출현과 군사 쿠데타가 빈번하게 발생하였고, 이로 인해 인근국가의 선교사들이 코트디부아르공화국에 머물게 되었다. 자이레의 아카히시 선교사, 니제르의 케빈 윈터(Kevin Winter) 선교사, 베넹의 카나다니(Kanadani) 선교사, 부르키나파소의 이토 선교사, 말리의 오바타 선교사 등이 쿠데타를 피해 코트디부아르공화국으로 왔다. 공산주의 때문에 본국에서 선교활동을 할 수 없게 된 이들은 코트디부아르에서 전도와 ‘원리’ 교육을 실시하였다. 특히 아카히시 선교사는 7일, 21일, 40일 ‘원리’ 강의를 1992년 떠날 때까지 계속하여 코트디부아르 선교에 큰 역할을 하였다. 베넹의 선교사인 케이시 하팅도 같은 이유로 코트디부아르공화국으로 이주하게 되었다. 1978년 야마모토 선교사가 다른 사명을 받게 되어, 케이시(Kathy)가 코트디부아르공화국의 선교사로 오게 되었다. 케이시의 선교활동으로 1982년 미국에서의 축복식에 서아프리카 식구들 8명이 참여하게 되었고, 1989년에는 첫 기성축복가정들이 한국에서의 축복식에 참여하게 되었다. 1991년 케이시 선교사가 나이제리아 선교사로 발령을 받아 떠나고, 후임으로 로버트(Robert Williamson) 선교사가 파송되었다. 로버트 선교사는 현지의 지도자들이 자립할 수 있도록 여러 사업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1982년 6000가정 축복을 받은 임마누엘 코우아씨(Emmanuel Kouassi)가 코트디부아르공화국 국가회장으로 임명을 받았다. 1992년에는 코트디부아르공화국에서 약 60쌍이 서울에서 개최된 축복식에 참석하였다. 이는 아프리카대륙에서 자이레 다음으로 우수한 결과였다. 이후 코트디부아르공화국에 세계평화여성연합이 창립되어 새로운 선교활동의 길이 열렸다. 창립대회는 국가공영방송으로 TV를 통해 전 지역에 방송되었고, 모든 국민들이 참부모님의 비전에 대해 더욱 확실히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세계평화여성연합 코트디부아르의 초대회장은 리카네 폴레트(Likane Paulette)였다. 1993년에 윌리암선(Williamson) 선교사가 종족메시아의 사명을 위해 떠난 후 김수용 목사가 선교의 책임을 맡게 되었다. 1993년부터 1995년까지 약 6백 쌍이 1995년 8월의 축복식에 참여하게 되었는데, 이는 코트디부아르공화국 선교 이래 최고의 실적이었다. 당시에 교육과 만물복귀의 책임은 3만가정인 아다마 도움비아(Adama Doumbia)가 맡고 있었다. 1996년 코트디부아르공화국에 4명의 국가메시아들이 파송되었다. 김관해(한국), 추가사 요시다(일본), 프랭크 카프만(미국), 그리고 허버트 아놀디(독일) 등 국가메시아들은 코트디부아르공화국의 많은 도시들에서 사전 축복을 진행하며 열심히 선교활동을 하였다. 특히 이때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이 창립되어 정치, 사회지도자들과 시민사회의 지도자들에게 좀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었다. 1999년에는 세계평화초종교초국가연합이 코트디부아르공화국에 창립되었다. 이 단체를 중심으로 국가지도자들을 연결하는 활동을 활발히 전개하였다. 그 결과 국회의원, 장관, 종교 지도자, NGO 지도자 등 1천5백 명 이상의 국가지도자들을 평화대사로 임명하였다. 세계평화초종교초국가연합의 이러한 성공은 대학원리연구회, 세계평화교수협의회, 세계평화여성연합,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 그리고 세계평화청년연합 등의 지속적인 노력과 헌신의 결과였다. 코트디부아르공화국에는 10개의 교구 17개의 교회에 2,380명의 식구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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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스탄트대회
콘스탄트대회 콘스탄트大會 / Konstazer Konzil 항목체계 사상교리 [정의] 교황권이 약화되는 계기가 된 로마가톨릭교회의 제16차 공의회. [내용] 1378년 로마의 그레고리오 12세와 아비뇽의 베네딕투스 13세가 경쟁교황으로 선출되고 1409년 피사공의회가 새 교황으로 요한네스 23세를 선출하면서 3명이나 교황이 되자 이를 해결하기 위해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지기즈문트의 지시로 요한네스 23세가 콘스탄츠에서 소집한 공의회이다. 중세 최대의 종교회의로 각국의 군주·추기경·대주교·신학박사들과 여러 지도자들을 포함하여 약 10만 명의 군중이 집합하여 회의를 열었다. 그 결과 세 교황을 모두 폐위할 것을 의결하고 새로운 통일교황으로 교황 마르티노 5세를 선출하였다. 또한 공의회의 권력은 교황권보다 우위에 있으며, 교황도 신앙 및 교회 개혁에 관한 문제에 대해서는 회의의 결정에 복종해야 한다는 공의회 지상주의를 천명하였다. 교회의 개혁을 중요 의제로 정했기 때문에 개혁의 교회 회의라 불렸으나 위클리프를 이단으로 몰고 종교 개혁가 후스와 제롬을 화형에 처하여 이단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였다. 그 결과 더 많은 지역에서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이 일어나게 되었다. 또한 교황보다 공의회의 권위가 더 높다고 인정하고 황제의 명령에 교황이 굴복하는 것을 보여 주어 교황권이 약화되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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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스탄티노플
콘스탄티노플 Constantinople 항목체계 사상교리 [정의] 터키 이스탄불의 옛 이름으로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정한 수도이자 동로마제국의 수도. [내용] 본래의 이름은 비잔티온(Byzantion)이었으나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동서 무역의 요충지이자 천연인 항만을 가지고 있는 흑해 어귀의 요충지를 324년 수도로 선택하면서 콘스탄티노폴리스로 330년 이름이 바뀌었다. 한국과 일본 등에서는 영어식 표기대로 콘스탄티노플이라고 부른다. 395년 로마제국이 동서로 분열되면서 콘스탄티노폴리스는 동로마제국의 수도로 기능했으며 동방정교회 세계 최대 도시로서 번영을 이뤘다. 고대 건축물이 보존된 대도시이자 정교회의 총대주교가 위치한 정교회 중심지로서 비잔틴 문화의 중심지이다. 제4차 십자군의 공격을 받아 1204년 함락되었고, 1453년 다시 오스만제국에 의해 함락되었다. 오스만제국의 수도가 되었다가 1923년 터키공화국이 수립되면서 1930년 이스탄불이라는 이름으로 공식 개칭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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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스탄티노플신조
콘스탄티노플신조 콘스탄티노플信條 / Constantinopolitan creed 항목체계 종교일반종교학 [정의] 381년 정통 신앙을 수호하기 위해 채택된 그리스도교의 신앙고백. [내용] 381년 콘스탄티노플공의회에서 채택된 그리스도교의 신앙고백이다. 현재의 가톨릭교회, 개신교회, 동방정교회가 공통적으로 지닌 교의의 기본을 간결하게 서술하고 있으며 원문은 그리스어이다. 예루살렘 세례 신조를 기초로 한 것으로서 내용은 아버지인 신,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 및 성령의 삼위일체 신앙을 정하고, 특히 창조주와 동일 실체의 아들인 그리스도의 본질을 상세히 규정한다. 이어서 그리스도의 육화(肉化), 수난, 부활, 승천, 나아가서 다가올 재림을 언급한 다음에 성령의 출발을 기록하고 유일한 공교회, 세례, 사자의 부활에 대한 신앙으로 연결된다. 324년의 니케아신조와 기본구조는 같으나 교회, 세례, 죽은 자의 부활 및 영생에 관한 조항이 삽입된 것이 다르다. 보통 ‘니케아·콘스탄티노플신조’라고도 한다. 서방교회에서는 중세 초기부터 이 신조의 성령 출발에 대해서 ‘아들로부터’라는 말을 삽입해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 동방교회와 대립했다. 동방교회에서는 ‘아버지로부터’ 성령의 출발을 믿는다. 교회사적으로 대표적인 신조는 하나님에 관한 정통 교리를 정립한 니케아신조(324년), 성령에 대한 정통 교리를 정립한 니케아·콘스탄티노플신조(381년), 구원론을 정립한 에베소공의회(431년), 기독론에 대한 정통 교리를 정립한 칼케돈신조(451년) 등이다. ☞ ‘니케아신조’, ‘예루살렘 세례 신조’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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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스탄티누스대제
콘스탄티누스대제 콘스탄티누스大帝 / Constantinus I 항목체계 사상교리 [정의] 그리스도교를 종교로 공인한 첫 번째 로마 황제. [내용] 밀라노칙령을 선포하고 니케아공의회를 열어 그리스도교 국가의 기틀을 만든 황제이다. 272년 전형적인 군인계급 집안에서 태어나 무사로 성장하였다. 아버지 콘스탄티우스는 292년 서로마제국의 막시미아누스의 딸 테오도라와 결혼하기 위해 어머니 헬레나를 버리고 서로마제국으로 갔다. 그는 동로마제국의 니코메디아로 보내져 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의 궁정에서 성장하다가 305년 아버지가 서로마제국의 황제가 되자 서로마제국으로 가서 복무하였다. 306년 아버지가 병사하자 장병들은 그를 황제로 추대하였다. 여러 내전을 거쳐 312년 서로마 전체를 다스리는 황제가 되었고, 324년 동서 로마를 통합하여 단독 황제가 되었다. 이 과정에서 그는 그리스도교에 귀의하여 312년 자신이 로마의 황제가 된 것은 신의 보살핌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는 자신이 신앙심 없는 자들을 진압하기 위해 선택된 신의 도구라고 하면서 313년 그리스도교를 종교로 인정하고 몰수한 그리스도교의 재산을 돌려 줄 것을 밀라노칙령으로 공표하였다. 또한 신학논쟁에 해결책을 마련하기 위해 325년 니케아공의회를 열었다. 이로 인해 로마제국은 그리스도교 국가로 출발할 수 있었으며, 비잔틴제국과 서유럽 중세문화가 발전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하였다. 수도 콘스탄티노플은 로마제국의 수도 역할을 하였고, 이후 그리스도교는 로마의 국교가 될 수 있었다. 이러한 공로로 그리스 정교회에서는 콘스탄티누스를 성인으로 추앙하고 있다. ☞ ‘니케아공의회’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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콩고민주공화국
콩고민주공화국 콩고民主共和國 / Democratic Republic of Congo 항목체계 해외 성격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의 선교국 [정의]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의 아프리카대륙권 선교국. [내용] 콩고민주공화국(Democratic Republic of Congo)의 면적은 한반도의 약 11배인 2,344,858평방킬로미터이고, 인구는 8,433만 명이며, 수도는 킨샤샤(Kinshasa)이다. 종교는 가톨릭(50퍼센트), 개신교(20퍼센트), 킴반기스트(10퍼센트), 이슬람교(10퍼센트), 토착신앙(10퍼센트)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언어는 불어와 토착어를 사용한다. 1960년 6월 30일에 벨기에로부터 독립하였다. 정부는 대통령중심제이며, 의회는 하원과 상원으로 구성된다. 한국과는 1963년 4월 1일에 수교하였고, 교민은 120명이다.
가정연합 대사전은 천일국학술원에서 제공합니다.
이 사전은 2019년까지의 내용을 수록하였고 섭리의 변화에 따라 항목을 추가할 예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