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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헬
라헬 항목체계 사상교리 [정의] 라반의 둘째 딸. [내용] 라반의 둘째 딸로서 야곱과 결혼하여 요셉과 베냐민을 낳았다. 형 에서를 피해 하란에 있는 외숙부 라반에게 온 야곱은 라반의 둘째 딸 라헬을 아내로 맞이하기를 원했다. 하지만 야곱을 계속 자신의 밑에서 일하게 하려는 라반의 속임으로 인해 라헬의 언니 레아와 먼저 결혼했다. 이후 야곱은 라헬도 아내로 맞이하게 되었고 레아와 라헬, 그리고 그들의 몸종 실바와 빌하에게서 총 13명의 자식을 얻었다. 레아와 실바, 빌하로부터 11명의 자식이 나오는 동안 라헬은 자식을 갖지 못하다가 마지막 두 명의 자식인 요셉과 베냐민을 낳았다.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은 복귀섭리에 있어서 장자권 복귀, 즉 사탄 편 장자가 하늘 편 차자에게 순종굴복하고 차자가 장자를 사랑으로 포용하여 하나 되어야 함을 강조한다. 이러한 장자권 복귀의 맥락이 레아와 라헬의 관계에도 적용된다. 레아와 라헬은 장녀와 차녀의 입장에서 서로 심정적으로 완전히 하나 되었어야 했지만 그러지 못하였기 때문에 차후에 극복해야 할 과제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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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러시아 Russia 항목체계 해외 [정의]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의 선교국. [내용] 공산국가 소련에서 1960년대부터 통일교회의 지하선교가 시작되었다. 공식적으로 1977년 샤 사사키(Sho Sasaki) 일본인 선교사가 소련에 갔다가 1978년 체포되어 추방되었다. 이후 1980년 톰 라우리타(Tom Laurita) 미국인 선교사가 파송되었으나 비밀경찰의 감시하에 활동하다 1999년 미국으로 돌아갔다. 1982년 군터 우르쩌, 1984년 피터와 캐서린 라드쉬텟터 부부, 1984년 칼 하인츠와 모니카 쿤데 부부, 1987년 베리와 바릴린 코헨 등이 활동하였다. 1990년 참부모님과 고르바초프와의 회담 후 소련이 붕괴되고 러시아 정부가 들어서면서 본격적으로 선교사가 파송되었다. 1992년 세계평화여성연합 모스크바 창설대회가 ‘세계평화와 여성의 역할’이라는 주제로 개최되었으며 이때에 외국에서 활동하고 있던 선교사들을 소련으로 파송하였다. 같은 해 소련연방의 새로운 종교법에 의해 러시아 통일교회가 최초로 법적으로 정식의 등록인가를 받았다. 1993년에는 모스크바 크렘린 대회당에서 7천여 명의 각계각층 지도자들이 모인 가운데 참어머님이 ‘참부모와 성약시대’라는 제목으로 강연하였다. 1999년 동북대륙 6개국 순회 중 참어머님이 모스크바 나탈리아 어린이회관에서 ‘인류가 살아가야 할 길’에 대해 설파하였다. 이후에도 수많은 대회를 개최하여 러시아 선교에 박차를 가하였다. 1992년 러시아에서 첫 축복가정이 탄생하였으며, 1995년 첫 축복식이 거행되었다. 1993년부터 러시아와 각 공화국 교육부의 지원을 받아 국제교육재단을 중심으로 러시아 재건을 위한 인성교육이 실시되었고, 이 프로그램은 몽골과 중국에서도 실시되었다. 또한 러시아와 각 공화국의 평화와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천주평화연합을 주축으로 평화대사들이 유엔과의 협력활동, 동북아 평화제의, 발틱 국가들과의 대화, 남코카서스 대화 제의, 유럽 국가들과의 대화 등 활동에 적극 참가하였다. 러시아 아스라카노프 의원의 후원으로 베링 해협터널 프로젝트를 위한 학술회의가 개최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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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유럽의 대화
러시아-유럽의 대화 러시아-유럽의 對話 / Russia-Europe dialogue 항목체계 해외 [정의] 천주평화연합의 주최로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러시아-유럽의 대화. [내용] 2012년 4월 참부모님의 지시에 따라 천주평화연합은 러시아-유럽의 대화를 모스크바에서 개최하였다. 같은 해 10월 비엔나에서 열린 2차 대화에서 러시아 외무부의 안바르 아지모프 대사가 러시아의 대유럽 외교정책에 대해 설명하였다. 이외에도 주 오스트리아 소련대사 세르게이 네차예프 박사, 러시아 과학원의 이리나 오르로바 박사, 러시아 인민회의 의장 세르게이 쿠친스키 박사 등이 참석해 러시아와 유럽의 평화와 번영에 대해 대화를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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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일전쟁
러일전쟁 露日戰爭 항목체계 종교일반종교학 [정의] 1904년-1905년 만주와 한국의 지배권을 두고 러시아와 일본 간에 벌어진 제국주의 전쟁. [내용] 청일전쟁 이후 가속화된 일본 제국주의의 북진정책과 부동항을 얻으려는 러시아 제국주의의 동진, 남하정책이 만주와 한국의 지배권을 두고 충돌한 가운데 1904년 2월 8일 일본의 뤼순(旅順)항 기습공격으로 시작되었다. 전쟁은 양측의 많은 사상자와 전력소모 및 혁명의 전운 등 러시아 국내 상황 악화, 대마도 해전에서의 일본의 승기로 전세가 일본 쪽으로 기울 때쯤에 제1차 영일동맹(英日同盟, 1902)에 의한 영국의 지원과 가쓰라-태프트 밀약(1905.7)을 맺은 미국이 일본 편에서 중재역할을 하며 1905년 9월 5일 포츠머스 강화조약을 맺음으로써 끝났다. 러시아와 일본의 전쟁이었지만 영일동맹과 미일협약, 러시아-프랑스 동맹이 그 배후에 있어서 러시아와 일본을 내세운 영미의 전쟁으로 보기도 한다. 러일전쟁은 영국의 인도 지배, 미국의 필리핀 지배와 일본의 조선과 만주지배를 서로 용인하며 동아시아의 정세를 변화시켰으며 제국주의 열강의 아시아 식민지 판도와 제1차 세계대전으로 가는 세력구도를 형성했다. 러일전쟁 과정에서 약소국인 한국은 제국주의 전쟁터가 되면서 큰 피해를 입었고, 전쟁의 결과로 일본이 한국과 남만주의 지배권을 확립하면서 대한제국의 국권 침탈 야욕을 가시화한 을사늑약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 ‘을사조약’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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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닌
레닌 항목체계 사상교리 [정의] 마르크스주의에 입각하여 볼셰비키를 이끌고 소연방을 건설한 사회 혁명가이자 사상가. [내용] 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Vladimir Il’ich Lenin, 1870-1924)의 본명은 블라디미르 일리치 울리야노프(Vladimir Il’ich Ul’yanov)로서 레닌이란 이름은 그가 혁명가로서 사용한 가명이다. 학생 때부터 마르크스주의에 심취하였고 반(反) 차르운동과 혁명운동에 가담하여 유형(流刑), 망명을 경험하였다. 비교적 온건한 사회주의 혁명을 주장한 멘셰비키와는 달리 레닌은 프롤레타리아가 주도하는 급진적 혁명을 주장하며 볼셰비키를 이끌었다. 1917년 2월 혁명 이후로 레닌은 “지금이야말로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일으켜 국가를 전복하고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확립할 시기”임을 소비에트 중앙위원들에게 피력하며 즉각적인 무장봉기를 주장하였다. 결국 ‘10월 혁명’을 통해 볼셰비키 1,000여 명으로 구성된 적위대가 당시의 케렌스키 임시정부를 무너뜨리고 소비에트 정부를 수립하면서 레닌이 초대의장으로 추대되었다. 그 후 레닌은 스탈린이 집권하기 전까지 약 7년간 소연방을 이끌다가 1924년 뇌일혈로 사망하였다. 마르크스주의를 제국주의시대의 이론으로 발전시켰으며, 특히 마르크스의 과학적사회주의 사상을 심화시킨 그의 이론은 레닌주의로 발전하였다. ☞ ‘마르크스’, ‘공산주의’, ‘레닌주의’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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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닌주의
레닌주의 레닌主義 항목체계 사상교리 [정의] 마르크스의 이론을 레닌이 해석하여 체계화한 공산주의 이론. [내용] 블라디미르 레닌(Vladimir Il’ich Lenin, 1870-1924)은 그의 사회주의 혁명을 완성하기 위하여 마르크스의 이론을 자신의 관점에서 재해석하고 보완하였다. 소비에트를 세워 완전한 공산주의 사회를 건설할 때까지 프롤레타리아의 독재 체제가 필요함을 역설하며 마르크스주의에서 국가 체제 및 권력의 양상을 강조하였다. 또한 자본주의 사회를 전복하기 위해서는 노동자의 파업만으론 부족하며 소수의 엘리트 혁명가 집단이 존재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마르크스주의에서 명확히 언급되지 않은 공유재산의 실현, 제국주의와 자본주의의 상관관계에 관련된 이론을 보완하였다. 마르크스가 변증법적 유물론에 있어서 역사에 초점을 두었다면, 레닌은 정치와 사회를 이루는 요소들의 관계에 초점을 두었다.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은 프랑스혁명의 사상적 기초였던 계몽주의로부터 마르크스주의와 레닌의 사상으로 이어지며 형성된 인생관을 가인형 인생관이라고 부른다. 가인형 인생관은 신을 배제한 채 역사와 전통을 타파하고 인생의 모든 것을 현실적으로만 판단하여 결국 사탄 편으로 돌아가는 길을 열어 주는 인생관을 가리킨다. 마르크스와 레닌에 의해 정초(定礎)된 과학적사회주의와 변증법적 유물론은 이러한 가인형 인생관을 대표하는 사상이다. ☞ ‘레닌’, ‘마르크스주의’, ‘가인형 인생관’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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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다
레다 Puerto Leda 항목체계 해외 [정의]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에 의해 개척이 진행되고 있는 남미 판타날에 위치한 지역. [내용] 참부모님에 의해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모델적인 공동체를 만드는 운동이 파라과이 판타날지역의 푸에르토 레다에서 전개되었다. 참부모님은 자르딘지역에 이어 볼리비아·파라과이·아르헨티나에 걸쳐 있는 그랜드차코지역 68만 헥타르(약 20억 평)의 땅을 매입하고, 그 중 레다지역의 개발에 정성을 쏟았다. 레다는 차코에서도 사람이 살아가기에 가장 힘든 황량한 땅으로서 소수 인디오 부족만이 어렵게 삶을 이어가고 있었다. 자르딘 40일 수련 후 참부모님의 지시에 따라 1999년 10월 1일 나카다 미노루을 포함한 14명으로 구성된 제1진이 레다에 도착하였고, 이후에 기술을 보유한 일본 선교사 102명이 추가로 들어왔다. 레다 개발을 위해 1차적으로 농장을 세워 미래의 인류를 위한 자원개발과 이상적인 공동체 건설을 제안했으며, 더불어 양식장을 만들어 인류의 식량문제를 해결하고자 하였다. 2013년 빠꾸 양식이 성공하면서 파라과이 페데리코 프랑코 당시의 대통령을 비롯해 정부의 지도자들이 다녀갔으며, 목축사업도 활발히 진행하였다. 병원과 학교 및 종합센터 등을 만들 계획을 세웠다. 레다는 인간이 정착해 생활할 수 있는 환경으로 서서히 변화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2000년부터 미국과 일본 대학생으로 구성된 청년자원봉사대가 오면서 인근 마을 주민들과 교류하고 학생들에게 교육을 지원하며 문화교육의 사업을 전개하였다. 2002년부터 세 개의 마을에 콘크리트와 벽돌로 학교를 만들어서 증정하였다. 그리고 수풀과 덤불로 뒤덮인 곳에 1만 주가량의 묘목을 심었다. 모범농장과 수산사업의 시설을 만들고 편의시설 등을 조성하며 자연과 화합하는 문화도시를 추진하고 있다. 레다지역 환경친화 개발사업이 한국에도 알려지면서 노무현 정부 때 이치범 환경부 장관이 시찰을 오기도 했다. 이상공동체 건설을 위해 레다 개척의 초창기부터 종사해 온 나카다 미노루, 우에야마 사다카즈, 사노 미치히토, 오와다 노리오를 중심으로 10여 명의 일본 식구들과 몇 십 명의 현지인이 레다 개척에 헌신적으로 공헌해 왔다. 2001년 4월 18일 참부모님은 레다의 개척지를 일양원(日陽園)이라고 명명해 주었다.
가정연합 대사전은 천일국학술원에서 제공합니다.
이 사전은 2019년까지의 내용을 수록하였고 섭리의 변화에 따라 항목을 추가할 예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