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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
김일성 金日成 항목체계 인물 이칭/별칭 김성주 출신지 평안남도 대동군 성별 남 생년월일 1912.4.15 [정의] 해방 후 북한의 국가 주석으로 참부모님과 단독 회담을 한 정치인. [내용] 본명은 김성주(金成柱)이며 1912년 4월 15일 지금의 평양시 만경대에서 태어났다. 창덕학교를 졸업하고 1926년 부모가 있던 만주로 가 길림에 있던 육문중학교에 입학하였다. 1929년 만주지구 공산주의 청년동맹 서기로 활동하였고, 1932년 항일유격대를 조직하여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했다. 1945년 8월 해방 이후 소련군과 함께 대원들을 이끌고 북한에 들어와 사회주의 혁명을 주도하였다. 1945년 조선공산당 책임비서로 선출된 뒤 북조선인민위원회 위원장으로 선출된 이후부터 1961년까지 수령의 당 유일적 지도체제를 확립하였다. 북한은 1991년 9월 유엔에 가입하면서 국제적으로 미국과 일본 등 그동안 적대시하던 국가들과 관계개선을 위한 노력을 서둘렀다. 이에 국제적 기반을 가지고 북한을 도우려던 참부모님과 12월 6일 단독 회담을 가졌다. 세계적인 승공지도자인 참부모님과 만날 때 적대감이나 긴장감으로 경직된 상황이 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우려가 있었으나 참부모님과의 만남은 마치 형제가 만나는 듯 시종일관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진행되었으며, 격의 없는 대화를 나누었다. 참부모님과의 만남이 에서와 야곱의 만남에 비유되기도 하였다. 참부모님은 이 자리에서 한반도 비핵화와 남북정상회담, 이산가족 상봉, 금강산 개발 등에 합의한 이후로 남북한 총리를 대표로 하는 고위급회담이 개최되어 ‘화해와 협력 및 불가침에 관한 기본합의서’가 채택되기도 하였다. 이를 기반으로 1994년 남북정상회담의 개최를 실무적으로 진행하였으나 7월 8일 심근경색으로 사망하였다. 참부모님은 김일성 조문 불허라는 남한 정부의 방침에도 불구하고 박보희 당시 세계일보 사장을 보내 조문하게 하면서 형제지의를 전하였다. 이에 참아버님이 성화했을 때에도 김정은이 평양에 합동분향소를 설치하고 조전을 보내어 조의의 뜻을 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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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산
김재산 金在珊 항목체계 인물 출신지 충청북도 음성군 성별 여 생년월일 1918.7 [정의] 1952년 입교하여 전국 순회사를 한 초창기의 원로. [내용] 김재산은 독실한 기독교 신앙과 영적인 능력으로 부산 범냇골에서 입교한 후 충정의 신앙생활을 한 권사이자 순회사이다. 1918년 7월, 충북 음성의 산골마을에서 태어났다. 집 주위의 제일 높은 산이 재산이었는데, 어머니가 임신 중에 재산 위에 있는 동굴에서 아이를 낳는 꿈을 꾸어 이름을 재산이라고 하였다. 어린 시절부터 영통하여 이미 하나님의 심정을 체휼하고 8·15 광복과 한국동란 등을 계시로 알게 되었다. 원하지 않던 결혼으로 불행한 결혼생활을 하던 중 한국동란이 발발했을 때 교회를 세우라는 계시를 받고 어머니와 함께 피난민을 위한 교회를 세웠다. 부산으로 가야 된다는 계시를 받고 부산으로 이사하여 강현실이 있던 범천교회를 다니기 시작했다. 계시를 받고 어느 허름한 집에 가게 되었으나 사람이 살 것 같지 않아 되돌아 왔다가 강현실의 인도로 범냇골 토담집에 가게 되었다. 그곳에 가보니 계시를 받았던 바로 그 집이었다. 그곳에서 참아버님을 뵙고 바로 입교하였다. 그 후 참아버님이 있는 곳을 계시로 알고 대구와 서울까지 찾아다니며 신앙생활을 했다. 참아버님이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됐을 때에는 부산의 식구들을 모아 함께 철야하며 정성을 들이기도 했다. 1954년 가족을 떠나 전도에 집중하라는 계시를 따라서 여주를 시작으로 1957년 마산교회, 1958년 양산교회를 개척하였다. 1960년부터 경남지구 순회사를 맡았으며, 1966년 서대문교회를 개척했고, 1968년부터 전국 순회사를 하며 공적인 생활을 계속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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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락
김정락 金鼎洛 항목체계 인물 [정의] 1952년 부산 범냇골에서 입교하여 무주교회를 세운 원로목사. [내용] 김정락은 부산 범냇골에서 입교하여 전북 무주교회를 세운 원로이다. 1954년 전북 무주에서 헌집을 사서 교회를 세웠다. 그런데 1956년 7월 집이 노후해 무너지는 바람에 산등성이에 자리를 펴거나 불을 밝히면서 예배를 드렸는데도 4, 5백 명이 예배를 볼 정도로 교세가 성장하였다. 폭발적 은혜 속에 식구들의 정성으로 10월 예배당을 신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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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신
김종신 金鐘新 항목체계 인물 이칭/별칭 김종삼(金鐘三) [정의] 경북 청도에서 기독교 목사로 시무하다 입교 후 김종신으로 개명하고 활동한 목사. [내용] 1955년 경상북도 청도에서 기독교 목사로 시무하다가 입교하였다.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나겠다는 의지를 담아 김종삼이라는 본명을 김종신으로 개명하고 1956년 대한기독교협신회(大韓基督敎協信會)를 조직하여 초교파운동을 전개하였다. 이후 1958년 전국을 4개 지구로 분할하여 지구장을 임명할 때 충청권 지구장으로 임명받았다. 안창성, 황환채, 이요한 등과 함께 지구장으로 활동할 정도로 설교와 전도 등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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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화
김종화 金宗嬅 항목체계 인물 [정의] 흥남감옥 노정의 도화선이 된 평양시절 제자. [내용] 참아버님이 1946년 평양에서 선교를 시작할 때 인연되어 입교하였다. 사촌동생인 김인주를 나최섭의 집으로 인도하여 전도했으며, 대동보안서 고난 이후 참아버님을 집으로 모셔서 건강을 회복할 수 있도록 하였다. 박 씨 할머니의 옆집에 있었기 때문에 참아버님이 이 집에서 기거하면서 박 씨 할머니를 복귀하는 섭리를 할 수 있게 도왔다. 남편 정명선도 독실한 기독교 신앙을 하던 집사로서 같이 참아버님을 모셨으나 배신하여 참아버님을 고발하였다. 참아버님이 자신의 가정을 파괴하였다고 주장하여 결국 참아버님과 김종화를 평양교도소에 수감되게 했다. 그 후 사회질서문란죄로 참아버님은 5년 형을 언도받았고, 김종화는 1년 형을 구형받았다. 김종화는 남편의 형님 덕분에 곧 출소하였으나, 참아버님은 흥남감옥으로 이감되어 흥남노정을 걷게 되었다. ☞ ‘김인주’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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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화
김주화 金周華 항목체계 인물 출신지 평안북도 정주 성별 여 생년월일 1922.12.17 [정의] 정부의 보건사회부에서 일하다 입교한 초창기 원로. [내용] 김주화는 이화여대 음악과를 졸업하고 정부의 공무원으로 근무하다가 입교했으며 교회 개척자, 순회사, 목사 등을 역임하고 독일인과 특별 축복을 받은 원로이다. 1922년 평안북도 정주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교회를 다니며 성장하였다. 모친은 서양화가 나혜석의 동생으로 예술적 가문에서 성장하여 성악을 전공하고 도쿄에 유학까지 갔으나 병을 얻어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 후 집에서 야학을 하며 문맹퇴치운동에 앞장서며 영창학교를 설립하는 등 교육사업에 열심을 다하였다. 평양공립여자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이화여자대학교 음악과에 피아노 전공으로 입학하였으나 평소 아끼던 두 동생이 한국동란 중에 사망하는 사건을 겪으며 신앙적으로는 방황을 많이 하였다. 이화여대 졸업 후 보건사회부 부녀국에서 근무하던 중 동창이자 절친한 친구인 유효원이 통일교회에서 강의를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통일교회를 방문하게 되었다. 1955년 통일교회의 ‘원리’를 본격적으로 공부하면서 확신을 가졌으며 영적인 체험으로 더욱 결심을 굳혔다. 보건사회부에서 유학을 보내 주는 계획이 세워졌는데, 그 중의 한 명으로 선발되었다. 그러나 통일교회를 다닌다는 것이 밝혀져 외국에 나갈 기회도 없어지고 사직을 강요당했다. 직장과 교회 중 선택하라고 하였지만 망설이지 않고 자랑스럽게 직장을 그만두었다. 1957년 장충공원에서 노방전도활동을 펼치는 것을 시작으로 경북, 강원, 경기, 전남 등에서 공직활동을 하였고 전국 순회 임무를 맡아 헌신하였다. 참자녀님을 비롯하여 축복가정 자녀들에게 피아노를 가르치기도 하였다. 그리고 조카인 김기훈이 축복을 받고 미국으로 건너가 목회를 시작하여 큰 기쁨을 주었다. 1980년 58세가 되던 해에 참부모님의 특별 은사로 독일인 오토 반더(Otto Wanlder)와 축복결혼을 한 뒤 1983년 독일로 건너가 가정을 이루었다. ☞ ‘김기훈’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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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석
김준석 항목체계 인물 출신지 충청남도 아산 성별 남 생년월일 1906년 [정의] 평택지역의 유지로 입교 후 평택교회의 발전을 위해 헌신한 기성 축복가정. [내용] 김준석은 평택교회의 산증인으로 입교 후 목사로 공직을 수행하였으며 헌신적이고 열정적으로 신앙생활을 한 원로식구이다. 평택에서 공립보통학교를 수료한 뒤 서울의 양정고등학교에 다녔고, 졸업 후에는 공무원 생활을 하다가 해방을 맞았다. 해방 후 모든 공직을 사직하고 반탁운동과 계몽운동에 앞장섰다. 그러나 한국 사회는 사분오열됐으며, 갈등이 끊이지 않았다. 한국 사회를 통합할 수 있는 사상, 공산주의를 극복할 수 있는 사상을 찾아야겠다는 결심을 하고 태을교, 천주교, 개신교, 전도관 등 종교를 찾아가 보았으나 원하던 답을 찾지 못하였다. 종교가 오히려 더 분열되고 갈등이 심했던 것이다. 이후로 혼자서 기도생활을 하다가 침례교인 집에서 전도를 하고 있던 홍종복을 만나 창조원리의 강의를 듣고 감동을 받았다. 홍종복이 통일교인이라는 것이 밝혀져 집에서 쫓겨나자 자신의 집으로 모시고 와서 교회를 세웠다. 평택교회 첫 예배일인 1957년 1월 23일에 입교하였다. 1959년 평택교회 신축, 1960년 제1차 하계 40일 전도활동 참가, 1960년부터 1963년까지 평택교회 목사, 1963년부터 1964년 경기지구 총무부장, 1964년 김포 지역장, 1965년 평택 지역장을 역임하였으며 1964년 3년 노정 공로상, 1966년 4배가 운동 공로상, 1968년 7년 노정 공로상, 1970년 도지사 감사장 등을 받았다. 특히 1만여 평의 과수원을 평택교회를 위해 헌납하는 등 솔선수범하는 신앙적 자세를 가졌으며, 1963년 의정부에서 부산까지 천리행군에 참여하는 열정과 투지를 가졌다. 1963년 2월 부인 오순임과 기성 축복을 받았다.
가정연합 대사전은 천일국학술원에서 제공합니다.
이 사전은 2019년까지의 내용을 수록하였고 섭리의 변화에 따라 항목을 추가할 예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