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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부모님 생애
나의 또 다른 이름은 ‘희생’
청파동 교회에서 처음으로 문 총재를 만났습니다. 교회는 판자를 두른 아담한 2층짜리 적산가옥이었는데, 교회라기 보다는 가정집에 가까웠습니다. 나는 문 총재에게 공손히 인사했습니다. 문 총재는 나에게 다짐을 받듯 말했습니다.“한학자, 앞으로 희생해야지!” “....네!”기차를 타고 돌아오면서 나는 ‘희생’이라는 말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보았습니다. 문 총재가 말하는 희생은 교과서에서 배운 희생과 분명 다를 것이었습니다. 더 높은 의미의 희생, 더 고결한 희생, 더 완전한 희생을 말하는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어떤 것을 희생하느냐도 중요하지만 무엇을 위해 희생하느냐가 더욱 중요할 것이었습니다. 그날 이후 ‘희생’은 내 마음 속 하나의 화두처럼 각인되었습니다. 훗날 생각해 보니 ‘희생’은 평화의 어머니로서 살아가야 할 나의 또 다른 이름이었습니다. (평화의 어머니 97-9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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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고행 끝에 찾은 뜻길
강원도 춘천에 발령이 난 외삼촌의 기별을 받고 춘천으로 이사한 어머니는 하얀 용이 품에 안기는 꿈을 꾸었습니다. 하얀 용이 누구를 의미하는지, 품에 안기는 것은 또 무엇을 뜻하는지 정확히 알 수 없었으나 조만간 큰일이 닥치리라는 예감이 들었습니다. 마침 성주교도인 정석천이 보낸 편지를 읽고 곧장 대구로 내려갔으나 만나지 못하고 아쉬운 마음으로 대구를 떠나려 할 때 또 꿈을 꾸었습니다. 황금용 한 쌍이 서울을 향해 엎드려 있는 꿈이었습니다. 어머니는 그 꿈을 가슴 깊이 새기고 서울로 올라와 한달음에 청파동 교회를 찾아갔습니다. 그곳에서 처음으로 문 총재를 뵙고 인사를 올렸습니다. 꿈에 나타나 하얀 용이 누구인지 궁금증이 풀렸습니다. 그때가 1955년 겨울 초입이었습니다. 30년 넘게 온갖 고행을 하며 꿈에 그리던 재림주님을 만나 더할 수 없이 감복했습니다. (평화의 어머니 90-9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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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생명을 앗아 간 푸른 섬광
“전쟁이 터졌대요!” “글쎄 북한군이 삼팔선을 밀고 내려왔답니다.”내가 열여덟 살 때 한국전쟁이 일어났습니다. 남한으로 내려와 그나마 생활이 조금 안정되는가 싶었는데 북한 인민군의 기습 남침으로 결국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육군본부에 근무하던 외삼촌은 전시 상황을 면밀히 지켜보다가 한강 인도교를 폭파한다는 정보를 접하고 가족들이 위험에 처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급히 차를 몰고 집으로 왔습니다. 외삼촌은 육군 장교였고 다리 통행증을 지니고 있었기에 스리쿼더의 경적을 울리며 피란민 사이를 헤치고 겨우겨우 한강 다리를 건넜습니다. 나는 어머니의 품에 안겨 손을 꼬옥 잡고 피란민들을 바라보았습니다. 처절한 공포와 혼란이 그들을 죽음으로 내몰고 있었습니다. 한강을 건너자마자 외삼촌이 소리쳤습니다.“옆으려요!” “꽝!”한강 인도교를 빠져나와 얼마 못 가 갑자기 뒤에서 ‘꽝’ 소리가 났습니다. 그 순간 푸른 섬광과 함께 굉음이 터졌습니다. 차를 급히 세우고 우리는 허겁지겁 내려서 길가 낮은 곳에 납작 엎드렸습니다. 얼른 보니 한강 다리가 폭파된 것이었습니다. 나는 어둠 속에서 그 불빛을 역력히 보았습니다. 그것은 마치 악마의 이글이글 불타오르는 눈빛과 같았습니다. 한강 다리를 건너오던 수많은 사람과 군인, 경찰들이 강물에 빠져 숨졌지만 우리는 다행이 목숨을 건졌습니다. 불과 몇 미터 차이로 생과 사가 갈리는 순간이었습니다. 나는 어린 나이임에도 전쟁의 참혹함을 직접 목격했으며, 난민 생활을 처절하게 겪었습니다. 순박한 사람들이 파리 목숨처럼 죽어 나갔고, 부모 잃은 아이들이 울부짖으며 거리 이곳저곳을 헤맸습니다. 여덟 살의 어린 소녀였지만 전쟁이라는 것은 지상에서 영원히 사라져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지금도 한강 다리를 건널 때면 그때의 푸른 섬광과 피란민들의 아비규환과 같았던 비명이 떠올라 가슴이 아파 옵니다. (평화의 어머니 82-8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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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팔선, 이승과 저승의 고빗길을 넘나들며
공산당이 점점 더 기승을 부리자 외할머니는 더 이상 이곳에서는 신앙생활은 물론 평범한 삶조차 이어가가기 어렵다고 판단해 남한으로 내려가는 것이 어떨까 많은 고심을 했습니다. 1948년 가을 어느 날, 한밤중에 어머니는 나를 업고 외할머니는 보따리 두어 개를 들고 집을 나섰습니다. 안주에서 삼팔선까지 직선거리로 200킬로미터나 되는 먼 길이었습니다. 몇 날 며칠을 걸어서 내려와야만 했습니다. 가까스로 삼팔선 인근에 다다랐지만 나와 어머니, 외할머니는 삼엄하게 경비를 서고 있던 북한 인민군에게 덜컥 붙잡혔습니다. 그들은 우리를 빈집 헛간에 가뒀습니다. 그곳에는 이미 잡혀 온 여러 사람이 겁에 질려 있었습니다. 하루는 한 어른이 보초를 서던 인민군들에게 먹을 것을 가져다주라고 나에게 심부름을 시켰습니다. 나는 떨리는 마음을 억누르고 미소를 지으며 먹을거리를 인민군에게 건넸습니다. 그렇게 몇 차례 하니 저들의 마음이 누그러졌습니다. 어느 날 밤 인민군들이 고향으로 돌아가라면서 우리 세 모녀를 풀어주었습니다. 하늘의 보살핌이 생사의 기로에서 삶의 길로 인도한 것입니다. 남한에서도 경비가 삼엄했습니다. 그 사실을 까마득히 모르는 나는 즐거운 마음에 노래를 몇 소절 불렀습니다. 그때 우리 앞의 나무덤불에서 부스럭 소리가 났습니다. 우리는 깜짝 놀라 그 자리에 얼어붙었습니다. 인민군에게 또 붙잡히는 것은 아닌지 두려움이 몰려왔습니다. 그런데 덤불을 헤치고 나타난 것은 남한 군인이었습니다. 그를 보는 순간 우리는 동시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총을 든 군인들은 인기척을 느끼고 방아쇠를 당겨 총을 쏘려다가 어린아이의 맑은 노랫소리를 듣고 총부리를 거뒀습니다. 그때 내가 만약 노래를 부르지 않았다면 북한 인민군으로 오해받아 그 자리에서 총탄에 맞아 목숨을 잃었을 것입니다. 하늘은 이렇듯 애틋하게 우리를 보호해 주셨습니다. (평화의 어머니 76-8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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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우주의 조화로 태어난 우리
우리는 누구라도 자신의 탄생에 대해 깊이 감사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 세상에 태어나는 사람 가운데 무의미하게 태어나는 사람은 없습니다. 또한 한 사람의 삶은 그 한 사람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한 사람이 태어나기 위해서는 하늘과 땅, 모든 우주만상이 씨줄과 날줄로 얽혀야 합니다. 온 세계의, 나아가 온 우주의 기운이 조화를 이뤄야 합니다. 그러므로 누구라도 자신을 하찮게 여겨서는 안 되며, 우주의 성스러운 작용으로 태어난 귀한 존재임을 마음속 깊이 깨달아야 합니다. 인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섭리 역사가 지속되는 가운데 나는 6천년 만에 이 땅에 왔습니다. 그 노정은 인류 역사에서 가장 길고 파란만장했습니다. 수많은 사람이 우주의 어머니이자 독생녀의 현현을 간절히 고대해 왔습니다. 누구나 평화로운 세상에서 살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평화란 누구나 간구하면서도 그렇게 쉽게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평화를 얻기 위해서는 그에 버금가는 희생과 헌신이 있어야 했습니다. (평화의 어머니 65-6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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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근본 된 아버지이신 하나님
어머니는 기도하듯 힘을 실어 ‘주님의 귀한 따님’이라고 나에게 말씀해 주시곤 했습니다. 이는 외동딸인 나를 향한 평생의 기도 제목이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나는 하나님의 딸, 주님의 딸이라는 자긍심을 갖고 무럭무럭 자라났습니다. 외할머니 역시 내 눈을 들여다보며 또박또박 말씀해주셨습니다. “하나님이 너의 아버지시다” 그래서 ‘아버지’라 하면 육친의 아버지를 생각하지 않고 항상 하늘 아버지를 생각했기 때문에 나는 하나님이란 단어만 떠올려도 마음이 푸근하고 정겨웠습니다. 사춘기를 보내면서도 인생을 놓고 고민한다거나, 아버지에게 서운한 마음을 갖는다고나, 가난을 탓한다거나 하는 일은 전혀 없었습니다. 나의 근본 된 아버지이신 하나님이 늘 내곁에 함께 계시고 항상 돌봐 주셨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은 내가 태어날 때부터 선천적인 부모였습니다. (평화의 어머니 5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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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다면 하는 하루울이 고집쟁이
어릴 적 내 별명은 ‘하루울이’입니다. 한번 울기 시작하면 온종일 울어야 끝이 나서 붙여진 별명입니다. 한번 울음을 터뜨리면 무슨 큰일이나 난 것처럼 크게 울어 잠자던 사람들이 다 깨어 나와봐야 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가만히 앉아서 운 것도 아닙니다. 방 안을 훌떡훌떡 뛰면서 난리를 쳐대 온 몸에 상처가 나고 살이 터져 방 안을 피투성이로 만들 정도로 울어댔습니니다. 어려서부터 그렇게 성질이 지독한 데가 있었습니다. 한번 맘을 정하면 절대 양보를 안 했습니다. 뼈가 부러져도 양보를 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철이 들기 전의 일입니다. 고집이 센 만큼 승부욕도 강해 어떤 일이든 지고는 못 살았습니다. 오죽하면 “오산집 쪼끔눈이. 그놈, 한번 한다면 하는 놈이다”라고 동네 어른들이 다 인정할 정도였습니다. 또래 아이들보다 훨씬 덩치도 크고 힘도 장사여서 동네에서 팔씨름으로 나를 당할 자가 없었습니다. 나보다 세 살 더 많은 녀석한테 씨름에서 진 적이 있었는데 도통 분해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매일 밤 산에 올라가 아카시아 나무껍질을 벗기며 힘을 길러서는 여섯 달 만에 그 녀석을 이겨버렸습니다. (평화를 사랑하는 세계인으로 p.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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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와 어머니를 닮아나
아버지는 돈을 빌려주고 떼일 줄은 알아도 받아올 줄은 모르는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빚을 얻어 쓰고서 갚기로 한 약속은 소를 팔고 집안 기둥을 뽑아 팔아서라도 반드시 지키는 분이었습니다. 아버지는 늘 “작은 꾀로 진리를 움직이지 못한다. 참이란 작은 꾀의 지배를 받지 않는다. 꾀로 이룬 것은 몇 년 못 가 드러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풍채가 좋으셨던 아버지는 볏섬을 지고 층계를 성큼성큼 올라가실 만큼 힘이 장사였습니다. 내가 아흔 살이 되도록 세계를 돌아다니며 활동할 수 있는 것은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체력 덕분입니다. 찬송가 중에서 ‘저 높은 곳을 향하여’를 즐겨 부르시던 어머니도 대단한 여장부셨습니다. 이마랑 머리가 두리두리하셨던 모습만이 아니라 곧고 괄괄한 성격도 그대로 닮아 나 또한 고집이 대단하니 그 어머니에 그 아들인 셈입니다. (평화를 사랑하는 세계인으로 p.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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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래강 전설
어머니의 고향인 정주에는 달래강 다리가 있었습니다. 커다란 돌을 차곡차곡 쌓아 만든 튼튼한 다리였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낡고 허물어져 건너다니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먹고사는 일에 바빠 그냥 방치해 두었습니다. 그러자 홍수에 휩쓸리고 모래더미가 밀려와 강바닥에 묻혀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예전부터 전해 내려오는 예언이 있었습니다. 달래강 다리에 바위를 깎아서 세워 놓은 장승 표석이 묻히는 날에는 나라가 없어지고, 드러나는 날에는 조선 땅에 신천지가 펼쳐지리라.중국 사신이 두만강을 건너와 한양으로 가려면 달래강을 건너야 하는데 다리가 망가져 건널 방도가 마땅치 않았습니다. 나라에 돈이 없어 다리 놓아 줄 사람을 찾기 위해 방을 붙였습니다. 그때 조한준 할아버지가 가진 재산을 전부 털어 돌다리를 새로 놓았습니다. 네모난 돌을 빈틈없이 쌓아 튼튼하게 올리고 그 밑으로는 배가 지나다닐 수 있을 만큼 널찍하게 만들었습니다. 조한준 할아버지는 다리를 새로 만드는 데 전 재산을 다 쓰고 엽전 세 푼을 남겨 놓았습니다. 다음날 다리 준공식에 신고 갈 짚신을 사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날 밤, 꿈에 하얀 옷을 입은 할아버지가 나타나 말했습니다. “한준아, 네 공이 크구나, 그래서 너희 가문에 천자를 보내려 했는데 남겨 놓은 엽전 세 푼이 하늘에 걸려 공주를 보내겠노라.”꿈에서 깨어나 의아한 생각이 들어 달래강에 가보니, 언덕 위에 이제까지 없던 돌미륵불이 생겨나 있었습니다. 그 미륵이 얼마나 영엄했으면, 누구든지 말을 타고 그 앞을 그냥 지나가지 못했습니다. 말에서 내려 절을 하고 나서야 갈 수 있었습니다. 동네 사람들은 별 신기한 일이 다 있다면, 경건한 마음으로 그 위에 집을 지어 돌미륵이 비바람을 맞지 않도록 했습니다. 이렇듯 충정 어린 조한준 가문을 통해 하늘은 신앙심 깊은 조원모 외할머니를 보내셨고, 그리고 그분에게서 신앙심이 더욱 깊은 홍순애 어머니가 탄생했습니다. 한반도에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독생녀를 탄생시키기 위한 하늘의 섭리와 정성이 그 옛날 조한준 선조로부터 시작되어 나에게까지 면면히 이어져 내려왔습니다. (평화의 어머니 54-5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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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드시 광명한 아침이 올지니
내가 일고여덟 살쯤의 일입니다. 윤국 할아버지가 잠시 우리 집에 머물러 계신 것을 알고 독립군들이 찾아온 적이 있었습니다. 독립자금이 부족해 도움을 요청하려고 눈이 쏟아지는 밤길을 걸어온 것이었습니다. 아버지는 잠든 우리 형제들이 깰세라 우리 얼굴을 이불로 덮으셨습니다. 이미 잠이 달아나버린 나는 이불 속에서 두 눈을 말똥말똥 뜨고 누워 어른들이 나누는 이야기 소리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어머니는 그 밤중에 닭을 잡고 국수를 삶아 독립군들을 대접했습니다.아버지가 덮어씌운 이불 밑에서 숨을 죽인 채 듣던 윤국 할아버지의 말씀은 지금도 귓전에 생생히 남아있습니다. 할아버지는 “죽어도 나라를 위해 죽으면 복되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지금 눈앞에 보이는 것은 암흑이지만, 반드시 광명한 아침이 온다”라는 이야기도 하셨습니다. 고문의 후유증으로 늘 몸이 불편하셨지만 목소리만은 쩌렁쩌렁하셨지요. ‘저렇게 훌륭한 할아버지가 왜 감옥에 가야 하나? 일본보다 우리가 더 힘이 세면 그런 일이 없을 텐데…’ 하며 안타까워하던 심정도 잊히지 않습니다. (평화를 사랑하는 세계인으로 p.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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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의 분명한 나침반
우리 본관은 전라도 나주 옆에 있는 남평입니다. 문정흘文禎紇 증조할아버지는 문성학文成學 고조할아버지가 낳으신 3형제 중 셋째 아드님이셨습니다. 그 증조할아버지가 또 치국致國, 신국信國, 윤국潤國의 3형제를 낳으셨는데 우리 할아버지가 맏이셨습니다. 할아버지는 무조건 베풀며 살라는 증조할아버지의 유언을 잘 따르셨습니다만, 재산을 지키지는 못하셨습니다. 셋째인 윤국 작은할아버지가 집안 재산을 저당 잡혀 몽땅 날리셨기 때문입니다. 그 후 집안 식구들의 고생은 이만저만이 아니었지만, 우리 할아버지나 아버지는 한번도 윤국 할아버지를 원망하지 않으셨습니다. 윤국 할아버지가 노름하느라 재산을 없앤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윤국 할아버지가 저당을 잡혀가며 빌린 돈은 모두 상하이 임시정부로 전해졌습니다. 당시 7만 원이면 상당히 큰돈이었는데 윤국 할아버지는 그 돈을 독립운동 자금으로 털어넣으셨습니다. 윤국 할아버지는 평양신학교를 졸업한 목사로 영어와 한학에 능한 인텔리였습니다. 덕언면의 덕흥교회를 비롯해서 세 군데 교회의 담임목사를 지낸 윤국 할아버지는 최남선 선생 등과 더불어 기미독립선언문을 기안했지만, 기독교 대표 16인 중에 덕흥교회 사람이 셋이나 되자 민족대표 자리에서 스스로 물러나셨습니다. 그러자 오산학교 설립에 뜻을 같이 했던 남강 이승훈 선생은 윤국 할아버지의 두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며 만약의 경우 거사에 실패하면 후사를 맡아달라고 당부했다고 합니다. (평화를 사랑하는 세계인으로 p.2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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옳다 생각한 일에는 물러섬이 없이
삼촌 중에 욕심 많은 이가 한 분 있었습니다. 동네 한복판에 삼촌네 참외밭이 있었는데 여름이면 달콤한 냄새 때문에 밭을 지나던 동네 아이들이 안달을 했습니다. 그런데도 삼촌은 길가의 원두막을 지키고 앉아 참외를 한 개도 나눠주지 않았습니다. 하루는 내가 “삼촌, 내가 언제 한번 참외를 원 없이 가져다 먹어도 되지요?” 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삼촌은 “그럼, 그렇고말고” 하고 선선히 대답했습니다. 나는 “참외 먹고 싶은 애들은 포댓자루 하나씩 들고 밤 열두 시에 우리 집 앞으로 모두 모여라!” 하고는 아이들을 불러모았습니다. 그러고는 삼촌네 참외밭으로 몰려가서 “너희들 마음대로 아무 걱정 말고 한 고랑씩 다 따라”고 했습니다. 아이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참외밭으로 뛰어들어가 순식간에 참외 몇 고랑을 모조리 따버렸습니다. 그날 밤 배고픈 동네 아이들은 싸리밭에 앉아 참외를 배가 터지도록 먹었습니다.이튿날 삼촌네는 난리가 났습니다. 벌집을 쑤셔놓은 듯한 삼촌 댁을 찾아갔더니, 삼촌은 나를 보자마자 “이놈, 네가 한 짓이냐? 참외농사를 헛수고로 만든 게 바로 네놈이란 말이냐?” 하며 펄펄 뛰셨습니다. 나는 삼촌이 뭐라고 야단을 쳐도 기죽지 않고, “삼촌, 원 없이 먹어도 된다고 하셨잖아요. 동네 아이들이 참외를 먹고 싶어하는 그 마음이 바로 내 마음이에요. 먹고 싶어하는 아이들한테 참외 한 개씩 나눠줘야겠어요, 절대로 안 줘야겠어요?” 하고 따져 물었습니다. 그러자 화가 나서 펄펄 뛰던 삼촌도 “그래, 네가 옳다” 하며 물러서고 말았습니다. (평화를 사랑하는 세계인으로 p.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