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원리강론 정치 경제 및 사상의 성숙기
원리강론 정치 경제 및 사상의 성숙기 原理講論 政治 經濟 및 思想의 成熟期 항목체계 사상교리 [정의] 『원리강론』 후편 제5장 제3절에 해당하는 내용. [내용] 『원리강론』 후편 제5장 제3절에 해당하는 내용으로서 가인형의 민주주와 아벨형의 민주주의, 삼권분립의 원리적 의의, 산업혁명의 의의, 열국의 강화와 식민지 분할, 문예부흥에 따르는 종교와 정치 및 산업의 혁명 등에 대해 자세히 다루고 있다. 인류 역사는 선악을 쪼개어 하늘 편을 찾아 세우는 사탄 분립역사이다. 『원리강론』은 타락세계가 사탄 편의 가인형 세계와 하나님 편의 아벨형 세계로 분립되어 갈등과 투쟁을 거듭하다가 종국에 가서는 참부모 메시아에 의해 하늘 편 사회주의인 공생·공영·공의주의 사회로 통일된다고 밝히고 있다. 이러한 섭리노정에 의해 가인형의 인생관과 아벨형의 인생관이 각각 확립되었고, 사회도 이 두 인생관에 입각한 형태로 제도화되었다. 가인형의 민주주의는 프랑스혁명으로 인하여 형성되었다. 당시 프랑스에서는 계몽사상을 숭배하는 시민계급을 주축으로 절대주의를 비판하고 구제도의 잔해를 파타하려는 의식이 고조되었다. 이에 1789년 시민계급이 자유와 평등, 박애를 기치로 자유민주주의를 주장하는 시민혁명을 일으켰다. 이 혁명으로 인해 형성된 민주주의는 유물사상으로 흘러간 계몽사상, 즉 가인형 인생관을 주축으로 출현한 것이기 때문에 이를 가인형의 민주주의라고 부른다. 이 가인형의 민주주의가 발전한 것이 오늘날의 공산주의 세계이다. 반면 영국이나 미국에서는 아벨형의 민주주의가 탄생하였다. 무신론 및 유물론의 추종자들이 절대주의 사회를 무너뜨릴 목적으로 주창한 가인형의 민주주의와 달리 아벨형의 민주주의는 아벨형 인생관의 결실체인 열광적인 기독교 신도들이 신교의 자유를 찾기 위하여 절대주의와 싸워 승리함으로써 이루어진 것이었다. 영국에서 찰스 1세가 전제주의와 국교를 강화하는 정책을 펼치자 이에 반발한 청교도들은 신앙의 자유를 찾아 유럽이나 신대륙으로 이동하거나 무력으로 국왕에 항거하였고, 그 혁명의 결과로 민주주의가 수립되었다. 이렇듯 영국이나 미국에서 실현된 민주주의는 프랑스의 대혁명으로 인하여 실현된 민주주의와는 그 발단부터가 달랐다. 이 아벨형의 민주주의가 더욱 발달하여 오늘날의 민주주의 세계를 형성하였다.
-
원리강론 종교 및 사상의 투쟁기
원리강론 종교 및 사상의 투쟁기 原理講論 宗敎 및 思想의 鬪爭期 항목체계 사상교리 [정의] 『원리강론』 후편 제5장 제2절에 관한 내용. [내용] 『원리강론』 후편 제5장 제2절에 해당하는 내용으로서 가인형의 인생관과 아벨형의 인생관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인간은 창조주 하나님만을 대하도록 창조되었으나 타락하여 하나님과 사탄을 모두 대할 수 있는 비원리적인 중간 위치에 처하게 되었다. 이에 하나님은 선악의 모체인 인간을 선 편인 아벨형과 악 편인 가인형으로 분립하고, 종국에 가서는 가인이 아벨의 참사랑에 의해 순종굴복하여 가인과 아벨 모두를 구원하는 섭리를 진행해 나왔다. 이처럼 복귀섭리는 오랜 역사의 기간을 두고 개인에서부터 가정과 사회, 세계에 이르기까지 가인, 아벨 두 형의 선악 분립역사에 의해 이루어져 왔다. 따라서 역사의 종말에도 타락세계는 가인형의 공산세계와 아벨형의 민주세계로 분립되는데, 이를 위해서는 먼저 가인 아벨 두 형의 인생관이 확립되어야 한다. 인간 본성의 외적인 추구는 헬라 사상의 복고운동을 일으켜 인본주의를 낳았고, 인본주의를 뒷받침하여 일어난 반중세적인 문예부흥운동은 모든 것을 자연과 인간본위로 대치시켰다. 신을 중시하던 중세적 인생관과 달리 이 시기에는 이성과 경험에 의한 합리적인 비판과 실증적인 분석을 통해 인간과 자연을 인식하는 가인형의 인생관이 대두되었다. 대표적으로 데카르트는 모든 진리는 인간이 나면서부터 가지고 있는 이성에 의해서만 얻을 수 있다는 이성론을 주장하였고, 영국의 베이컨은 오직 경험에 의해서만 진리를 파악할 수 있다는 경험론을 주장하였다. 이성을 중심한 합리주의 사상과 경험에 토대를 둔 인간 중심적 사상은 자연과 인간을 신으로부터 분리시키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이후 가인형 인생관의 영향을 받아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유물론을 제창하였고, 이러한 인생관은 더욱 성숙하여 오늘날의 공산주의 세계를 이루었다. 한편 인간의 본성적인 추구는 외적인 것에만 머물렀던 것이 아니라 내적인 차원에서도 활발히 일어나 히브리 사상 복고운동을 일으킴으로써 종교개혁이 대두하게 되었다. 이 운동으로 인해 철학과 종교는 창조본성을 지향하는 입체적인 인생관을 수립하게 되었는데, 이를 가리켜 아벨형 인생관이라고 한다. 인간을 신과 신앙으로부터 분리시킨 가인형 인생관과 달리 아벨형 인생관은 그들로 하여금 더욱 고차원적인 차원에서 신을 추구하도록 인도하였다. 대표적으로 독일의 칸트는 경험론과 이성론을 흡수하여 인간 본성의 내외 양면을 추구하는 아벨형 인생관을 개척하였다. 종교계에 있어서는 독일의 스페너를 중심한 경건주의, 신비주의자 포스를 원조로 한 퀘이커파, 영계의 비밀을 밝힌 스웨덴보리 등을 통해 종교적인 정열과 신비한 체험을 중시하는 내적 개혁운동이 활발히 일어났다. 이와 같은 아벨형의 인생관이 더욱 발전하여 오늘날의 민주세계를 이루었다.
-
원리강론 중생론
원리강론 중생론 原理講論 中生論 / Rebirth 항목체계 사상교리 [정의] 『원리강론』 전편 제7장 제4절 1부의 내용으로 다시 태어남에 대한 통일신학적 이해. [내용] 중생의 사명으로 본 예수님과 성신 예수님은 자기를 찾아온 유대관원 니고데모에게 중생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말씀하였다.(요한복음 3:3) 중생이라는 말은 거듭난다는 뜻이다. 타락한 인간이 중생해야 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아담과 해와가 창조이상을 완성하여 인류의 참부모가 되었다면, 그들로부터 태어난 자녀들은 원죄가 없는 선한 자녀가 되어 지상천국을 이루었을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타락하여 인류의 악의 부모가 되었기 때문에 악한 자녀들을 번식하여 지상지옥을 이루었다. 따라서 타락한 인간들은 원죄가 없는 선한 자녀로 거듭나야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있다. 우리를 낳아 주는 것은 부모가 아니면 안 된다. 그런데 원죄 있는 악의 부모가 원죄 없는 선의 자녀를 낳을 수는 없다. 따라서 이 선의 부모가 타락한 인간들 가운데에는 있을 수 없다. 그러한 부모는 하늘로부터 강림해야 한다. 그렇게 온 분이 예수님이었다. 예수님은 타락한 자녀들을 원죄가 없는 선의 자녀로 다시 낳아 지상천국을 이룩하기 위하여 참아버지로 온 분이다. 그러므로 베드로전서 1장 3절에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중생)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라는 말씀이 있는 것이다. 예수님은 아담으로써 못 이루었던 참아버지로 왔기 때문에 성경은 그를 후 아담(고린도전서 15:45), 영존(永存)하신 아버지(사사기 9:6)라고 하였으며 하나님은 선지자 엘리야를 다시 보내어 그로 하여금 타락한 인간들의 마음을 부모로 오는 예수님 앞으로 돌이키게 함으로써 그들로 자녀가 되게 하겠다고도 말씀하였다.(말라기 4:6) 예수님은 다시 올 때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오리라(마태복음 16:27)고 하였다. 그런데 아버지 혼자서 자녀를 낳을 수 없다. 그러므로 타락한 자녀들을 선의 자녀로 다시 낳아 주기 위하여 참아버지와 함께 참어머니도 있어야 한다. 죄악의 자녀들을 다시 낳아 주기 위하여 참어머니로 온 분이 성신이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성신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요한복음 3:5) 말씀하였다. 이와 같이 성신은 참어머니로서 후 해와로 온 분이기 때문에 그를 여성신(女性神)으로 계시 받은 사람이 많다. 그리고 성신이 여성신이기 때문에 성신을 받지 않고서는 예수님 앞에 신부로 설 수 없다. 이와 같이 성신은 여성신이기 때문에 위로와 감동의 역사(役事)를 하며(고린도전서 12:3), 해와가 지은 죄를 탕감복귀하기 위하여 죄를 씻는 역사를 해야 한다. 로고스의 이성성상으로 본 예수님과 성신 로고스라는 낱말은 헬라어로서 말씀 혹은 이법(理法)이란 뜻을 가지고 있다. 요한복음 1장 1절 이하를 보면, 로고스는 하나님의 대상으로서 하나님과 수수적(授受的)인 관계의 위치를 취하고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로고스의 주체인 하나님이 이성성상으로 존재하므로 그의 대상인 로고스도 역시 이성성상이다. 만일 로고스가 이성성상으로 되어 있지 않다면 로고스로 창조된 피조물(요한복음 1:3)도 이성성상으로 되었을 수가 없다. 이러한 로고스의 이성성상이 하나님의 형상적인 실체대상으로 분립된 것이 아담과 해와였다. 아담이 창조이상을 완성한 남성, 즉 생명나무가 되고 해와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로 표시된 창조이상을 완성한 여성이 되어 인류의 참부모가 되었더라면 하나님의 3대 축복이 완성되어 지상천국이 이루어졌을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타락했기 때문에 반대로 지상지옥이 되고 말았다. 그렇기 때문에 타락한 인간을 다시 낳아 주기 위하여 예수님은 후 아담(고린도전서 15:45)으로서 생명나무의 사명을 가지고(요한계시록 22:14) 인류의 참아버지로 왔던 것이다. 그렇다면 후 해와의 사명을 가진 인류의 참어머니(요한계시록 22:17)가 마땅히 있어야 한다. 이와 같이 타락한 인간을 다시 낳아 줄 참어머니로 온 분이 성신이다. 예수님과 성신에 의한 영적 중생 부모의 사랑이 없으면 새 생명이 태어날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가 고린도전서 12장 3절에 기록된 말씀과 같이 성신의 감동에 의하여 예수님을 구주(救主)로 믿게 되면 영적 참아버지인 예수님과 영적 참어머니인 성신의 수수작용에 의하여 나타나는 영적 참부모의 사랑을 받게 된다. 그러면 여기에서 그를 믿는 성도들은 그 사랑으로 인해 새 생명이 주입되어 새로운 영적 자아로 중생하게 된다. 이것을 영적 중생이라고 한다. 그런데 인간은 영육 모두 타락했기 때문에 여기에서 더 나아가 육적 중생을 함으로써 원죄를 청산해야 한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인간의 육적 중생에 의한 육적 구원을 위하여 필연적으로 재림해야 한다.
-
원리강론 창조원리
원리강론 창조원리 原理講論 創造原理 / Principle of creation 항목체계 사상교리 [정의] 『원리강론』 전편 제1장의 내용으로서 하나님이 인간과 피조세계를 창조하기 위해 세운 원리에 대한 설명. [내용] 하나님의 이성성상과 피조세계 무형으로 계시는 하나님의 신성(神性)은 피조세계를 관찰함으로써 알 수 있다. 존재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 자체뿐만 아니라 다른 존재들과의 사이에서 양성과 음성의 이성성상이 상대적 관계를 맺음으로써 존재한다. 하나님의 양성을 남성, 음성을 여성이라고 한다. 또한 존재하는 것은 성상과 형상의 이성성상으로 존재한다. 성상과 형상은 서로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 원인적인 것과 결과적인 것, 주체적인 것과 대상적인 것, 종적인 것과 횡적인 것의 상대적인 관계를 갖는다. 인간의 마음과 몸은 성상과 형상에 해당하는 것으로서 몸은 마음을 닮았을 뿐만 아니라 마음이 명하는 대로 동(動)하고 정(靜)하므로 인간은 그 목적을 지향하여 생(生)을 유지한다. 어떠한 피조물에도 차원은 서로 다르나 무형의 성상, 즉 인간에 있어서의 마음과 같은 무형의 내적인 성상이 있어서 그것이 원인 또는 주체가 되어 인간에 있어서의 몸과 같은 그의 형상적인 부분을 움직여 그 개성체(個性體)로 하여금 어떠한 목적을 가진 피조물로서 존재하게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본성상과 본형상의 이성성상의 중화적 주체인 동시에 남성과 여성의 이성성상의 중화적 주체로 계시며, 피조세계에 대하여는 성상적인 남성격 주체이다. 피조물은 모두 무형의 주체로 계시는 하나님의 이성성상을 닮아 실체로 분립된 하나님의 실체 대상이다. 이러한 실체대상을 개성진리체라고 한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적인 실체대상이기 때문에 형상적 개성진리체라고 하고, 인간 이외의 피조물들은 상징적인 실체대상이기 때문에 상징적 개성진리체라고 한다. 만유원력과 수수작용 및 사위기대 하나님은 모든 존재의 창조주로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영원히 자존(自存)하는 절대자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존재하기 위한 근본적인 힘도 영원히 자존하는 절대적인 것이며, 동시에 이것은 또 피조물이 존재하기 위한 모든 힘을 발생케 하는 힘의 근본이다. 이러한 힘의 근본 된 힘을 우리는 만유원력(萬有原力)이라고 한다. 모든 존재를 이루고 있는 주체와 대상이 만유원력에 의해 상대기준을 조성하여 잘 주고 잘 받으면 그 존재를 위한 모든 힘, 즉 생존과 번식 그리고 작용 등을 위한 힘을 발생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힘을 발생케 하는 작용을 수수작용이라고 한다. 만유원력으로 인하여 하나님 속의 이성성상이 상대기준을 조성하여 수수작용을 하게 되면, 그 수수작용의 힘은 번식작용을 일으키어 하나님을 중심하고 이성성상의 실체대상으로 분립된다. 이와 같이 분립된 주체와 대상이 다시 만유원력에 의하여 상대기준을 조성함으로써 수수작용을 하면 다시 합성일체화(合性一體化)하여 하나님의 또 하나의 대상이 된다. 이와 같이 하나님을 정(正)으로 하여 분립되었다가 다시 합성일체화하는 작용을 정분합작용(正分合作用)이라고 한다. 정분합작용에 의하여 정(正)을 중심하고 2성(二性)의 실체대상으로 분립된 주체와 대상 그리고 그의 합성체(合性體)가 제각기 주체의 입장을 취할 때에는 각각 나머지 다른 것들을 대상으로 세워 삼대상기준(三對象基準)을 조성한다. 그리고 그것들이 서로 수수작용을 하게 되면 그 주체들을 중심으로 삼대상목적을 완성한다. 이와 같이 정분합작용에 의하여 정을 중심하고 2성의 실체대상으로 분립된 주체와 대상 그리고 합성체가 삼대상목적을 완성하면 사위기대를 조성하게 된다. 정분합작용에 의하여 삼대상목적을 이루어 사위기대를 완성한 존재는 무엇이든지 원형 또는 구형 운동을 하여 입체로 존재한다. 창조목적 하나님은 만물세계를 창조한 후 마지막으로 자신의 성상과 형상대로 희로애락의 감성을 가진 인간을 창조하여 그를 보고 즐기려고 하였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아담과 해와를 창조하고 ‘생육하고 번식하여 만물세계를 주관하라.’(창세기 1:28)고 한 3대 축복의 말씀에 따라서 인간이 하나님의 나라, 즉 천국을 이루고 기뻐할 때 하나님도 그것을 보고 가장 기뻐한다. 하나님의 제1축복은 개성을 완성하는 것이다. 인간이 개성을 완성하려면, 하나님 이성성상의 대상으로 분립된 마음과 몸이 수수작용을 하여 합성일체화함으로써 그 자체에서 하나님을 중심한 개체적인 사위기대를 이루어야 한다. 하나님의 제2축복을 이루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이성성상이 각각 개성을 완성한 실체대상으로 분립된 아담과 해와가 부부가 되어 합성일체화함으로써 자녀를 번식하여 하나님을 중심한 가정적인 사위기대를 이루어야 한다. 하나님의 제3축복은 하나님의 형상적 실체대상인 인간과 상징적 실체대상인 피조세계가 사랑과 미를 주고받아 합성일체화함으로써 하나님을 중심한 주관적인 4위의 기대를 이루어야 한다. 창조본연의 가치 어떤 대상이 창조본연의 가치를 가지기 위해서는 그것이 인간 주체와 수수작용에 의하여 합성일체화함으로써 하나님의 제3대상이 되어 창조본연의 사위기대를 이루어야 한다. 창조본연의 가치는 어떤 대상과 인간 주체가 하나님을 중심하고 창조본연의 사위기대를 이룰 때 결정되는데, 이 사위기대의 중심이 절대자 하나님이므로 이 가치의 기준도 절대자 하나님이다. 그러므로 절대자 하나님을 대하여 상대적으로 결정되는 어떤 대상의 창조본연의 가치도 절대적이다. 하나님으로부터 분립된 2성(二性)의 실체가 상대기준을 조성하여 수수작용을 함으로써 사위기대를 이루려 할 때, 그들이 하나님의 제3대상으로 합성일체화하기 위하여 주체가 대상에게 주는 정적(情的)인 힘을 사랑이라 하고, 대상이 주체에게 돌리는 정적인 힘을 미(美)라고 한다. 그러므로 사랑의 힘은 동적(動的)이요, 미의 자극은 정적(靜的)이다. 주체와 대상이 사랑과 미를 잘 주고 잘 받아 합성일체화함으로써 하나님의 제3대상이 되어 사위기대를 조성하여 하나님의 창조목적을 성취하는 행위나 그 행위의 결과를 선(善)이라 하고, 사탄을 중심하고 사위기대를 조성함으로써 하나님의 창조목적에 배치되는 행위나 그 행위의 결과를 악(惡)이라고 한다. 선의 목적을 이루어 나아가는 과정에서 그 선을 위한 생활적인 요소를 의(義)라고 하며, 악(사탄)의 목적을 이루어 나아가는 과정에서 그 악을 위한 생활적인 요소를 불의(不義)라고 한다. 피조세계의 창조과정과 그의 성장 기간 우주는 시간성을 떠나서 돌연히 생성된 것이 아니라 그것이 생성될 때까지 상당한 시간이 소요되었다. 천지창조를 완료하기까지의 6일이란 일출(日出) 일몰(日沒)의 횟수로 계산되는 6일이 아니라 창조과정의 여섯 단계의 기간을 표시한 것이다. 피조세계에서 일어나는 모든 현상은 반드시 어느 만큼의 시간이 경과한 후에야 그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이것은 피조물이 창조될 때 일정한 성장 기간을 거쳐서 완성되도록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모든 피조물이 완성됨에 있어서도 소생기, 장성기, 완성기의 질서적 3단계의 성장 기간을 거쳐서 완성된다. 인간시조는 성장 기간의 장성기 완성급에서 타락하였다. 피조물이 성장기에 있을 때에는 원리 자체의 주관성(主管性) 또는 자율성(自律性)에 의하여 성장하게 되어 있다. 따라서 하나님은 원리의 주관자로 있으면서 피조물이 원리에 의하여 성장하는 결과만을 보아서 간접적인 주관을 하므로 이 기간을 하나님의 간접주관권 또는 원리결과주관권이라고 한다. 만물은 원리자체의 주관성 또는 자율성에 의하여 성장 기간(간접주관권)을 경과함으로써 완성한다. 그러나 인간은 원리자체의 주관성이나 자율성뿐만 아니라 자신의 책임분담을 다하면서 이 기간을 경과하여 완성하도록 창조되었다. 인간의 완성 여부는 하나님의 창조의 능력에만 달려 있었던 것이 아니라 인간 자신의 책임수행(責任遂行) 여하에 따라서 결정된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그의 창조주로서의 책임분담에 대하여 인간이 자신의 책임분담을 다하면서 이 성장 기간(간접주관권)을 다 경과함으로써 완성되도록 창조하였기 때문에 그 책임분담에 대하여는 간섭할 수 없다. 이와 같이 하나님이 인간을 자신의 책임분담을 완수하여서만 완성되도록 창조한 것은 인간이 하나님도 간섭할 수 없는 그의 책임분담을 완수함으로써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창조성(創造性)까지도 닮게 하여 하나님의 창조의 위업에 가담케 함으로써 창조주 하나님이 인간을 주관하듯이 인간도 창조주의 입장에서 만물을 주관할 수 있는 주인의 권한을 가지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하나님을 중심하고 어떠한 주체와 대상이 합성일체화하여 사위기대를 조성함으로써 하나님과 심정의 일체를 이루어 주체의 뜻대로 사랑과 미(美)를 완전히 주고받아 선(善)의 목적을 이루는 것을 직접 주관이라고 한다. 따라서 직접관권은 곧 완성권을 의미한다. 인간을 중심한 무형 실체세계와 유형 실체세계 피조세계는 하나님의 이성성상을 닮은 인간을 본으로 하여 창조되었기 때문에 모든 존재는 마음과 몸으로 된 인간의 기본형을 닮지 않은 것이 없다. 그러므로 피조세계에는 인간의 몸과 같은 유형 실체세계와 그의 주체로서의 인간의 마음과 같은 무형 실체세계가 있다. 이것을 무형 실체세계라고 하는 것은 우리의 생리적인 오관으로는 그것을 감각할 수 없고 영적 오관으로만 감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영적인 체험에 의하면, 이 무형 세계는 영적인 오관에 의하여 유형 세계와 꼭 같이 실감할 수 있는 실재세계이다. 이 유형, 무형의 두 실체세계를 합친 것을 우리는 천주(天宙)라고 부른다. 피조세계에서 인간은 첫째로 피조세계의 주관자이고, 둘째로 피조세계의 매개체요 또한 화동의 중심체이며 셋째로 천주(天宙)를 총합한 실체상으로 창조되었다. 인간의 육신은 육심과 육체의 이성성상으로 되어 있다. 육신이 원만히 성장하려면, 양성의 영양소인 무형의 공기와 광선을 흡수하고 음성의 영양소인 유형의 물질을 만물로부터 섭취하여 이것들이 혈액을 중심하고 완전한 수수작용을 해야 한다. 육신으로부터 영인체에 주어지는 요소를 우리는 생력요소라고 한다. 인간의 영인체는 인간의 육신의 주체로 창조된 것으로서 영감으로만 감득되며 하나님과 직접 통할 수 있고, 또 천사나 무형 세계를 주관할 수 있는 무형실체로서의 실존체이다. 영인체는 그의 육신과 동일한 모습으로 되어 있으며 육신을 벗은 후에는 무형 세계(영계)에 가서 영원히 생존한다. 인간이 영존(永存)하기를 염원하는 것은 그 자체 내에 이와 같이 영존성을 지닌 영인체가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영인체는 생심(生心, 주체)과 영체(靈體, 대상)의 이성성상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생심은 하나님이 임재하는 영인체의 중심부분이다. 영인체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생소(生素, 양성)와 육신으로부터 오는 생력요소(生力要素, 음성)의 두 요소가 수수작용을 하는 가운데 성장한다. 그리고 영인체는 육신으로부터 생력요소를 받는 반면에 육신에게 생령요소(生靈要素)를 돌려보낸다. 생심(生心)과 육심(肉心)이 하나님을 중심하고 수수작용을 하여 합성일체화하면 그것이 영인체와 육신을 합성일체화시켜 창조목적을 지향하게 하는 하나의 작용체를 이루는데, 이것이 곧 인간의 마음이다. 인간은 타락해 하나님을 모르게 됨에 따라 선의 절대적인 기준도 알지 못하게 되었으나, 위와 같이 창조된 본성에 의하여 인간의 마음은 항상 자기가 선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지향한다, 이것을 양심(良心)이라고 한다. 그런데 타락한 인간은 선(善)의 절대적인 기준을 알지 못하여 양심의 절대적인 기준도 세울 수 없기 때문에 선의 기준을 다르게 함에 따라 양심의 기준도 달라져 양심을 주장하는 사람들 사이에도 투쟁이 일어나게 된다. 선을 지향하는 마음의 성상적인 부분을 본심(本心)이라 하고 형상적인 부분을 양심이라고 한다. 인간이 무지에 의하여 창조본연의 것과 기준을 달리한 선을 세우게 될 때에도 양심은 그 선을 지향하지만, 본심은 이에 반발하여 양심을 본심이 지향하는 곳으로 돌이키도록 작용한다. 사탄의 방해를 당하고 있는 생심과 육심이 수수작용을 하여 합성일체화하면 인간으로 하여금 악을 지향하게 하는 또 하나의 작용체를 이룬다. 이것을 사심(邪心)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인간의 본심이나 양심은 이 사심에 반발하여 인간으로 하여금 사탄을 분립하고 하나님을 상대하게 함으로써 악을 물리치고 선을 지향하게 하도록 작용한다.
-
원리강론 총서
원리강론 총서 原理講論 總序 / Introduction of Divine Principle 항목체계 사상교리 [정의] 『원리강론』의 전체적 서론. [내용] 인간은 누구나 불행을 물리치고 행복을 찾아 이루려고 몸부림치고 있다. 개인의 사소한 일로부터 역사를 좌우하는 큰일에 이르기까지 그것들은 결국 하나같이 보다 행복해지려는 삶의 표현인 것이다. 그러면 행복은 어떻게 오는 것인가? 인간은 누구나 자기의 욕망이 이루어질 때 행복을 느끼게 된다. 그런데 욕망이라고 하면, 우리는 흔히 그 본의(本意)를 흐려서 생각하기 쉽다. 그것은 욕망이 선(善)보다도 악(惡)으로 나아가기 쉬운 생활환경 가운데 우리가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불의(不意)를 맺는 욕망은 어디까지나 인간의 본심(本心)에서 나오는 것은 아니다. 인간의 본심은 이러한 욕망이 자신을 불행으로 이끌어간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악을 지향하는 욕망을 물리치고 선을 추구하는 욕망을 따라 본심이 기뻐하는 행복을 찾으려고 필사적인 노력을 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사망의 어두움을 헤치고 생명의 빛을 찾아 고달픈 길을 더듬고 있는 인생이다. 불의의 욕망을 따라가서 본심이 기뻐하는 행복을 누려 본 사람이 어디에 있었던가? 인간은 누구나 그러한 욕망을 채울 때마다 양심의 가책을 받아 고민하게 된다. 자식에게 악을 가르치는 부모가 어디 있으며, 제자에게 옳지 못한 것을 가르쳐 주는 스승이 어디 있을 것인가? 악을 미워하고 선을 세우고자 하는 것은 누구나 다 가지고 있는 본심의 발로이다. 특히 이러한 본심(本心)이 지향하는 욕망을 따라 선을 이루려고 몸부림을 치는 것이 바로 도인(道人)들의 생활이지만, 유사 이래 본심대로만 살다 간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이다. 여기에서 선한 욕망을 성취하려는 본심의 지향성과 이것과는 반대로 악의 욕망을 달성하려는 사심(邪心)의 지향성이 동일한 개체 속에서 각기 서로 다른 목적을 앞세우고 치열한 싸움을 하고 있는 인간의 모순성(矛盾性)을 발견하게 된다. 존재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 자체 안에 모순성을 갖게 될 때에는 파멸된다. 따라서 이와 같이 모순성을 가지게 된 인간 자체는 파멸상태에 놓여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인간의 모순성은 당초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었을 리는 만무하다. 왜냐하면 어떠한 존재도 모순성을 내포하고 생성(生成)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생겨나기 전부터 이러한 모순성을 지닌 운명적인 존재였다면 애당초 생겨날 수도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인간이 가지고 있는 그러한 모순성은 후천적인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인간의 이러한 파멸상태를 타락(墮落)이라고 한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우리는 인간이 타락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며, 누구도 이것을 반박할 여지가 없을 것이다. 인간은 이와 같이 타락해 자기 파멸에 이르고 있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악한 마음으로부터 오는 악의 욕망을 물리치고 본심으로부터 일어나는 선의 욕망을 따라 하나의 목적을 지향하는 것으로써 그 자체의 모순성을 제거하려고 필사적인 노력을 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궁극(窮極)에 있어서 선과 악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를 풀지 못하고 있다. 우리가 악의 욕망을 물리치고 선의 욕망을 따라 본심이 지향하는 선의 생활을 하기 위하여는 무지(無知)를 완전히 극복함으로써 선악(善惡)을 판별할 수 있어야 한다. 인간의 타락을 지적인 면에서 본다면, 그것은 바로 인간이 무지에 떨어진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인간은 마음과 몸의 내외(內外) 양면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지적인 면에 있어서도 내외 양면의 지(知)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무지에도 내적인 무지와 외적인 무지의 두 가지가 있게 된다. 내적인 무지란 종교적으로 말하자면 영적인 무지를 말하는 것으로서 인간은 어디로부터 왔으며, 생(生)의 목적은 무엇이며, 사후(死後)에는 어떻게 되는가? 그리고 내세(來世)와 하나님에 대한 존재 여부, 또 위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선과 악은 무엇인가 하는 문제 등에 대한 무지인 것이다. 그리고 외적인 무지란 인간의 육신을 비롯한 자연계에 대한 무지를 말하는 것으로서 모든 물질세계의 근본은 무엇이며, 그 모든 현상은 각각 어떠한 법칙에 따라 일어나는가 하는 것 등에 대한 무지인 것이다. 인간은 유사이래(有史以來) 오늘에 이르기까지 쉬지 않고 무지(無知)에서 지(知)에 도달하기 위하여 진리를 찾아 나왔다. 그리하여 내적인 무지에서 내적인 지에 도달하기 위하여 내적인 진리를 찾아 나온 것이 종교(宗敎)요, 외적인 무지에서 외적인 지에 도달하기 위하여 외적인 진리를 찾아 나온 것이 과학(科學)이다. 이와 같이 알고 보면, 종교와 과학은 인생의 양면의 무지로부터 양면의 지에 도달하기 위하여 양면의 진리를 찾아 나온 방편임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인간이 무지로부터 완전히 해방되어 본심의 욕망이 지향하는 선한 방향으로만 나아가 영원한 행복을 누리기 위해서는 종교와 과학이 통일된 하나의 과제로서 해결되어 내외 양면의 진리가 상통하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인생의 실제에 있어서 인간이 밟아 온 과정을 두 가지로 대별(大別)하여 본다면, 첫째는 물질로 된 이 결과의 세계에서 인생의 근본문제를 해결하려는 길이다. 이러한 길을 지상(至上)으로 생각하고 걸어온 사람들은 극도로 발달된 과학 앞에 굴복하여 과학의 만능과 물질적인 행복을 자랑하고 있다. 그러나 인간은 과연 이러한 육신을 중심한 외적인 조건만으로 완전한 행복을 누릴 수 있을 것인가? 과학의 발달이 아무리 안락한 사회 환경을 이루고 그 속에서 아무리 부귀와 영화를 누린다 한들 그것으로써 어찌 속사람의 정신적인 욕구까지 근본적으로 만족시킬 수 있을 것인가? 사람에 있어서 마음이 있음으로써 온전한 사람이 되는 것과 같이 기쁨에 있어서도 마음의 기쁨이 있음으로써 비로소 몸의 기쁨도 온전한 것이 되는 것이다. 그러면 이제 과학의 갈 곳은 어디일 것인가? 지금까지의 과학의 연구대상은 내적인 원인의 세계가 아니고 외적인 결과의 세계였으며, 본질(本質)의 세계가 아니고 현상(現象)의 세계였다. 그러나 오늘에 이르러 그의 대상은 외적이며 또한 결과적인 현상의 세계에서 내적이며 또한 원인적인 본질의 세계에로 그 차원을 높이지 않을 수 없는 단계에 들어오고 있다. 그리하여 원인적인 심령세계(心靈世界)에 대한 논리, 즉 내적 진리가 없이는 결과적인 실체세계(實體世界)에 대한 과학, 즉 외적 진리도 궁극적인 목적을 달성할 수는 없다고 하는 결론을 얻기에 이르렀다. 이제 과학의 돛을 달고 외적인 진리의 항해를 마친 사공이 또 하나의 종교의 돛을 달고 내적인 진리의 항로에로 들어오게 될 때, 비로소 그는 본심이 지향하는 이상향(理想鄕)에로 항행(航行)할 수 있게 된다. 인간이 밟아 온 과정의 둘째는 결과적인 현상세계를 초월하여 원인적인 본질세계에서 인생의 근본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이다. 그런데 이 길을 밟아 온 이제까지의 철학이나 종교가 많은 공헌을 한 것이 사실이지만, 그 반면에 우리에게 너무나 많은 정신적인 짐을 지워주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리하여 역사상에 왔다 간 모든 철인들과 성현들은 인생의 갈 길을 열어 주려고 각각 그 시대에 있어서 선구적인 개척의 길로 나섰던 것이었으나, 그들이 해 놓은 일들은 모두 오늘의 우리에게 더 무거운 짐이 되고 말았다. 모든 종교가 어둠 속에서 헤매던 그 시대의 많은 심령(心靈)들에게 비쳐 주던 소생(蘇生)의 빛은 시대의 흐름과 더불어 어느덧 꺼져 버리고 이제는 타다 남은 희미한 불똥만이 그들의 잔해를 드러내고 있다. 그러면 내적인 진리를 찾아 나오던 종교인(宗敎人)들이 오늘에 이르러 본연의 사명을 다하지 못하게 된 원인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본질세계와 현상세계와의 관계는 비유컨대 마음과 몸과의 관계와 같아서 원인적인 것과 결과적인 것,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 그리고 주체적인 것과 대상적인 것의 관계를 가지고 있다. 마치 마음과 몸이 완전히 합해야만 완전한 인격을 이루는 것과 같이 본질과 현상의 두 세계가 완전히 합치되어야만 이상세계를 이룰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마치 마음과 몸이 그러하듯이 본질세계를 떠난 현상세계가 있을 수 없고, 현상세계를 떠난 본질세계도 있을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현실을 떠난 내세는 있을 수 없는 것이므로 진정한 육신의 행복이 없이 심령적(心靈的)인 기쁨도 있을 수 없다. 종교가 이와 같은 운명의 길을 가게 된 또 하나의 중요한 원인이 있다. 즉 과학의 발달에 따라 인간의 지성이 최고로 계발(啓發)된 나머지 현대인은 모든 사물에 대한 과학적인 인식을 필요로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구태의연한 종교의 교리에는 그런 과학적인 해명이 전적으로 결여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즉 위에서 이미 언급한 바 내적인 진리와 외적인 진리가 서로 일치된 해명을 가지지 못한 데 원인이 있는 것이다. 내적인 진리에도 논증적인 해명이 필요하게 되어 종교는 오랜 역사의 기간을 통하여 그 자체가 과학적으로 해명될 수 있는 시대를 추구해 나왔던 것이다. 이와 같이 종교와 과학은 인생의 양면의 무지를 타개하기 위한 사명을 각각 분담하고 출발하였기 때문에 그 과정에 있어서는 그것들이 상충하여 서로 타협할 수 없을 것 같은 양상을 보여 왔으며, 인간이 양면의 무지를 완전히 극복하여 본심이 요구하는 선(善)의 목적을 완전히 이루자면 어느 때든지 과학을 찾아 나온 종교와 종교를 찾아 나온 과학을 통일된 하나의 과제로서 해결해 주는 새 진리가 나와야 하는 것이다. 새 진리가 나와야 한다는 주장은 종교인들, 특히 기독교 신도들에게는 못마땅하게 생각될는지도 모른다. 왜냐 하면 그들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경서가 이미 그것만으로 완전무결하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진리는 유일하고 영원불변하며 절대적이다. 그러나 경서란 진리 자체가 아니고 진리를 가르쳐 주는 하나의 교과서로서 시대의 흐름과 더불어 점차로 심령과 지능의 정도가 높아져 온 각 시대의 인간들에게 주어진 것이기 때문에 진리를 가르쳐 주는 범위나 그것을 표현하는 정도와 방법에 있어서는 시대를 따라서 달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성격을 띠고 있는 교과서마저 절대시해서는 안 된다. 인간이 본심의 지향성에 의하여 하나님을 찾아 선의 목적을 이루는 데 필요한 방편으로 나오게 된 것이 종교이기 때문에 모든 종교의 목적은 동일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명분야와 그를 대하는 민족에 따라서, 또 시대의 흐름에 따라서 위와 같은 이유로 경서를 서로 달리하게 되는 데서 필연적으로 각양각이(各樣各異)의 종교가 나오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경서란 진리의 빛을 밝혀 주는 등잔과 같아서 주위를 밝힌다는 사명은 같지만, 보다 밝은 등불이 나올 때에는 그것으로써 낡은 등잔의 사명은 끝나는 것이다. 그러면 새 진리는 어떠한 사명을 다해야 할 것인가? 이 진리는 위에서 이미 논술한 바 종교가 찾아 나온 내적인 진리와 과학이 찾아 나온 외적인 진리를 통일된 하나의 과제로서 해결해 줄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모든 인간들을 내 외 양면의 무지에서 내 외 양면의 지에 완전히 도달할 수 있게 하여야 한다. 그리하여 타락한 인간으로 하여금 사심(邪心)이 지향하는 악의 길을 막고 본심이 추구하는 바를 따라 선의 목적을 이루게 함으로써 선악(善惡) 양면의 지향성을 가지고 있는 인간의 모순성과 위에서 이미 논한 바 종교인들이 당면하고 있는 도(道)의 생활의 모순성을 극복하게 할 수 있어야 한다. 인간이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떠나서는 살 수 없도록 지어졌다면, 하나님에 대한 무지야말로 우리 인생을 얼마나 비참한 길로 몰아내고 있는 것인가? 새 진리는 하나님의 실재성에 관하여서는 말할 것도 없고 하나님의 창조의 심정을 비롯하여 하나님의 자신을 반역하는 타락한 인간을 버리지 못하고 유구한 역사의 기간을 두고 구원하려고 애써 온 애달픈 심정을 우리에게 알려 줄 수 있어야 한다. 선과 악의 두 면을 지향하는 인간들의 상충적인 생활로써 형성되어 온 인류 역사는 거의 싸움으로 엮어져 내려왔다. 우리 앞에는 피할 수 없는 마지막 싸움이 하나 남아 있으니 그릇이 바로 민주주의와 공산주의의 내적인 이념 싸움이다. 그들은 서로 무서운 무기를 마련하고 외적인 싸움을 겨루고 있으나, 실은 내적인 이념의 싸움의 판가리를 하기 위함인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섭리가 완전히 이루어지려면 바로 이 새 진리가 지금까지 민주주의 세계에서 주창해 온 유심론을 새로운 차원으로 승화시켜 유물론을 흡수함으로써 온 인류를 새 세계로 옮겨 놓을 수 있어야 한다. 이와 같이 이 진리는 역사 이래의 모든 주의나 사상은 물론 모든 종교까지도 하나의 길로 완전히 통일시킬 수 있어야 한다. 그러면 온 인류가 하나의 진리에 의하여 하나의 형제로서 하나의 목적지에서 만나게 된다면, 거기에서 이룩되는 세계는 어떠한 세계일 것인가? 이 세계는 유구한 역사의 흐름을 따라 인생의 양면의 무지에서 헤어나려고 몸부림쳐 온 인간들이 그 암흑으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진리의 빛 가운데서 함께 만나 하나의 대가족을 이룬 세계이다. 그런데 진리의 목적이 선을 찾아 이루려는 데 있고, 선의 본체가 바로 하나님이므로 그 진리에 의하여 도달된 세계는 바로 하나님을 부모로 모시고 서로 형제애(兄弟愛)에 얽혀 사는 세계인 것이다. 타락한 인간이 오랜 역사의 기간을 두고 찾아 나온 이 세계야말로 바로 천국인 것이다. 그리고 이 천국은 지상의 현실세계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므로 지상천국이 되는 것이다. 인류 역사는 하나님의 창조목적을 완성한 세계를 복귀하여 나아가는 섭리역사라는 사실을 알았다. 따라서 새 진리는 타락한 인간을 창조 본연의 인간으로 돌아가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이 인간을 비롯한 피조세계를 창조한 목적이 무엇이었던가 하는 것을 가르쳐 줌으로써 복귀과정에 있는 타락한 인간의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인가를 알게 해야 된다. 그리고 인간은 과연 성서가 말하는 문자 그대로 선악과라는 과실을 따먹고 타락했는가? 그렇지 않다면 타락한 원인은 어디에 있는가? 또 완전완미(完全完美)한 하나님이 어찌하여 타락할 가능성이 있는 인간을 창조하였고, 전지전능한 하나님이 그들이 타락하는 것을 알면서도 막을 수 없었던 이유는 어디에 있었으며, 더 나아가서 하나님은 왜 창조의 권능을 가지고 일시에 죄악인간을 구원하지 못하는가 하는 것 등 실로 오랜 역사의 기간을 두고 깊이 생각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괴롭혀 온 모든 문제들을 완전히 풀어 줄 수 있어야 한다. 우리가 피조세계에 비장(秘藏)되어 있는 과학성을 살펴볼 때, 그것을 창조한 하나님이야말로 과학의 근본이기도 한 분이라는 것을 미루어 알 수 있다. 그런데 인류 역사가 하나님의 창조목적을 완성한 세계를 복귀하여 나아가는 섭리의 역사임이 사실일진데, 그와 같이 모든 법도의 주인인 하나님이 이처럼 오랜 복귀섭리의 기간을 두고 아무 계획도 없이 무질서하게 이 역사를 섭리해 나왔을 리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류의 죄악역사가 어떻게 출발하여 어떠한 공식적인 섭리의 과정을 거쳐서 어떠한 모양으로 종결되어 어떠한 세계로 들어갈 것인가를 아는 것은 우리에게 긴절(緊切)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그러므로 새 진리는 이러한 근본문제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명백하게 풀어 줄 수 있어야 한다. 또 새 진리는 오늘날 문화권 형성의 세계적인 사명을 띠고 있는 기독교의 많은 난해한 문제들을 명백히 풀어 줄 수 있어야 한다. 새 진리는 하나님과 예수님과 인간과의 창조원리적인 관계를 밝혀 주어야 한다. 뿐만 아니라 이에 못지않게 어려운 문제로 되어 있는 삼위일체에 대해서도 근본적인 해명이 없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인류에 대한 구원은 어찌하여 독생자로 하여금 십자가에 달려 피를 흘리게 하여야만 가능하였던가 하는 것도 응당 풀고 넘어가야 할 문제인 것이다. 더 나아가서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으로 인하여 분명히 구속함을 받았다고 믿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역사 이래 어느 한 사람도 구주의 속죄가 필요 없이 천국에 갈 수 있는 죄 없는 자녀를 낳아 보지 못하였다는 사실은 그들이 중생한 후에도 여전히 원죄를 자녀들에게 유전하고 있다는 것을 증거하는 것이 아닐 것인가? 이러한 실증적인 사실로 보아 십자가 대속의 한계는 과연 어디까지인가 하는 것이 커다란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 진리는 예수님이 왜 재림하여야 하며, 또 그의 재림은 언제 어디로 어떻게 이루어질 것인가 하는 것과 그때에 타락한 인간의 부활은 어떻게 이루어질 것이며, 천변지이(天變地異)가 일어나서 하늘땅이 불에 소멸되어 없어질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는 말씀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하는 것 등 상징과 비유로 기록되어 있는 성서의 많은 어려운 문제들을 이미 예수님 자신이 직접 말씀한 바와 같이 비사가 아니고 누구나 알 수 있도록 밝히 가르쳐 줄 수 있어야 한다. 이와 같이 인간을 생명의 길로 인도하는 최종적인 진리는 어떠한 경서나 문헌에 의한 종합적인 연구의 결과로나, 혹은 어떠한 인간의 두뇌에서 나올 수는 없는 것이다. 이 진리는 하나님의 계시로서 우리에게 나타나지 않으면 안 된다.
-
원리강론 타락론
원리강론 타락론 原理講論 墮落論 / Human fall 항목체계 사상교리 [정의] 타락에 대한 내용을 설명한 『원리강론』 전편 제2장. [내용] 죄의 뿌리 역사 이래로 인간 속에 깊이 뿌리를 박고 쉼 없이 인간을 죄악의 길로 몰아내고 있는 죄의 뿌리가 무엇인가 하는 것을 안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다만 기독교인들은 성경을 근거로 아담과 해와가 선악과를 따먹은 것이 죄의 뿌리가 됐다고 믿고 있다. 그러나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은 선악과는 어떠한 물질이 아니고 생명에 대한 애착까지도 문제되지 않을 만큼 강력한 자극을 주는 다른 무엇이라고 본다. 즉 선악과는 무엇을 비유한 것이다. 그렇다면 죄의 뿌리로 간주되는 선악과는 과연 무엇을 비유한 것인가? 이를 알기 위해서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뱀의 정체에 대해 살펴보아야 한다. 성서의 말씀에 의하면, 타락한 인간의 소망은 생명나무 앞으로 나아가 생명나무를 이루는 것이다. 생명나무는 창조이상을 완성한 남성이다. 구약시대의 성도들이 고대하였던 생명나무는 바로 초림 예수님을 의미한다. 요한계시록 22장 14절에 기록되어 있는 생명나무는 재림 예수님을 의미한다. 마찬가지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창조이상을 완성한 여성을 상징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완성한 해와를 비유한 것이다. 성서를 보면, 해와를 유혹하여 범죄하게 한 것이 뱀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렇다면 이 뱀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나님이 창조한 영적인 존재로서 인간과 담화(談話)를 할 수 있었고,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었으며, 그 소재(所在)가 하늘이었다. 또 그것이 만일 타락해 악한 존재로 전락하게 되는 경우에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인간의 심령(心靈)을 지배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질 수 있는 조건을 구비한 존재였는데, 그런 존재는 천사밖에 없었다. 따라서 뱀은 천사를 비유한 것이다. 유다서 1장 6절에서 7절에 “또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 처소를 떠난 천사들을 큰 날의 심판까지 영원한 결박으로 흑암에 가두셨으며 소돔과 고모라와 그 이웃 도시들도 저희와 같은 모양으로 간음을 행하며 다른 색을 따라가다가 영원한 불의 형벌을 받음으로 거울이 되었느니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우리는 천사가 간음(姦淫)으로 타락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간음은 혼자서 행할 수 없는 범행이다. 그러므로 천사의 간음에 있어 그 대상이 되었던 존재가 누구인지에 대해 살펴보아야 한다. 이를 위해 먼저 인간이 어떠한 죄를 저질렀는지에 대해 알아보자. 창세기 2장 25절을 보면, 범죄하기 전 아담과 해와는 몸을 가리지 않은 채로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타락 후 벗은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여 무화과나무 잎으로 하체를 가리었다. 아담의 하체가 허물이 된 것은 아담이 하체로써 범죄하였기 때문이다. 인간들이 역사적으로 사랑의 행동을 천시하여 온 것은 그것이 바로 타락의 원인이 되었기 때문이다. 인간도 또한 음란으로 인해 타락했음을 알 수 있다. 인간이 천사의 유혹에 빠져 타락했다는 사실과 인간이나 천사는 모두 행음(行淫)으로 인해 타락했다는 사실, 피조세계에서 영적인 존재로서 서로 정적(情的)인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존재는 인간과 천사밖에 없었다는 사실 등을 결부하여 볼 때 인간과 천사 사이에 행음관계(行淫關係)가 성립되었으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천사와 인간 사이에 행음관계가 타락의 원인이었다. 이처럼 죄의 뿌리는 인간시조가 뱀으로 표시된 천사와 불륜(不倫)한 혈연관계를 맺은 것이다. 선악과는 해와의 사랑을 의미하며, 해와는 하나님을 중심한 사랑으로 선의 자녀를 번식해야 하였으나 사탄을 중심한 사랑으로 악의 자녀를 번식하고 말았다. 이처럼 죄의 뿌리가 혈연적인 관계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이 원죄(原罪)는 자자손손 유전되어 왔다. 타락의 동기와 경로 하나님은 피조세계의 창조와 그의 경륜을 위하여 먼저 천사를 사환(使喚)으로 창조하였다. 하나님은 인간을 자녀로 창조하고 피조세계에 대한 주관권을 부여하였기 때문에 인간은 천사도 주관하게 되어 있다. 본래 천사장 누시엘은 하나님의 사랑을 독점한 위치에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이 인간을 자녀로 창조한 후에는 종으로 창조된 누시엘보다 그들을 훨씬 더 사랑하였다. 사랑의 감소감을 느끼게 된 누시엘은 자기가 천사세계에서 가졌던 사랑의 위치와 동일한 것을 인간세계에 대하여서도 그대로 가져 보고자 해와를 유인하게 되었다. 그것이 영적타락(靈的墮落)의 동기였다. 사랑에 대한 과분한 욕망으로 인하여 자기의 위치를 떠난 누시엘과 하나님처럼 눈이 밝아지려고 때 아닌 때의 것을 바란 해와가 서로 상대기준(相對基準)을 조성하여 수수작용을 하게 됐는데, 그런 비원리적인 관계에 의해서 그들이 불륜한 영적인 정조관계(貞操關係)를 맺게 되었다. 해와가 미완성기에서 천사장과 불륜한 혈연관계를 맺은 후 다시 아담과 부부의 관계를 맺었기 때문에 아담도 역시 미완성기에서 타락했다. 이렇게 때 아닌 때에 사탄을 중심삼고 아담과 해와 사이에 이루어진 부부관계는 그대로 육적타락(肉的墮落)이 되었다. 해와는 천사장과의 영적인 타락에서 양심의 가책으로부터 온 공포심과 자기의 원리적인 상대가 천사장이 아니고 아담이라는 것을 깨닫는 새로운 지혜를 얻게 되었다. 여기에서 해와는 그제서나마 자기의 원리적 상대인 아담과 일체를 이룸으로써 하나님 앞에 다시 서고, 또 타락으로 인하여 오게 된 공포심을 면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아담을 유인하였다. 이것이 육적 타락의 동기였다. 사랑의 힘과 원리의 힘 및 믿음을 위한 계명 인간은 원리로써 창조되어 원리궤도(原理軌道)에 의하여 생존하도록 창조되었다. 원리의 힘보다도 더욱 강한 힘이 곧 사랑의 힘이다. 그러므로 미완성기에 있는 인간은 그 비원리적인 사랑의 힘으로 인하여 타락할 가능성이 있었다. 이에 하나님은 이들에게 따먹지 말라는 계명을 주었다. 즉 아직 미완성기에 있어 하나님의 직접적인 사랑의 주관을 받을 수 없는 아담과 해와가 만일 천사장의 상대적인 입장에 서게 되면 목적을 달리하는 비원리적인 사랑의 힘에 의하여 타락할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이들에게 따먹지 말라는 믿음을 위한 계명을 주었다. 그들이 하나님의 계명을 따라 천사를 상대하지 않고 하나님과만 상대기준을 조성하여 수수작용을 하였더라면 비원리적인 사랑의 힘이 작용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들은 결코 타락하지 않았을 것이다. 사랑을 중심하고 볼 때, 하나님의 제2축복 완성은 아담과 해와가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삼고 부부를 이루어 자녀를 번식함으로써 하나님의 사랑에 의한 직접적인 주관을 받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완성되면, 따먹는 것은 원리적인 것으로서 허용되도록 창조되어 있었다. 따먹지 말라는 하나님의 계명은 아담과 해와가 미완성기에 있을 때에 한해서만 필요했다. 인간 타락의 결과 누시엘과 인간조상이 혈연관계를 맺어 일체를 이루었기 때문에 사탄을 중심한 사위기대가 이루어지면서 후손은 사탄의 자녀가 되고 말았다.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혈통을 이어받지 못하고 사탄의 혈통을 이어받았다. 사탄은 항상 모든 인간을 하나님 앞에 참소하여 지옥으로 끌어가려 하고 있다. 사탄의 대상은 영계에 있는 악영인(惡靈人)들이다. 그리고 이 악영인들의 대상은 지상에 있는 악인들의 영인체이며, 지상에 있는 악인들 영인체의 활동 대상은 바로 그들의 육신 활동으로 나타난다. 선신(善神)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과 하나님 편에 있는 선영인(善靈人)들과 천사들을 총칭하는 말이고, 악신(惡神)이라고 하는 것은 사탄과 사탄 편에 있는 악영인(惡靈人)들을 총칭하는 말이다. 선과 악이 그러하듯이 선신의 역사(役事)와 악신의 역사도 동일한 모양으로 출발하여 그 목적을 달리하고 있는 것이다. 선신과 악신의 역사를 잘 분간하여 분립해야 한다. 죄라는 것은 사탄과 상대기준을 조성하여 수수작용을 할 수 있는 조건을 성립시킴으로써 천법(天法)을 위반하게 되는 것이다. 죄는 4가지로 구분된다. 첫째, 원죄(原罪)는 인간조상이 저지른 영적 타락과 육적 타락에 의한 혈통적인 죄이다. 원죄는 모든 죄의 뿌리이다. 둘째, 유전적(遺傳的) 죄는 혈통적인 인연으로 그 후손들이 물려받은 선조의 죄다. 셋째, 연대적(連帶的) 죄는 연대적으로 책임을 져야 하는 죄다. 넷째, 자범죄(自犯罪)는 자신(自身)이 직접 범한 죄다. 천사장이 하나님을 배반하고 해와와 혈연관계를 맺을 때 우발적으로 일어났던 모든 성품을 해와가 계승하였고, 해와와 혈연관계를 맺은 아담이 그 성품을 계승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 성품은 타락한 인간의 모든 타락성을 유발하는 근본적인 성품이 되었다. 이를 가리켜 타락성본성이라고 한다. 타락성본성에는 네 가지가 있다. 첫째, 하나님과 같은 입장을 취하지 못하는 것이다. 둘째, 자기의 위치를 떠나는 것이다. 셋째, 주관성(主管性)을 전도(顚倒)하는 것이다. 넷째, 범죄행위를 번식하는 것이다. 자유와 타락 자유에 의한 원리적인 성격을 논할 때, 첫째로 원리를 벗어난 자유가 없다는 것이다. 둘째, 책임 없는 자유는 없다. 셋째, 실적 없는 자유는 없다. 그러므로 인간이 자유로 인하여 타락할 수는 없다. 인간의 타락은 어디까지나 본심의 자유가 지향하는 힘보다도 더 강한 비원리적인 사랑의 힘으로 인해 자유가 구속된 데 기인한다. 인간은 천사에 대해서도 자유로써 대하도록 창조되었기 때문에 해와가 누시엘과 상대기준을 조성함으로 수수작용을 하게 되었을 때 비원리적인 사랑의 힘으로 인해 타락했다. 반대로 타락한 인간도 자유로써 하나님의 상대적인 입장에 설 수 있기 때문에 진리의 말씀을 따라 하나님과 상대기준을 조성하여 수수작용을 하게 되면 원리적인 사랑의 힘으로 말미암아 창조본성을 복귀할 수 있다. 하나님이 인간조상의 타락행위를 간섭하시지 않은 이유 하나님은 창조원리의 절대성과 완전무결성을 위하여 미완성기에 있던 아담과 해와의 타락행위를 간섭할 수 없었다. 또한 하나님만이 창조주로 계시기 위하여 인간타락에 개입하지 않았다. 만일 하나님이 인간시조의 타락행위를 간섭했다면, 그 타락행위에도 창조의 가치가 부여되어 사탄도 창조주의 입장에 설 수 있었다. 또한 하나님은 인간을 만물의 주관위(主管位)에 세우기 위하여 간접주관권에 있었던 인간시조의 타락행위를 간섭할 수 없었다.
-
원리강론 통일왕국시대와 기독왕국시대
원리강론 통일왕국시대와 기독왕국시대 原理講論 統一王國時代와 基督王國時代 항목체계 사상교리 [정의] 『원리강론』 후편 제4장 제3절의 내용으로서 형상적 동시성시대인 통일왕국시대와 실체적 동시성시대인 기독왕국시대에 관한 원리적 설명. [내용] 『원리강론』은 후편 제4장 제3절에서 형상적 동시성시대인 통일왕국시대와 실체적 동시성시대인 기독왕국시대에 관한 원리적 설명을 전개하고 있다. 이스라엘 민족이 사울 왕을 중심으로 첫 왕국을 세운 후 다윗 왕을 거쳐 솔로몬 왕에 이르기까지의 120년 기간을 통일왕국시대라고 한다. 이스라엘 민족의 왕인 사울, 다윗, 솔로몬은 모세의 성전 이상을 중심으로 이스라엘 왕국을 이루었는데, 이는 장차 예수님이 실체성전으로 오셔서 만왕의 왕이 되어 하나님의 왕국을 건설할 것을 보여 준 형상노정이었다. 그러나 사울 왕과 다윗 왕이 불신으로 흐르고 솔로몬 왕마저 우상을 섬김으로써 이들을 중심한 메시아를 위한 기대는 결국 실패로 끝나게 된다. 이 시대를 실체적 동시성으로 탕감복귀하는 시대가 기독왕국시대이다. 카알 대제가 즉위한 후로부터 그의 왕통이 끊어지고 선거왕제가 되어 919년 헨리 1세가 독일 왕위에 오를 때까지 120년 기간이 기독왕국시대에 해당된다. 통일왕국시대에 이스라엘의 왕들이 성전 이상을 중심으로 하나님의 왕국을 이루어야 했던 것처럼 이 시대를 탕감하는 기독왕국시대 또한 교황을 중심하고 이루어 나왔던 국토 없는 영적 왕국과 국왕을 중심한 실체적인 왕국이 기독 이상을 토대로 하나 되어 메시아를 맞이할 수 있는 기반을 조성해야 하였다. 하지만 거듭된 불신으로 교황과 국왕이 하나님의 뜻을 받들지 못하게 됨으로써 재림 메시아를 위한 기대는 조성되지 못하였고, 결국 복귀섭리는 연장되고 말았다.
가정연합 대사전은 천일국학술원에서 제공합니다.
이 사전은 2019년까지의 내용을 수록하였고 섭리의 변화에 따라 항목을 추가할 예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