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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인수
한인수 韓仁洙 항목체계 인물 성별 남 [정의] 승공운동과 농촌계몽운동에 헌신한 36가정 원로. [내용] 농촌계몽운동의 모델인 복지농도원을 설립하여 원장으로 헌신했던 36가정 원로이다. 초창기에 입교하여 1955년 정읍에서 교회 개척을 위해 노력하였다. 1957년 전도상을 수상하고, 1957년 성화청년회 전도부장으로 발령받았다. 1958년 충청 지구장, 1962년 서울 제1지구장으로 시무하였고, 1961년 36가정으로 축복을 받았다. 1964년 농촌계몽과 정신수양을 위해 대전에 복지농도원을 설립하고 원장을 맡아 헌신하였다. 농촌 청년들의 자립과 수양을 위한 교육을 대대적으로 펼쳐 1966년 2월 26일 서울신문사 주최 대통령상 제1회 한국농업상 단체상을 수상했으며, 1966년 5월 16일 5·16민족상 사회부문 본상을 수상했다. 5·16민족상 수상자로서 여러 대학과 단체들로부터 초청을 받아 강연회를 가졌다. 1965년 강원 지구장으로 발령받아 강원도 복귀를 위해 노력하였으며 승공운동의 기반을 조성하여 1968년 강원도 반공계몽단 초대단장으로 선출됐다. 1969년 7월 1일 종로 지구장으로 발령받아 서울에서 활동하다가 1973년 2월 15일 중앙연수원 제3대 원장으로 취임하여 승공교육에 박차를 가했다. 1976년 4월 9일 ㈜일화의 대표이사로 취임하여 경제 복귀를 위해 노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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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충화
한충화 韓忠嬅 항목체계 인물 성별 여 [정의] 이화여대에서 교수로 재직 중 입교한 뒤 퇴직당한 원로. [내용] 이화여자대학교 교수로 재직 중 입교한 뒤 퇴직당한 초창기의 원로이다. 이화여자대학교 영어영문학과 교수로서 1954년 양윤영 교수의 소개로 10월 21일부터 ‘원리’를 듣고 입교하였다. 입교 후 기숙사 사감을 겸임하고 있어 이화여대의 많은 학생들을 인도하여 ‘원리’를 듣도록 하였다. 평소 애국심이 높고 신앙심이 깊어 학생들에게 존경과 사랑을 받고 있어서 많은 학생을 전도해 1955년 전도상을 받았다. 통일교회를 믿는다는 이유로 3월 학교로부터 면직을 당하였다. 학생들까지 퇴학조치를 당하자 함께 북한산에 올라 3일 금식기도를 하기도 했다. 1956년 4월 전주교회의 인도자로 파송되었으며 헌신적으로 신앙생활을 하다가 성화하였다. ☞ ‘양윤영’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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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학자
한학자 韓鶴子 항목체계 인물 이칭/별칭 천지인참어머님 출신지 평안남도 안주군 안주읍 신의리 26 성별 여 생년월일 1943.1.6(음) [정의] 인류의 구세주이자 독생녀, 참부모로 오신 천지인참어머님. [내용] 가문과 탄생 하나님은 독생자인 참아버님을 이 땅에 보내고 독생녀 실체성신인 참어머님을 이 땅에 보내기 위해 신령교단을 세워 준비하였다. 하늘의 신부로 준비되었던 2천 년 기독교 역사는 재림주님을 맞이하기 위한 한국의 신령교단과 연결되었던 것이다. 특히 조원모 할머니와 홍순애 대모님은 일제의 탄압 속에 기도와 정성을 들이던 신령교단들 중 여성계 신령교단인 성주교의 김성도와 복중교의 허호빈을 만나 기도하여 참어머님을 모실 수 있는 가문으로서 정성의 기반을 조성하였다. 외조모 조원모(趙元模)는 조상들 중 조한준이 사재를 내어 평안북도 정주의 달래강에 큰 돌다리를 만들어 공덕을 쌓아 후손들 중에 하늘의 딸이 올 것이라는 전설이 전해지던 집안에서 태어났다. 부지런하고 활동적인 신여성이었으며 독실한 기독교 신앙을 하면서 진정한 믿음을 찾고자 노력하였다. 홍유일(洪唯一)과 조원모의 장녀로 평안북도 정주에서 태어난 대모님 홍순애(洪順愛)는 모친의 인도에 따라 여러 신령한 교단들을 찾아다니며 신앙생활을 하다가 성주교와 새예수교, 복중교 등에서 기도생활을 하였다. 신령한 신앙생활을 한 외조모와 모친의 정성이 모인 가운데 1943년 음력 1월 6일 평안남도 안주군 안주읍 신의리 26번지에서 부친 한승운(韓承運)과 홍순애의 외동딸로 탄생하였다. 메시아 증거와 남하 홍순애 대모님이 재림주님을 맞이하기 위한 신앙생활에 전념하여 참어머님은 어린 시절 외가에서 성장하였다. 독실한 기독교인이자 신앙생활을 최우선으로 하였던 외조모와 대모님의 보호 아래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삶을 자연스럽게 체화하였다. 대모님이 오시는 주님을 맞이하기 위해 신령교단인 성주교와 복중교에서 많은 정성을 들이고 헌신하던 중 참어머님이 여섯 살 되었을 때, 허호빈의 어머니가 ‘하늘의 신부가 되실 분’이라고 축복하였다. 모든 신령한 역사적 기반이 대모님을 거쳐 참어머님에게로 승계된 것이다. 이후 1948년 북한 공산당국의 종교 탄압으로 외조모와 대모님이 11일 동안 수감되고 말았다. 그 후 공산당이 기승을 부리게 되어 더 이상 북한에서는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힘들다고 절감한 외조모와 대모님을 따라서 참어머님이 남하하게 되었다. 학창 시절과 신앙생활 참어머님은 남하 후 서울 효창초등학교를 시작으로 대구, 서귀포, 춘천 등을 거치면서 학업을 계속하였다. 대구에서 지낼 때에는 낯선 남자 한 사람이 참어머님을 보고 ‘천지간에 신성한 분’이라고 증거하는 등 많은 영적인 증거들이 이어졌다. 또한 춘천 봉의초등학교 시절 생활기록부에는 “매우 정숙하고 친절하며, 어딘지 고상한 태도가 보이고, 급우들 중 가장 침착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조용히 사색하는 성품으로 졸업할 때 우등상을 받았다. 1956년 4월부터 1959년 3월까지 성정여자중학교를 다녔으며, 1959년 3월 서울의 성요셉 간호고등기술학교에 입학하였다. 성장하는 동안 신앙생활을 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기필코 이뤄드리겠다.”고 결심 하였다. 참아버님과의 만남과 성혼 참어머님이 초등학교를 졸업한 직후 만 13세인 1956년 3월 대모님을 따라 청파동교회에서 참아버님에게 인사를 올렸다. 참아버님은 이름을 물으신 후 “한학자가 한국 땅에 태어났다.”를 세 번 반복하고 “하나님, 한학자라는 이렇게 훌륭한 여성을 한국에 보내 주셨군요. 감사합니다.”라고 기도하였다. 1960년 2월 성혼을 준비할 때 여러 사람들에게 계시가 내려 참어머님이 오신 것을 알게 되었고, 3월 27일 약혼식을 거쳐 4월 11일 참아버님과 성혼하였다. 이 성혼식은 완성된 아담으로 오신 참아버님과 완성된 해와로 오신 참어머님이 참부부로 만나 인류의 참부모가 된 세계적이고 천주사적인 성혼이었다. 성혼 이후 7년의 기간은 가정적으로 사탄의 참소를 받지 않는 조건을 세워야 하는 기간이었는데, 참아버님과 절대적으로 하나 되어 믿음과 사랑의 실체가 되었다. 이러한 기준으로 7년 노정의 내적 승리를 통해 1968년 1월 1일 하나님의 날이 선포되었다. 또한 예진과 효진을 시작으로 14명의 참자녀를 출산, 양육하였다. 신앙의 모체와 지승일 참어머님은 재림주님을 향한 절대적 신앙의 기반 위에 탄생하여 성장하면서 절대사랑·절대신앙·절대복종의 신앙을 체화하였다. 성혼 이후 “하나님의 소망을 내가 반드시 이뤄드리겠다.”는 결심으로 참아버님과 일체가 되어 하나님에 대한 신앙의 모체가 되었다. 1977년 만 33세가 되었을 때 참부모로서 공식적인 생애를 승리한 것을 축하하는 의미의 지승일(地勝日)이 제정됐으며, 하늘과 땅이 하나 된 새로운 시대가 선포되었다. 참부모의 전통 성혼 후 40년 동안 참아버님과 하나 되어 모든 일정을 함께하는 기준을 세운 기반 위에 1990년 한국 국민 앞에 공식적으로 참부모가 선포됐으며 1992년에는 세계 앞에 인류의 참부모, 구세주, 재림주로 오셨음이 선포되었다. 1992년부터 세계평화여성연합 총재의 직분으로 인류를 사랑하는 참어머님의 길을 걸었다. 7년 동안 세계를 순회하며 참부모님의 사랑을 전하였고, 1999년 6월 14일 ‘참부모님 천주승리 축하선포 표창패’를 받았다. 표창패에는 “하나님의 특명과 복귀섭리역사의 결실로 맺어진 본연의 하나님의 자녀이며 인류의 참된 어머니의 사명”을 가지고 이 땅에 오셔서 “하늘 앞에 참된 자녀의 사명, 남편 앞에 참된 부인의 사명, 그리고 자녀 앞에 참된 부모의 사명”을 완수하여 참부모로서 영원한 전통을 세우셨다는 내용이 담겼다. 천지인참어머님 1992년 세계적인 참부모 선포 이후 7년 뒤인 1999년 참아버님과 참부모로서 천주적 승리를 거두고 7년 뒤인 2006년 6월 13일 천주평화의 왕 참부모 입궁대관식을 거행하며 평화의 왕으로서 세계 앞에 설 수 있게 되었다. 2010년 6월 19일 하나님의 실체대상으로 참부모님이 최종 일체가 된 것을 선언한 가운데 참부모님 최종일체 완성·완결·완료를 선포하셨다. 2012년 참아버님 성화 이후 중단 없는 전진을 선포하고 하늘의 참아버님과 일체가 되어 2013년 1월 13일 천일국 기원절을 선포하였다. 이후 천일국 정착을 위해 참아버님과 일심·일체·일념·일화·일핵을 이룬 자리에서 천지인참부모님으로 천일국 섭리를 이끌고 있다. 천일국 3대 경전을 편찬하고 헌법을 제정하였으며, 인재 양성과 환경을 창조하며 하나님을 모시는 항구적인 평화세계를 실현해 나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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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학자선생말씀선집
한학자선생말씀선집 韓鶴子先生 말씀選集 항목체계 문헌 성격 변형 크라운판 발행/간행시기 2017.9.7 [정의] 참어머님의 말씀을 모아 발간한 선집. [내용] 참어머님의 말씀과 강연문을 모아 만든 말씀선집으로서 2017년 9월 7일 1-3권이 출판된 후 2017년도 이후의 말씀은 『참어머님말씀선집』으로 e-book 형태로 정리되고 있다. 참어머님은 1992년 세계평화여성연합 총재로서 공식적인 말씀 선포의 노정을 시작하여 전 세계를 순회하며 말씀을 전하였다. 유엔본부와 미국 국회의사당, 중국 인민대회당, 한국 국회 등 세계의 정치적 중심에서 세계평화와 여성의 역할에 대한 주제로 강연하였으며, 1993년에는 한국의 40개 대학과 미국의 주요 대학을 순회하며 젊은이들에게 참다운 가정의 가치와 삶의 지표를 알려 주었다. 1996년 세계평화통일연합 창설 이후에는 세계 185개국을 순회하면서 각국에 지부를 창설하는 등 참가정을 통한 평화세계의 실현을 위해 강연을 해왔다. 2012년 천력 7월 17일(양 9.3) 참아버님께서 성화하신 이후에는 말씀의 실체로서 천일국 기원절을 선포하고 세계적인 평화운동을 전면적으로 펼쳐 오고 있다. 참아버님의 말씀은 『문선명선생말씀선집』으로 묶어져 615권이 출판되었으나 참어머님 말씀은 말씀선집 형태로 출판되지 않다가 2017년 9월 7일 1-3권까지 묶어서 『한학자선생말씀선집』의 이름으로 출판되었다. 당시 출판된 책은 4권이었는데 제1권은 『참부모님을 중심한 하나의 세계』로 참어머님의 말씀을 주제별로 정선하여 수록하였고, 제2권 『이상가정과 평화세계 모델』과 제3권 『천일국과 우리의 사명』은 세계를 순회하며 전한 강연문을 정리한 것이다. 제4권은 참아버님께서 참어머님에 대해 하신 말씀과 증언, 편지와 시 등을 모아 『님이여, 피어나소서』라는 제목으로 정리하여 출판한 것이다. 제1권 『참부모님을 중심한 하나의 세계』는 7부로 구성되었고, 29개 주제에 350쪽 분량이다. 제1부 참부모로서의 한학자 총재 생애, 제2부 국가 복귀를 위한 세계 선교전략, 제3부 전통 전승과 상속, 제4부 세계평화 실현의 과제, 제5부 2세 교육과 미래인재 양성, 제6부 효정천원을 중심한 이상천국 모델, 제7부 천일국 안착을 위한 축복가정의 책임이다. 제2권 『이상가정과 평화세계 모델』은 30개의 강연문을 편집한 것이며 2부로 구성되었고, 30개의 주제들로써 342쪽 분량이다. 제1부 참사랑운동과 여성의 역할, 제2부 이상가정과 평화세계 모델로 나눠져 있다. 제3권은 『천일국과 우리의 사명』이다. 2부로 구성되었고, 29개 주제들로써 382쪽 분량이다. 제1부 평화세계로 향하는 길, 제2부 하나님과 인류의 희망 참부모로 나눠져 있다. 제4권 『님이여, 피어나소서』는 7부 24개의 장으로 편집되었고 342쪽 분량이다. 제1부 참어머님은 누구인가, 제2부 성혼과 하늘신부의 길, 제3부 광야노정과 참어머님의 승리, 제4부 여성시대 개막과 세계 순회, 제5부 참부모 선포와 청평 섭리, 제6부 최종일체 선언과 천일국시대, 제7부 참아버님의 서신이 수록되어 있다. 이후로 참어머님의 말씀은 『참어머님말씀선집』으로 e북으로 제작되어 ‘선학역사편찬원’ 홈페이지에서 제공되고 있다. 2017년 12월 31일 2017년 편, 2018년 5월 17일 2018년 편, 2019년 3월 27일 2019년 편, 2018년 12월 1일 ‘참어머님 축도’가 제작되었으며 후속의 말씀도 매년 제작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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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례
할례 割禮/ Circumcision 항목체계 사상교리 [정의] 성기의 일부를 절제하여 집단의 정체성을 부여하는 의례. [내용] 성기의 일부를 절제하는 의례로 과거에 세계 각지에서 행하여졌으나 현재에는 종교적인 의례로 남아 이슬람, 유대교를 비롯하여 오스트레일리아, 아프리카 원주민 일부에서 행해지고 있다. 신체의 일부를 손상시키는 통과의례로 특정 집단의 정체성을 부여하고 통합성을 주는 역할을 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남성의 경우 결혼 전 생리적인 이유 또는 사회 성원으로서의 자격부여 등을 위해 행해졌으며, 유대인은 생후 8일째 되는 날 하나님과 계약의 표징으로 행해졌다. 바울이 마음의 할례가 중요하다고 강조한 후 신체적 할례는 기독교의 종교의례로 행해지지는 않는다. 여성 할례는 소말리아, 기니, 지부티, 이집트 등에서 행해지고 있으나 국제사면위원회는 이를 금지할 것을 권하고 있어 여러 국가들에서 법적으로 금지되고 있다. 『원리강론』에서는 음란에 의해 인간이 타락했기 때문에 타락한 인간의 몸에서 악의 피를 성별하는 조건을 세우기 위해 할례를 하였다고 설명하면서 출애급기 4장 24-25절을 보면, 하나님이 나타나 모세를 죽이려 할 때 그의 처 십보라가 아들을 할례하여 성별함으로써 모세가 죽음을 면하게 되었다고 예를 들었다. 모세와 모세 가족은 물론 이스라엘 민족이 할례의 과정을 거쳐 애급에서 나오게 되었던 것이다. 유대 민족은 할례를 통해 선민의식을 공유하고 사탄을 분립하는 생활을 하였다. 그러나 바울은 로마서 2장 29절에서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라고 말하여 육신을 성별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사탄과 분립하여 마음으로부터 성별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에서는 할례의 전통이 없으며, 축복가정에 자녀가 태어나면 8일째 되는 날 자녀를 하나님의 자녀로 사랑하며 키우겠다는 성별의 의미로 봉헌식을 거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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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
함 Ham 항목체계 사상교리 [정의] 노아 가정을 중심한 복귀섭리를 실패하게 만든 노아의 둘째 아들. [내용] 노아의 둘째 아들로 홍수심판 후 노아가 포도주에 취해 장막 안에서 벌거벗고 자고 있는 것을 본 뒤 이를 다른 두 형제에게 알렸다. 셈과 야벳은 뒷걸음질을 쳐서 노아의 장막에 들어가 아버지의 벗은 몸을 보지 않고 옷으로 덮어 주었다. 노아는 잠에서 깨어 함이 한 일을 알고 그 후손들은 종이 될 것이라고 저주하였다. 『원리강론』에는 함의 행동이 왜 문제가 되었는지 메시아를 맞이하기 위한 기대의 관점에서 설명하고 있다. 노아는 방주를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제물로 바쳐 상징헌제에 성공하여 믿음의 기대를 탕감복귀하였다. 이러한 기대 위에서 노아의 아들 샘과 함이 아담 가정의 가인과 아벨의 입장에서 타락성을 벗기 위한 탕감조건을 세워 실체헌제를 성공해야 하였다. 이를 위해 먼저 함이 아벨과 같은 입장의 중심이 되어야 했는데, 노아가 방주로서 상징헌제를 올렸기 때문에 함은 상징헌제에 성공한 노아와 심정적으로 하나가 되어야 했다. 즉 노아가 상징헌제에 성공하여 창조본연의 세계에 있는 것과 같은 입장에서 벌거벗고도 부끄러움 없이 잠이 들었을 때, 함은 부친의 나체를 부끄러워하지 않고 노아의 심정에서 상황을 이해하려고 노력했어야 했다. 그러나 함은 노아의 행동에 대해 존경과 신뢰를 가지지 못하고 자신의 입장에서 부끄러워하고 다른 형제들에게 알려 함께 부끄러워하도록 하였으므로 죄를 짓고 말았다. 120년 동안 믿음으로 방주를 지은 아버지를 겸허한 자세로 순종하고 믿고 인내해야 했지만 그러지 못했기 때문에 노아 가정을 중심한 복귀섭리가 실패하게 되었다. ☞ ‘노아’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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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
함석헌 咸錫憲 항목체계 종교일반종교학 [정의] 독립운동과 민주화운동에 참여한 종교가이자 사상가. [내용] 1901년 평안북도 용천군 출신의 종교가, 사상가(1901-1989)이다. 당숙부 함일형(咸一亨)이 세운 삼천재(三遷齋)에서 한학을 공부하다가 1914년 덕일학교를 졸업하였다. 1916년 양시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같은 해 평양고등보통학교에 진학하였다. 그러나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이에 가담, 학업을 중단하였다가 1921년 정주(定州)의 오산학교 3학년에 편입하였는데, 여기서 안창호, 이승훈, 조만식 등으로부터 민족주의 사상의 영향을 받았다. 1923년 오산학교를 졸업한 뒤에 일본으로 건너가 1924년 동경고등사범학교(현재 츠쿠바대학교) 문과 1부에 입학, 1928년 졸업하였다. 재학 중에 일본인 무교회주의자 우치무라 간조(內村鑑三)의 영향으로 어떠한 종교적인 제도나 형식, 교리와 교회제도 등을 거부하였다. 당시 도쿄에서 함께 공부하며 뜻을 같이하는 김교신(金敎臣), 송두용(宋斗用), 정상훈(鄭相勳) 등과 함께 무교회주의자들의 동인지인 ‘성서조선(聖書朝鮮)’을 창간하는 데 참여하였다. ‘성서조선’은 조선에서 무교회적 기독교의 정체성을 주창했는데, 현실적인 욕망에서 해방되는 것이 중요하며 이를 ‘의(義)’라는 개념으로 설명했다. 1928년 4월 귀국하여 모교인 오산학교의 교사로 부임하였다가 1938년 3월 사임하였다. 1940년 송산(松山)에서 김혁(金赫)이 운영하던 송산학원을 경영하다가 계우회사건(鷄友會事件)에 연루되어 대동경찰서에서 1년간 옥살이를 했다. 1942년 일제가 ‘성서조선’ 3월호에 실린 글을 문제 삼아 폐간하고 발행인과 독자 수십 명이 체포되는 사건이 일어났으며, 이때 함석헌도 체포되어 또다시 1년 동안 서대문경찰서에서 미결수로 복역하였다. 이듬해 출옥하여 8·15광복 때까지 은둔생활을 하였다. 1947년 3월 단신으로 월남한 이후 종교단체에서 활동하였는데 퀘이커교도로서 각 학교와 YMCA에서 성경을 강론하였다. 1956년 남한에서 가장 영향력이 높았던 잡지 ‘사상계(思想界)’의 주필이 되었으며, 여기에 자신의 글을 발표하면서 정치적·사회적 문제들을 기탄없이 비판하였다. 1958년에는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라는 글로 자유당 독재정권을 통렬히 비판하여 투옥되었고, 1960년 이후 퀘이커교 한국 대표로서 종교활동도 활발하게 전개하였다. 1961년 5·16군사정변 직후에는 ‘5·16을 어떻게 볼까’로 군사 혁명정권에 도전하였다. 1962년 미 국무성 초청으로 방미하였을 때 퀘이커교와 친밀한 관계를 맺었다. 1967년 장준하(張俊河)의 국회의원 옥중출마를 지원하기도 하였다. 1970년 4월 「씨알의 소리」를 창간하였고, 민중운동을 전개하면서 반독재민주화운동에 전력했다. 1987년 제1회 인촌상(출판언론부문)을 수상하였으며, 1989년 2월 4일 지병으로 사망하였다. 2002년에는 건국훈장이 추서되었다. 주요 저서로는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1948), 『인간혁명』(1961), 『역사와 민족』(1964), 『뜻으로 본 한국역사』(1967), 『통일의 길』(1984) 등이 있다.
가정연합 대사전은 천일국학술원에서 제공합니다.
이 사전은 2019년까지의 내용을 수록하였고 섭리의 변화에 따라 항목을 추가할 예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