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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나무
사랑나무 Tree of love 항목체계 성지 소재지 경기도 가평군 HJ천주청평수련원 [정의] HJ천주천보수련원의 천성왕림궁전(본관)과 정심원(기도관) 사이에 있는 큰 버드나무. [내용] HJ천주천보수련원 천성왕림궁전(본관)과 정심원(기도관) 사이에 있는 큰 버드나무이다. HJ천주천보수련원은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의 수련소이자 성지로서 이 안에는 인간조상 아담과 해와의 타락으로 잃어버린 중요한 요소들을 다시 찾아 세운다는 의미를 지닌 다섯 나무가 있다. 참사랑을 찾아 세우는 사랑나무(버드나무), 하나님의 심정을 찾아 세우는 심정나무(뽕나무), 만물에 대한 주관성을 찾아 세우는 만물나무(밤나무), 하나님에 대한 충성심을 찾아 세우는 충성나무(소나무), 하나님의 축복을 찾아 세우는 축복나무(잣나무)가 그것들이다. 이 나무들은 참부모님의 특별한 정성과 승리의 기준 위에 찾아진 나무들이며, 신도들이 이 나무들에서 정성을 올리면 각 나무가 지닌 요소를 상속받을 수 있다. 이들 중 사랑나무는 그 이름처럼 버드나무의 편안함으로 보는 사람의 마음을 따뜻하게 감싸 준다. 사랑나무는 수련원 중심에 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오고 가면서 기도하고 정성을 들이는 곳이 되었다. ☞ HJ천주천보수련원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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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르트르
사르트르 Jean Paul Sartre 항목체계 사상교리 [정의] 프랑스의 실존주의 철학자 및 작가. [내용] 사르트르(1905-1980)는 프랑스 파리에서 태어났으며, 그의 실존주의 철학은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는 말로 대표된다. 도구는 만들어지기 전에 이미 그 제작자에 의해서 그 용도나 목적, 곧 본질이 결정된다. 따라서 본질이 존재에 선행한다. 마찬가지로 만일 신이 존재하고, 신의 뜻에 따라 인간이 만들어졌다고 한다면 인간에 있어서도 본질이 존재에 선행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신을 부정하는 사르트르에 있어서 인간의 본질은 처음부터 결정되어 있지 않다. 그는 인간을 우연적 존재로 보며 그 누구에 의해서도 규정되지 않는다고 이해했다. 따라서 인간은 스스로 자신의 존재방식을 계획하고 선택하게 된다. 이것이 그가 말하는 주체성의 의미이다. 그는 실존의 근본적 성격을 불안이라고 보았다. 자신 스스로 결정하고 책임져야 하기 때문에 불안에 휩싸이게 된다는 것이다. 인간은 무엇에 의해서도 결정되지 않으며 어떠한 일도 허용되어 있기 때문에 자유로운 존재가 된다. 자유롭다는 것은 자기의 행위에 대하여 일체의 책임이 자기에게 있음을 뜻하므로 인간에게 무거운 짐이라고 보고 있다. 인간은 자유롭기 때문에 불안한 것이기도 하다. 그는 종교를 통하여 불안에서 벗어나려는 것을 자기기만으로 간주하였다.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은 『통일사상요강』의 본성론에서 사르트르의 인간관을 소개하며, 이를 통일사상의 관점에서 평가하고 있다. ☞ ‘실존주의’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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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리아
사마리아 Samaria 항목체계 사상교리 [정의] 고대 북이스라엘 왕국의 수도. [내용] 사마리아가 북이스라엘 왕국의 수도로 건설된 것은 열왕기상 16장에 언급된 북이스라엘 왕국의 오므리 왕 때부터였다. 북이스라엘 왕국의 마지막 왕인 호세아 때 사마리아는 앗시리아에 의하여 점령되었다. 열왕기하 17장을 보면, 이후 이 지역에 이민족이 유입되면서 사마리아 사람들은 이민족과 결혼하며 유일신과 구분된 다신교 신앙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환경에 놓이게 되었다. 요한복음 4장에 언급된 예수님의 이동경로를 보면, 신약시대에 사마리아는 북쪽의 갈릴리와 남쪽의 유다 사이에 놓여 있는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유대인은 사마리아인, 곧 사마리아 사람과는 상종하려고 하지 않았다. 사마리아인은 본래 유대인과 같은 민족이었지만 유대인으로부터 부정한 사람으로 취급받으며 멸시를 당했다. 누가복음 10장 30-37절에 나오는 선한 사마리아인에 대한 예수님의 비유는 예수님 스스로가 유대인과 달리 사마리아인을 이웃으로 이해하고 있었음을 시사한다.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에게 먼저 말을 걸며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였다. 사도행전 1장 8절을 보면, 부활한 예수님이 승천하기 전 제자들에게 나타나 사마리아 전도를 당부하기도 했다. 『원리강론』에는 예수님이 세례 요한의 불신으로 인하여 가난한 자를 찾아 갈릴리 바닷가를 헤매고 사마리아 땅을 찾아가 복음을 전파하게 되는 노정이 언급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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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리아 여인
사마리아 여인 사마리아 女人 항목체계 종교일반종교학 [정의] 예수님에 의해 사마리아에서 첫 번째로 교화된 여인. [내용] 사마리아는 고대 북(北)이스라엘의 수도였다. 신약성서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공적 생애 가운데 한 일화로 소개되고(요한, 4:5-42)있다. 예수님이 갈리아로 가는 중에 사마리아 땅에 이르렀을 때, 피곤하여 야곱의 우물가에서 쉬고 있었는데, 마침 물을 기르러 그곳에 왔던 여인에게 물 한잔을 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사마리아 여인은 거절했다. 당시 사마리아 사람들은 유대 사람들과 교제가 없었기 때문에 그 여인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탁을 이상하게 여겼기 때문이다. 이에 예수님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목마르지 않는다.”라고 말하며 그 여인을 교화했다. 일찍이 이 일화는 물의 비적적(秘跡的) 의의 또는 세례를 시사하는 장면으로 받아들여졌으며, 비아 라티나의 카타콤베 벽화(4세기 후반), 빈 미술사박물관의 파올로 베로네제(1550-60)에 표현되는 등, 그리스도교 미술의 주요 주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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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막교부
사막교부 砂漠敎父 항목체계 종교일반종교학 [정의] 이집트의 스케티스사막에서 생활하며 철저한 금욕주의를 실천한 수사들. [내용] 3세기 무렵 주로 이집트의 스케티스사막에서 생활한 은수자와 금욕주의자 그리고 수사들을 가리키며, 이들은 초기 기독교의 발전에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 270년-271년 스케티스사막으로 이주한 안토니우스가 사막교부의 시조로 알려진다. 기독교인에게 완성은 세속의 삶을 청산하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따름으로써 성취된다는 가르침을 실천하기 위하여 안토니우스는 사막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 거주했으며, 356년 그의 죽음에 즈음하여 수천 명의 수사와 수녀들이 그의 본보기를 따라 살기 위하여 사막으로 모여들면서 사막교부의 전통이 시작되었다. 사막교부 전통의 시작은 콘스탄티누스 1세의 기독교 공인과 맞물려 있다. 313년 기독교가 공인되고 이집트에서 기독교가 합법화되면서 기독교인에 대한 박해가 사라지게 되자 안토니우스를 필두로 하는 여러 수사들이 스스로 사막으로 들어가서 고독과 내핍의 환경을 마련한 것이다. 이들은 사막의 고독과 내핍을 과거에 많은 기독교인들이 희생의 가장 숭고한 형태로 본 순교의 대안으로 여겼다. 따라서 이들은 모든 형태의 감각적인 쾌락과 충분한 음식, 목욕, 휴식 그리고 그들을 편안하게 하는 무엇이든 포기하는 극도의 금욕주의적인 삶을 살았다. 은수자들의 자발적이고 개별적인 모여듦으로 시작된 사막의 수도원들은 기독교 수도원의 전형이 되었다. 아토스산 동방의 수도원 전통과 서방의 성 베네딕트 규칙서는 모두 사막 수도원 전통에 큰 영향을 받았다. 헤시카즘(Hesychasm)운동을 포함하는 동방정교회 영성전통의 대부분은 사막교부들의 실천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심지어 펜실베이니아 경건주의와 독일의 복음주의, 영국에서의 감리교 부흥운동조차도 사막교부들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간주된다. ☞ ‘교부’, ‘수도원’, ‘헤시카즘’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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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모아
사모아 항목체계 해외 성격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의 선교국 [정의]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의 신아시아-태평양권역 선교국. [내용] 사모아 독립국은 오세아니아에 위치한 섬나라이며, 수도는 아피아이다. 1962년 1월 1일 뉴질랜드로부터 독립하였다. 주민의 90퍼센트 이상이 폴리네시아계의 사모아인이다. 언어는 사모아어와 영어가 공용어로 사용된다.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은 1975년에 최초의 사모아 선교사를 파송하였다. 또한 1980년 4월 뉴질랜드에서 입교한 존 본 딘클레지(John Von Dinklage)가 40일간의 수련을 받고 선교사로 파송되어 활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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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
사무엘 Samuel 항목체계 사상교리 [정의] 이스라엘의 사사. [내용] 이스라엘의 신앙과 생활을 지도한 경건한 지도자이자 이스라엘 최후의 사사였다. 사무엘상 2장을 보면, 사무엘은 자녀가 없는 그의 어머니 한나가 하나님에게 간절히 서원함으로써 탄생하게 되었다. 한나는 사무엘을 하나님에게 헌신하는 자, 곧 나실인으로 바칠 것을 약속하였고 이를 지키기 위하여 성막이 있던 실로의 제사장 엘리에게 어린 사무엘을 데려갔다. 사무엘은 어린 시절부터 하나님을 경외하며 성막을 지켰다. 성장한 사무엘은 이후 사사로서 이스라엘을 다스리게 되었다. 사무엘은 이스라엘의 마지막 사사로 간주되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그러나 사무엘은 나이가 들어 그의 아들 요엘과 아비야를 사사로 세웠다는 내용이 사무엘상 8장에 언급되고 있다. 사무엘과 달리 두 아들은 뇌물을 받고 재판을 공정하게 하지 않는 등 그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였으며, 이스라엘의 장로들은 사무엘에게 이스라엘의 왕을 요청했다. 사무엘은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 사울을 왕으로 세워 기름을 부었으나, 사울이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지 않음으로써 이후 다윗을 하나님의 뜻에 의하여 왕으로 세우게 되었다. 사무엘상 25장을 보면, 사무엘은 라마에 있는 자택에서 죽음을 맞이하였다. 사무엘은 『원리강론』에서 사사, 예언자, 선지자로 언급되고 있다. ☞ ‘선지자’, ‘사사’ 참조
가정연합 대사전은 천일국학술원에서 제공합니다.
이 사전은 2019년까지의 내용을 수록하였고 섭리의 변화에 따라 항목을 추가할 예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