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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형의 하나님
유형의 하나님 有形의 하나님 항목체계 사상교리 [정의] 완성한 아담과 해와의 격위를 나타내는 말. [내용] 창조목적을 완성한 아담과 해와의 격위를 나타내는 말이다. 인류시조 아담과 해와가 신인애일체(神人愛一體)를 이루어 창조목적을 완성하면 유형의 하나님으로서의 가치를 지닌다는 뜻이다. 하나님은 어떠한 형체도 갖고 있지 않은 무형으로 존재한다. 영적이고 무형인 하나님이 표준적 형을 갖춘 실체세계로부터 오는 자극을 통해 기쁨을 실감하기 위해서는 ‘몸’이 필요하다. 즉 무형의 하나님이 ‘체’를 써야만 감각기관을 통해 들어오는 충동과 자극, 즉 기쁨을 느낄 수 있다. 이를 위하여 하나님은 자신의 신상과 신성을 그대로 닮은 분성적 실체(分性的 實體)로 영육을 갖춘 아담과 해와를 창조하고 이들과 사랑으로 일체를 이루고자 하였다. 아담과 해와가 책임분담을 완수하여 참된 부부로서 신인애일체를 이루면, 하나님은 완성한 아담과 해와의 형상을 쓰고 보이는 하나님으로 나타나 영계와 지상계 전체를 주관하며 실체적인 기쁨을 누리게 된다. 이렇듯 완성한 아담과 해와는 천주에서 하나님의 영원한 형상이 된다. 그런 점에서 하나님을 무형의 하나님, 완성한 아담과 해와를 유형의 하나님이라고 한다. ☞ ‘무형’, ‘유형’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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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효민
유효민 劉孝敏 항목체계 인물 출신지 평안북도 정주군 관주면 성별 남 [정의] 유효원의 동생으로 초창기 입교하여 경제부문에 헌신한 원로. [내용] 독실한 기독교 가문에서 태어났다. 조부 유상찬은 관주면에 장로교회를 세워 선교를 하고 마을에 학교를 세우는 등 열정적인 신앙생활을 하였다. 해방 이후 신앙적인 박해가 심해져 형 유효원, 유효영과 함께 1947년 11월 남하하였다. 옹진군 연평도에서 3년간 삼 형제가 같이 지내면서 사업을 구상하다가 한국동란 이후 부산으로 피란하였다. 부산에서 영락교회 찬양단 활동을 하면서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였다. 서울수복 이후 형제가 흩어졌다가 유효원이 부산에서 사업을 시작하여 1953년 8월 형제가 다시 부산에 모였다. 이후 유효원을 통해 12월 24일 참아버님을 뵙고 원리말씀을 들었다. 입교 후 서울로 올라와 협회 창립에 참여하였고 사진을 제작하여 판매하는 등 경제부문에 헌신하였다. 1955년 7·4사건이 일어났을 때 참아버님과 함께 수감되어 고난에 동참하였다. 1956년 성화청년회 초대음악부장을 맡기도 하였다. 1957년 인화실업을 인수하였을 때 형 유효영을 도와 전무로서 공장 정상화를 이루었고 공기총 제작과 천승호 제작 등에도 함께 참여하였다. ☞ ‘유효원’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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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효영
유효영 劉孝永 항목체계 인물 출신지 평안북도 정주군 관주면 성별 남 생년월일 1921년 [정의] 유효원의 동생으로 초창기 입교하여 경제부문에 헌신한 원로. [내용] 한국동란 이후 부산으로 피란한 뒤 영락교회 찬양단원으로 있으면서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였다. 이후 유효원을 통해 12월 24일 참아버님을 뵙고 원리말씀을 들었다. 입교 후 서울로 올라와 협회 창립에 참여하였고, 사진을 제작하여 판매하는 등 경제부문에 헌신하였다. 1955년 7·4사건이 일어났을 때 참아버님과 함께 수감되어 고난에 동참하였다. 1957년 인천에서 제빙공장인 인화실업을 인수하였을 때 공장장을 맡아 정상화를 이루었으며, 공기총 제작사업의 책임을 맡기도 하였다. 1963년 목수 7명을 데리고 천승호 제작을 지휘하여 진수하고 1968년까지 배 제작사업을 담당하였다. 이후 통일산업 구매부장으로 근무하다가 1971년 일신석재 공장장을 거쳐 1973년 일신석재 사장에 취임하였다. 일신석재 사장으로서 상공부장관상을 수차례 수상하고 1981년 대통령으로부터 산업포상을 받는 등 사업을 안정적으로 운영하여 경제부문에서 큰 공로를 세웠다. ☞ ‘유효민’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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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효원
유효원 劉孝元 항목체계 인물 출신지 평안북도 정주군 관주면 성별 남 생년월일 1914.9.25 [정의] 『원리해설』과 『원리강론』 집필을 주도적으로 진행하여 교리 정리에 기여한 초대협회장. [내용] 출생과 성장 1914년 9월 25일 평안북도 정주군 관주면 관삽동 229번지에서 유정한과 이신실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조부 유상찬이 개신교로 개종한 이후 교회 개척과 학교 설립 등에 정성을 다하는 등 독실한 기독교 집안에서 성장하였다. 탄생 전 모친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쓰여질 생명이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하였는데, 새벽녘 마지막 어둠을 비추던 큰 별이 품에 들어와 안기는 태몽을 꾸었다. 어린 시절 머리가 명석하여 수재라고 불렸으며, 독립운동가로 활동한 종조부 유상돈 등 가문 어른들의 영향으로 애국심을 가졌다. 1927년 영창보통학교, 1933년 정주군 오산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1936년 경성제국대학교 예과를 수료하고 의학부에 입학하였다. 그러나 학업에 정진하던 중 결핵균이 뼈에 침투하여 고관절을 제거하는 수술을 받게 되어 1939년 학업을 중단하였다. 26세에 다리를 자유롭게 움직이지 못하는 불구의 몸이 되어 고향 집에서 6년 동안 병마와 싸우며 지냈다. 방황 중 입교 해방 후 남북이 분단되는 상황을 보며 공산정권을 떠나 동생들을 데리고 남하하여 연평도에서 연복중학교를 개교하였다. 연복중학교에서 무상으로 가난한 아이들을 모아 가르치던 중 한국동란이 발발하여 부산으로 피난하였다가 목포로 이동하여 책 표지 만드는 사업을 구상하였다. 1953년 부산으로 다시 이동하여 사업을 시작하던 차에 10월 평소 알고 지내던 양윤신을 통해 ‘원리’ 말씀을 듣게 되었다. 김성실, 김원필 등을 통해 말씀을 더 접하고 참아버님이 지내던 곳을 찾아갔으나 만나지 못하였다. 11월 24일 이수경을 통해 참아버님이 직접 기록한 ‘원리원본’을 빌려 읽고 “‘원리원본’을 읽은 뒤 내가 누구인가를 발견하고 예수님의 말씀이 이 책에서 결론을 내리고 있다.”고 고백하였다. 이어 “미미한 불구의 몸이오나 버린 양으로 거두시와 뜻 이룸에 도움 되고자 합니다. 부르심에 응하여 이 한 몸 바칠 영광의 날이 있기를 바라나이다.”라고 참아버님에게 편지를 올렸다. 참아버님은 이 편지를 읽고 스승을 만나보지 않고 전도가 된 사람이라고 치하하면서 직접 부산으로 오셨다. 12월 24일부터 사촌누이인 유신희 집에서 참아버님에게 직접 말씀을 듣기 시작하였으며, 1월 초에는 유효민과 김명희 등이 합류하여 25일 동안 직접 말씀을 듣고 입교하였다. 충성스러운 효자의 삶 입교 후 ‘원리’ 말씀을 강의로 체계화하여 정리하였으며 참부모님을 절대적으로 믿고 모시는 생활을 하였다. 참부모님도 “명령만 하면 사지(死地)로 갈 수 있는 사나이”라고 그 충심을 인정하였다. ‘원리’ 말씀을 전하는 강사로 하루 18시간까지 강의를 하고 초대협회장으로 교회의 제반 행정을 담당하는 등 초창기 교회의 기반을 만들었다. 또한 1955년 7월 4일에는 참아버님을 따라 스스로 서대문형무소로 찾아가 ‘7·4수난’에 동참하였다. 참아버님보다 먼저 9월 28일 병역기피에 대한 벌금을 내고 출옥한 후 교회를 일신하는 중심이 되었다. ‘원리’의 체계화 참아버님의 지도와 감수를 받아 1954년 1월부터 3년 동안 ‘원리’를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원리해설』을 1957년 8월 15일 출판하였다. 원고 초안을 쓰면 여러 사람들이 읽고 그 내용을 토론하여 수정하고 다시 참아버님이 검토하는 순서로 여러 차례 수정작업이 진행되었다. 이후 참부모님의 지도 아래 『원리해설』을 보다 현대적 문체와 체계적 내용으로 다듬어 1966년 5월 1일 『원리강론』을 출판하였다. 그 과정은 9년 동안 힘든 고난의 연속이었다. 『원리해설』을 출판하던 과정처럼 원고를 같이 읽고 수정하면서 참부모님의 감수를 받아 진행되었는데 경제적으로 어려운 교회의 살림으로 원고를 집필하는 공간을 별도로 마련할 수 없는 열악한 환경에서 참부모님에 대한 절대신앙·절대사랑·절대복종의 자세로 완성할 수 있었다. 축복과 성화 1960년 4월 16일 세 자녀 축복결혼에 참여하여 사길자와 가정을 이루었다. 그는 인류를 대표하는 세 아들 중 하나로서 축복을 받게 되었으며, 이후 사길자와 세 아들을 낳았다. 가정을 돌볼 수 없이 바쁜 생활을 하면서 『원리강론』 원고 집필과 교회 행정은 물론 축복결혼의 식전 준비 책임, 축복에 대한 교육도 진행하였다. 일본과 미국을 다니며 참부모님을 수행하기도 하였다. 1969년 서울대병원에 입원하여 고관절을 복원하는 수술을 두 번 받았는데, 그 과정에서 간암을 발견하였다. 암 완치를 위해 세계의 식구들이 함께 기도하였으나 1970년 7월 24일 57세의 일기로 성화하였다. 이후 성화일을 기념하여 추모예배를 드리고 있다. 참부모님은 “세례 요한은 예수님보다 6개월 나이가 많았고, 유효원은 나보다 여섯 살 많았다”고 하면서 “유효원은 세례 요한의 입장에 있었다.”고 말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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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신
육신 肉身 항목체계 사상교리 [정의] 인간의 몸을 의미하며 육심과 육체로 이루어져 있음. [내용] 인간의 몸, 신체를 뜻하는 용어로 사용된다.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에 따르면 인간은 마음과 몸으로 구성된 이중체이며, 이때의 몸은 하나님의 본형상이 차원을 달리하여 피조세계에 전개된 것이다. 즉 본형상이 시간, 공간의 세계에 나타난 것이 인간의 몸, 동물의 육, 식물의 조직세포, 광물의 분자와 원자이다. 육신은 육심(肉心)과 육체(肉體)의 이성성상으로 이루어져 있다. 여기서 육심은 육체로 하여금 그 생존과 번식과 보호 등을 위한 생리적인 기능을 유지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는 작용을 한다. 또한 육심은 의식주 및 성의 생활, 물질생활을 추구하는 기능을 담당한다. 육체는 육심에 의해 생리적 기능을 유지하고 성장해 나간다. ☞ ‘육심’, ‘육체’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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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신 재림
육신 재림 肉身 再臨 항목체계 사상교리 [정의] 재림 메시아는 영체가 아닌 육신을 쓰고 지상에 탄생한다는 주장. [내용] 타락한 인류와 세계를 구원하기 위해 다시 오시는 재림 메시아는 영육 아우른 인간의 모습으로 지상에서 탄생함을 의미한다. 예수님은 영으로 재림한다는 영체 재림과 대조하여 이르는 말이다.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이유에서 메시아의 육신 재림을 주장한다. 첫 번째로 메시아는 피조세계의 완성한 주관주로 오시기 때문이다. 창조원리에 따르면, 하나님은 무·유형 실체세계를 창조하고 인간을 두 세계의 주관자로 세웠다. 인간이 책임분담을 완수하여 제2의 창조주 입장에 서면 영인체를 바탕으로 무형 실체세계, 육신을 통해서는 유형 실체세계를 각각 주관해 나가게 된다. 그러나 아담과 해와는 하나님을 닮아 나가는 미완성기에 타락하였고, 이로 인해 천주는 참된 주관주를 잃어버리고 말았다. 따라서 재림 메시아는 두 세계의 완전한 주관주로 와서 타락한 인간을 그에게 접붙여 이들을 피조세계의 주관주로 다시 세워야 한다. 그러므로 메시아는 영육 아우른 완성된 존재로 재림하여야 한다. 두 번째로 메시아는 육적 구원을 완성해야 할 사명을 갖고 있기 때문에 육신 재림해야 한다. 초림 메시아인 예수님은 사탄의 혈통을 이어 받은 인류를 다시 낳아 죄 없는 하나님의 자녀로 구원하는 인류의 실체 참부모가 되어야 했다. 하지만 준비된 유대 민족의 무지와 불신으로 십자가 죽음을 당함으로써 영적 구원만을 이루었다. 재림 메시아는 인류의 참부모로 와서 원죄를 벗는 축복결혼을 거행하여 타락한 인간을 영육 아울러 완전히 구원해야 한다. 따라서 다시 오실 재림 메시아는 육신을 쓰고 지상에서 탄생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두 가지 이유를 근거로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은 예수님의 재림이 영체 재림이 아니라 초림 때와 같이 지상으로 탄생하는 육신 재림이라고 밝힌다. ☞ ‘영체 재림’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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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심
육심 肉心 항목체계 사상교리 [정의] 육신의 주체적인 부분으로 의식주 및 성(性)의 생활을 추구함. [내용] 하나님은 인간이 유형 세계를 느껴 그것을 주관할 수 있도록 물과 흙과 공기로써 육신을 창조하고, 무형 세계를 주관할 수 있도록 영적인 요소로써 영인체를 창조하였다. 이처럼 인간은 영인체와 육신으로 구성된 이중적 존재이다. 인간의 영인체는 생심과 영체의 이성성상으로서 인간의 육신은 육심(본능)과 육체의 이성성상으로 각각 이루어져 있다. 여기서 육심은 육신의 주체적인 부분으로 육체로 하여금 생존과 번식과 보호 등을 위한 생리적인 기능을 유지할 수 있도록 이끄는 역할을 한다. 『통일사상요강』에 따르면, 육심의 기능은 의식주 및 성의 생활, 물질생활을 추구하는 데 있다. 이러한 육심에 의해 육체는 생리적 기능을 유지하고 성장해 나간다.
가정연합 대사전은 천일국학술원에서 제공합니다.
이 사전은 2019년까지의 내용을 수록하였고 섭리의 변화에 따라 항목을 추가할 예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