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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운
김영운 金永雲 항목체계 인물 출신지 황해도 해주 성별 여 생년월일 1915년 [정의] 최초의 미국 선교사로서 『원리해설』을 영어와 독일어 등으로 번역하고 유럽 선교의 기반을 만든 초창기 여성 지도자. [내용] 김영운은 이화여대 신학과 교수로 재직 중 통일교회에 입교하여 해직된 뒤 미국 선교사로 파송, 미국과 유럽에서 선교의 기반을 닦는 데 크게 기여한 공로자이며 통일신학의 초석을 놓은 신학자이다. 16세에 감리교에 입교하여 이용도 목사의 부흥회에 참석하여 많은 감화를 받았고, 18-21세에는 예수교회를 다녔다. 해주여자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교원양성소에서 교육을 받은 뒤 교사 생활을 시작했다. 교회의 추천으로 1938년 일본 관서대학 신학부에 유학하여 전액 장학금을 받고 다니게 되었다. 1943년 졸업 후 금강산 내금강에 들어가 1년 동안 기도생활을 하기도 했다. 1945년 해방 후 계성여고의 영어교사로 있다가 1946년 이화여대에서 강의를 시작하였다. 캐나다 선교부의 장학금으로 캐나다 토론토대학교의 임마누엘칼리지에서 1948년부터 1951년까지 신학을 공부하였다. 졸업 후 캐나다 선교부의 지원을 받아 영국과 독일 등에서 국가 재건과 사회사업에 대한 연구를 하였다. 1952년 귀국하여 이화여대 신학부 교수로 재직하였다. 1954년 11월 한충화와 안창성의 권유로 통일교회에 입교했다. 처음에 김활란 이화여대 총장이 그녀에게 통일교회를 조사해 보라고 했지만, 그녀는 교회에서 말씀에 감동을 받고 입교했다. 이후에 통일교회를 다닌다는 이유로 해직된 후 교회의 일에 매진하였다. 1959년 1월 4일 미국 선교사로 오래곤주에 도착하여 활발히 전도활동을 하였다. 전도된 식구들을 중심으로 1960년 오크힐로 이사하여 영어 ‘원리’ 강의를 재번역하여 출판하였으며, 1961년 샌프란시스코로 이동하여 본격적인 전도활동을 하였다. 3층 집을 얻어 미국 최초의 센터를 열고 예배와 선교를 하였다. 1961년 캘리포니아 주정부에 교회를 등록하여 법인단체로 인가를 받아 법적인 보호의 기반을 만들었다. 1963년 ‘New Age Frontier’라는 소식지를 만들어 식구들의 신앙 관리에 힘썼다. 『원리해설』을 독일어로 번역하여 독일 선교를 시작하였다. 1965년부터 영국 런던에서 유럽 선교를 지원하였으며, 1975년부터 미국 통일신학교에서 교수로 재직하다가 1989년 성화하였다. ☞ ‘안창성’, ‘한충화’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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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덕
김원덕 항목체계 인물 [정의] 참아버님의 흥남감옥 옥중 제자들 12인 중 한 사람. [내용] 김원덕은 흥남감옥에서 참아버님을 모시던 12제자들 중 한 사람으로 피난 후 부산에서도 참아버님을 모셨던 의인이다. 참아버님이 흥남감옥에 수감되기 전날 꿈에 돌아가신 선친이 나타나 “내일 하늘이 가장 사랑하는 아들 한 분이 들어오신다. 너 있는 감방에 들어오시면 잘 모셔라.”고 알려 주어 참아버님을 성심을 다해 모셨다. 북한군이 흥남감옥을 버리고 퇴각할 때 처형장에 끌려가 다리에 총을 맞고 혼절했으나 도망해 목숨을 건졌다. 이후 청년자치대에 합류했다가 남하하여 부산에서 참아버님과 상봉한 뒤 모시며 따랐다. ☞ ‘엄덕문’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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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필
김원필 金元弼 항목체계 인물 출신지 평양 성별 남 생년월일 1928.9.2 [정의] 참부모님의 평양 제자로 부산 남하 노정과 피난생활을 보좌하고 첫 번째로 축복을 받은 축복가정의 맏형. [내용] 김원필은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 역사에서 중요한 초창기 인물들 중 한 명이다. 1946년 3월 평양사범학교를 졸업했고, 그해 7월 만 18세에 참아버님을 만나 성화할 때까지 일심으로 모신 수제자이다. 1946년부터 1950년까지 평양에서 참아버님이 고난을 당할 때 감옥에 면회를 가는 등 가까이에서 모셨으며, 1950년 흥남감옥을 나와 부산까지 남하하던 노정을 함께했다. 부산에서 범냇골 토담집을 짓고 참아버님과 같이 생활하며 ‘원리원본’ 집필을 도왔고, 미국 병사들에게 초상화를 그려 주며 경제적인 기반을 닦았다. 1960년 정달옥과 3가정으로서 축복을 받았으며 1963년 세계기독교통일신령협회 유지재단 이사장, 1970년 일화 초대대표이사, 1979년 미국 회장 및 가정교회운동 책임자, 1986년 유럽 대륙회장, 1991년 일본 총회장, 1994년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 초대회장 등을 역임하며 교회의 책임을 맡았다. 노르웨이 국가메시아로 통일가의 충신이자 절대복종의 산증인이었다. 특히 조용한 성격으로 어머니와 같은 입장에서 일본 식구들을 따뜻하게 사랑해 주어 일본 식구들의 존경을 받았다. 2010년 4월 7일 선교지였던 일본에서 만 81세의 일기로 성화하였다. 이때 “내가 가져가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과 사랑하는 내 아내이다. 그러니 바람과 같이 묻어 다오.”라고 유언하였다. 세계성화식으로 거행되었으며, 참부모님은 ‘축 축복가정 장형 김원필 천정봉신자되소서!’라고 휘호를 하사하였다. ☞ ‘정달옥’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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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익두
김익두 金益斗 항목체계 종교일반종교학 [정의] 1920년대 신유의 능력으로 개신교 부흥운동을 이끈 장로교 목사. [내용] 김익두(金益斗, 1874-1950)는 1907년 대부흥운동부터 1920년대 초까지 길선주 목사와 더불어 우리 민족의 성령 체험을 통해 기독교 부흥을 위해 왕성하게 활동한 부흥목사였다. 김익두는 황해도 안악에서 태어나 일찍 부친을 여의고 청년시절 좌절하여 술과 노름을 하며 방탕하게 살다가 1900년 안악교회에서 스왈론(W. L. Swallen) 선교사의 영생에 대한 설교에 감화를 받고 신앙에 입문하였다. 그러나 얼마 안 되어 다시 옛 생활로 되돌아간 자신을 회개하며 산중기도를 하던 중 가슴을 칼로 찢던 성령의 임재를 경험하고 회심하였다. 김익두는 이후 금욕, 열성적 기도생활, 개척전도, 성경강독으로 준비하여 1901년 세례를 받고 재령읍교회 전도사 활동과 신천교회 개척전도 등에도 열심을 다하였다. 1906년에는 평양 장로회 신학교에 입학하여 1911년 졸업한 후 1913년부터 황해도 신천교회 목사로 시무하며 교회를 크게 성장시켰고, 기도로써 병 고치는 신유와 전도의 능력으로 교회 지도자로서 인정을 받아 1920년에는 예수교장로회 총회장으로 피선되기도 하였다. 김익두가 전국적인 신유부흥목사가 된 결정적 계기는 1919년 경북 달성 현풍교회 사경회 때 안수기도로 불구자를 고친 신유의 역사부터이다. 그 뒤 김익두의 부흥회에서 중풍환자, 앉은뱅이, 혈루병, 반신불수의 환자들이 치유되는 역사가 있었다. 전국 각지의 부흥회마다 성령의 은혜와 안수기도를 받기 위해 사람들이 운집했으며, 그가 시베리아와 만주의 간도까지 순회하며 이끈 부흥회가 776회나 되었다. 그러나 신유의 기적에 대해 교회 내에서도 이견이 있어서 그런 기적을 조사하던 ‘이적명증회’가 조직되었으며, 일본 경찰의 훼방과 감시의 대상이 되었고, 또한 사회주의 인사들로부터는 고등무당이라는 비판도 받았다. 그런 상황 속에서 1930년대부터 부흥집회가 크게 위축되었다. 더욱이 김익두는 일제 말기 강압에 이끌려 신사참배를 하였고, 해방 후 공산당의 강요로 기독교도연맹의 총회장이 되는 등 말년에는 실책으로 평가되는 행보를 보이다가 1950년 후퇴하던 공산당에 의해 죽음을 맞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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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주
김인주 金仁珠 항목체계 인물 출신지 평안남도 평원 성별 여 생년월일 1917.6.1 [정의] 평양에서 입교한 초창기 원로이자 순회사. [내용] 1946년 평양에서 입교한 이후 참부모님을 위해 헌신한 원로이다. 1917년 6월 1일 평안북도 평원군에서 독실한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나 매일 아침 새벽기도와 가정예배를 보던 환경에서 성장하였다. 순안 사립숭의학교를 다니며 독립정신을 기르고 평양으로 이사하여 숭의여자중고등학교를 졸업하였다. 김광선과 결혼한 후에도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면서 지내던 중 1946년 6월 10일 사촌 김종화의 인도로 참아버님을 만났다. 그날 밤 몽시 후 신비체험을 하며 입교를 결심하였다. 7월에 조카인 김원필을 통일교회에 인도하였다. 집안의 극심한 반대 속에서도 몽시와 환상을 통해 힘을 얻고 신앙생활을 계속하였다. 한국동란 후 부산에서 다시 참아버님을 뵙고 열정적으로 교회를 다녔다. 참아버님이 있던 곳을 계시로 받아 찾아갈 정도로 충실한 신앙생활을 하였으며 1960년 포천교회를 개척했고, 1963년 협회 부인회장을 역임하였다. 1968년 7년 노정 헌신상을 받기도 하였으며 1971년부터 전국 순회사로 활동하였다. 2010년 4월 1일 성화하였을 때, 참부모님이 ‘축 천성입성 명일자 순회사 김인주 여사(祝 天城入城 明一者 巡廻師 金仁珠 女史)’라는 휘호를 내렸다. ☞ ‘김종화’, ‘김원필’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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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철
김인철 金寅哲 항목체계 인물 출신지 황해도 재령 성별 남 생년월일 1912.11 [정의] 협회의 초대섭외부장이자 국제승공연합 초대이사장을 역임한 원로. [내용] 김인철은 사회적으로 활동한 기반을 활용하여 교회의 여러 난관을 섭외로 풀며 공헌한 지도자이자 36가정으로서 축복을 받았다. 1912년 황해도 재령에서 독실한 기독교 가정에서 출생하여 서울 경신중학교에 입학하였으나 광주학생사건이 일어나면서 학생데모에 참여한 관계로 퇴학당하였다. 이후 해주 재령명신중학교에 편입한 뒤 1936년 숭실전문학교 농과를 수료하였다. 졸업 후 아버지를 도와 물류창고업을 하던 중 해방을 맞았다. 결혼하여 슬하에 7남매를 두어 남하하지 못하고 있다가 한국동란이 발발해 연합군이 북진할 때 잠시 북한의 경찰국장을 맡게 되었다. 이로 인해 1·4 후퇴 당시에 가족을 두고 남하하여 1955년 동양의대 노정우 교수의 인도로 2월 21일 통일교회에 입교하였다. 그 후 미곡창고 마산지점을 시작으로 여수지점을 거쳐 대전지점장이 되었다. 1959년 인천에서 대한통운 지점장으로 지내며 예화총포 허가를 위한 섭외를 하였다. 이후 예화총포제작소 초대대표와 1960년 8월 협회 섭외부장을 맡았다. 1961년에는 재혼한 부인과 36가정의 축복결혼에 참여하였다. 1968년 ㈜통일산업 초대사장과 국제승공연합 초대이사장을 역임했다. 한·일승공대회 대회장, 아시아 승공대회 대회장, 제4, 5, 6차 세계승공대회 한국 측 대표를 맡기도 하였다. 1981년 국제승공연합 회장과 1983년 ㈜일화의 상임고문을 맡는 등 교회의 발전에 기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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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호
김인호 金仁浩 항목체계 인물 [정의] 참아버님을 ‘옥중의 성자’로 증언한 흥남감옥의 제자. [내용] 김인호는 흥남감옥에서 참아버님을 따랐던 12제자들 중 한 사람으로 회고록 『서울로 오는 길』에서 흥남감옥의 참상을 상세히 기록하고 참아버님에 대해 증언하였다. 지옥과 같은 흥남감옥은 생존이 어려운 상황이라 어떠한 사람도 본연의 모습을 잃게 되는데, 참아버님은 어려운 상황에서도 변함없이 하나님을 위한 생활을 하였고 언행과 인격이 다른 사람들과 달라서 마치 ‘옥중의 성자’와 같았다고 증언했다. 흥남감옥에서 해방되었을 때에도 참아버님을 따라서 이동했는데, 마치 하나님이 보호해 주듯이 삼엄한 전시의 험로를 뚫고 산길로 이동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가정연합 대사전은 천일국학술원에서 제공합니다.
이 사전은 2019년까지의 내용을 수록하였고 섭리의 변화에 따라 항목을 추가할 예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