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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대화, 만남과 사랑의 증언
성혼초기 고난과 승리성혼하시고 3일 만에 한국의 전통에 따라 앞치마를 두르시고 춥고 연탄가스 냄새가 나는 재래식 부엌으로 내려오셔서 참아버님을 위해 직접 음식을 만드셨다. 익숙한 주부도 조리 장소가 바뀌면 어색한데, 참어머님은 매일 사용하고 있던 부엌같이 당당하게 칼을 잡으시고 음식을 해내시는데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 기억하기에 닭도리탕과 감자 고로케였다. 단조롭고 담백하고 짜고 맵게 드시는 참아버님의 식성과 식단을 대폭 개량하여 폭넓은 식단을 참어머님께서 마련해주셨다. 식사를 모시면서 제일 어려웠던 식단 짜는 것을 참어머님과 의논하고 지시를 받아 하게 되니 나에게는 참으로 감사한 일이었다.그런데 차차로 참아버님께서는 식구들을 생각하시어 진짓상을 혼자 받으시고 참어머님께서는 아버님께서 물리신 상을 받아 쟁반 위에서 그것도 좁은 부엌 방에서 드셔야 했다. 그 방은 안방에서 화장실로 가는 통로이기도 했다. 그 비좁은 곳에서 쪼그리고 앉아 짧은 시간 내에 급히 드셔야 했다. 기다리시느라 얼마나 시장하셨을까? 지금 생각하면 죄송스러워 눈물이 난다. 이러한 참어머님의 내적인 사정을 헤아리지 못하는 식구들은 참어머님께 자비로움과 사랑의 미소를 기대하고 있었고, 이것을 잘 아시는 참어머님은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모든 일을 침착하게 훌륭히 잘 소화해내셨다. (참사랑의 승리자 참어머님, 259-260쪽)※ 정대화(鄭大和): 1955년 2월 1일 이화여대 재학중 입교하여 신앙문제로 다른 동료학생 14명과 함께 퇴학당했다. 1960년 4월 16일 김영휘 영국 국가메시아와 3가정 축복을 받아 김영휘 회장이 2,4,6대 협회장을 재직하고 유럽에서 특별순회사로 활동할 때 내조하였다. 1970년대에 전국축복가정부인회 회장직과 세계평화여성연합 한국회장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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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홍, 만남과 사랑의 증언
어린양 잔치1960년 음 3월 16일 그 날은 천주가 승리의 환희로써 들썩들썩 쾅쾅 춤을 춘다. 인류역사 후로 천지가 뒤집어지는 이 날이 예고하신 하나님 뜻 말씀인 어린양 잔치다. 17세 아직 연소하신 마치 한 송이 연꽃 같으신 분이 참어머님 보좌로 입문하셨다. 우주가 축하와 찬양을 해야 할 이 날이었건만, 조촐한 청파동 통일교회가 어린양의 존재를 선포하는 대경사의 장소가 되었다. 이 시간부터 이북에서 하늘이 내리신 계시가 실지실상의 영광의 자리에 정좌하심으로써 실현되었다. 이 얼마나 영광스런 날이었던가! 감히 나 부족한 사람도 시대적 혜택권에서 살게 되어 이 엄숙한 거룩한 자리에 참여하게 되었다. (참사랑의 승리자 참어머님, 204쪽)※ 강의홍(姜義弘): 일제 하 독립운동을 하고 해방 이후 제헌국회의원을 지낸 강희찬 씨의 자녀로 1954년 남편 김상철 선교사와 함께 전북 군산에서 입교하여 36가정으로 축복을 받았다.1959년부터 미국 선교사로서 오레곤, 유타, 샌프란시스코 교회를 개척한 김상철 통일신학대학원(UTS) 전총장을 따라 1967년 미국에 이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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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생련, 만남과 사랑의 증언
청아하신 아름다움가약식(佳約式)에 나오신 어머님은 어리신 나이에도 매우 신중하셨다. 하늘 섭리 길의 첫발을 내디디시는 어머님의 모습에는 하늘이 6천년 복귀섭리를 통해 준비해 놓으신 우주의 어머니로서의 품위가 배어 나왔다. 난 그런 어머님의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내 기도를 들어주신 것 같아 너무 흐뭇했다. 어머님은 이날 ‘봄이 오면 산에 들에 진달래 피네. 진달래 피는 곳에 내 마음도 피어…’를 부르셨는데, 목소리가 옥처럼 맑고 청아했다. 아버님은 지금도 어머님께 이 노래를 가끔 부르라고 하시는데, 아마 나처럼 그때의 청아하신 아름다움을 기억하시기 때문이리라. (참사랑의 승리자 참어머님, 240쪽)※ 지생련(池生蓮): 이화여대 법학정치 4년 재학중 학교측이 통일교신앙을 하는 이유로 신앙과 학교를 선택하라는 부당한 조치에, 공부를 포기하고 신앙을 선택했다. 1961년 이기석 씨와 36가정으로 축복을 받고 문선명 선생의 말씀에 따라 1977년 미국 샌프란시스코로 건너왔다. 전국 특별순회사로 활동하던 지 여사는 미국에서 進兒한국학교 이사장겸 교장으로 20년 동안 미국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한국어와 문화를 교육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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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순애 대모님, 만남과 사랑의 증언
참어머님 탄생어머니는 1943년 정월 초엿샛날 새벽 4시 30분에 탄생하셨다. 다른 아이들은 태어나자마자 “응아” 하고 우는데, 어머니는 우시지 않고 “랄라랄라” 그러셨다. 그래서 할머니가 “이 처녀는 커서 음악가가 되려나 보다”고 말씀하셨다.첫 미역국을 먹고 어머니를 안고 잠이 들었는데, 서커먼 뿔난 사탄이 다가와서는 어머니를 죽이려고 하였다. 나는 “사탄아! 물러가라. 이 딸이 내게 얼마나 중한 딸인데 네가 무어길래 죽이려고 하느냐?”고 소리를 질렀다. 얼마나 크게 소리를 질렀는지, 어머니께서 “야, 네가 속이 허한가 보다”라고 하셨다. “그런 것이 아니고 뿔이 난 사탄이 와서 아기를 죽이려고 하길래 제가 소리를 쳤습니다”라고 하니 “거 이상하다”고 하셨다.세상에 태어나자마자 사탄이 죽이려고 하는 것을 보니 이상했다. 그리고 “이 아기는 정성을 들여서 키우지 않으면 안 되겠다. 앞으로 세속에 물들지 않게 깨끗하고 아름답게 길러서 주님께 바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한 달쯤 되니 몽시에 주님이 하얀 구름을 타고 흰옷을 입고 나타나시더니 “순애야, 그 아기를 위해서 걱정했지? 걱정하지 마라. 이 아기는 주님의 딸이고 너는 유모와 같다. 젖만 잘 먹여서 양육하라”고 말씀하셨다. 그 명령을 나는 지금까지 마음에 단단히 새기고 살았다. (참사랑의 승리자 참어머님, 193-194쪽)※ 홍순애(洪順愛) 대모님: 1914년 2월 22일 평안북도 정주에서 출생하여, 어머니인 조원모 여사와 함께 독실한 기독교신앙생활을 했다. 1933년 초등학교 교사를 하던 한승운 선생과 결혼하여 10년 뒤 한학자 총재를 무남독녀로 출산한다. 이후 1951년 1월 14일 월남하여 1956년 입교한 뒤 94년 11월7일 소천할 때까지 기도와 정성으로 신앙생활의 본을 보여주었다. 문선명 선생은 홍순애 여사를 대모(大母)라는 이름을 내려주시어 통일가에서 신앙의 푯대로 세워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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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승룡(文昇龍), 향수4
참아버님의 친형 문용수(文龍壽) 대형님큰집의 우환참아버님의 둘째 누님께서 시집을 갔는데 정신이상이 돼 충모님께서 고향으로 데려오셨다. 원리적으로 보면 잡령이 든 것이다. 정신을 못 차리고 몸을 가누지도 못하고 어떤 때는 치마를 벗어던지기도 했다. 그래서 큰집에서는 잡령을 내쫓는다고 무당을 데려다가 굿을 하고 경 읽는 사람들을 불러와 경도 읽었다. 누님은 여자라서 힘이 약해 붙들어 앉혀 놓고 경을 읽었는데 차츰 나아져 시댁으로 돌아갔다.그런데 누님에게서 떨어져 나온 영이 참아버님의 형님인 문용수 대형님께 붙어 정신이상이 됐다. 대형님께서는 처음 발작했을 때, 식칼을 들고 지붕 꼭대기에 올라 예수쟁이들 다 죽인다며 지붕 위를 왔다갔다하셨다. 일요일이었는데 우리 아버지가 교회에서 돌아오다가 그걸 보고 “야, 용수야. 너 왜 그러느냐?”고 하니까 “아주머니, 예수 믿는 사람 다 죽일 겁니다.”고 했다. 그래서 아버지가 “야, 내려오너라. 죽이는 것은 나중에 하고 우선 내려와야 되지 않겠느냐?”고 하니까 “아주머니가 나한테 절하지 않으면 안 내려갑니다.”고 했다. 내가 그 장소에 있었는데 사탄이 예수보고 절하라는 소리와 마찬가지였다. “그럼 내려와라. 내려오면 절 할 테니까.”라고 하셨는데도 “아니, 절해야지, 절 안 하면 안 내려갑니다.”고 해 우리 아버지가 절을 하는 척 흉내만 내고 “자, 절을 한 것이니까 내려오너라.”고 하니까 후다닥 뛰어 내려왔다.대형님께서는 후딱 뛰면 지붕 위로 올라가시고 후딱 뛰면 담을 넘어가셨다. 우리 집 옆 대장간에서 수갑 같은 쇠고랑을 사 왔다. 그래서 지붕 위에서 뛰어 내려오는 대형님을 힘이 센 경익 숙부가 붙잡아 쇠고랑을 채워 방에 가뒀다. 대형님을 당해낼 사람이 아무도 없었는데 숙부한테는 꼼짝을 못해 숙부가 대형님 방에서 지키셨다. 그러다 숙부가 잠든 사이 대형님께서는 손발을 묶어놓은 고랑을 풀고 돌아다니지 않는 데가 없었다. 그래서 삼을 꼬아 만든 참밧줄로 움직이지 못하게 동여맸다. 밥을 떠먹여 주거나 경을 읽을 때나 잠을 잘 때도 줄에 묶여 있었다. 경을 읽는 사람은 장님이 많은데, 그때는 장님이 했는지 눈 뜬 사람이 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대형님께서는 경 읽는 사람에게 가래침도 뱉었지만 그 사람은 신경 안 쓰고 경만 읽었다. 그런데 경 읽는 사람이 잠깐 눈을 붙인 사이 대형님께서 참밧줄을 이로 끊고 물고 잡아당겨 이가 다 나간 채로 도망가신 적도 있다.또 한 번은 숙부가 참밧줄로 묶은 대형님을 안고 주무셨는데 대형님께서 없어지셨다. 온 마을을 찾아 돌아다녔는데 곡식밭에서도 쑥 나오고 숨어 있다가 지나가는 사람에게 확 덤벼들기도 하셨다. 도망가면서 팬티만 입고 도망가기도 했다가 우물 위에 서 있기도 하셨다. 대형님께서 장가든 후 여름에 벌어진 일이다. (님따라 뜻따라 13~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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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승룡(文昇龍), 향수3
참아버님의 종조부 문윤국(文潤國) 목사종조부 문윤국 할아버지와 아버지 문경천 장로문윤국 종조부께서는 평양신학교를 11기생으로 졸업하시고 고향에 돌아와 목사 생활을 하셨다. 작은할아버지께서는 양봉을 해 ‘벌이 목사’라고도 불렸다. 그러다가 금광을 한다며 고향을 떠나 강원도로 가셨다. 금광 한다고 말만 들었지 가서 본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고향에서는 아무도 몰랐다. 심지어 금광 한다며 왔다갔다하는 것을 보고 정신이 나간 영감이라고 했다. 금광 한다는 사람들은 대개 외도하고 외박하는 사람들이어서 누가 인정해 주지 않던 시대였다.큰집에서는 종조부가 금광을 한다면서 돈을 빌려 달라니까 큰집 재산도 줬지만 보증도 많이 섰다고 했다. 독립운동을 했다는 것은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다.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인 이명룡 장로네가 괜찮게 살아 그 집 돈을 빌릴 때도 큰집에서 보증을 섰다고 한다. 예전에는 우리 큰집도 괜찮게 살았다.우리 할아버지께서는 문경 어딘가에서 살다 돌아가셨다. 그래서 밀양 박씨였던 할머니는 자식들을 데리고 상사리로 들어와 사셨다. 큰할아버지께서 큰집 옆에 새로 집을 지어 주셨기 때문에 사람들은 우리 집을 ‘새집’이라고 했다.기독교가 우리나라에 처음 들어올 때, 평양으로는 장로교가 들어오고 서울로는 감리교가 들어왔다고 한다. 할머니께서는 장로교가 평양에서 정주를 거쳐 선천과 신의주로 들어갈 무렵부터 믿기 시작했다고 했다. 동네에서는 “저 과부댁이 바람났다.”고 많이 비난했다고 한다. 그 후 우리 할머니는 예수님을 믿게 되었는데 할아버지께서는 교회에 다니지 않으셨다. 하지만 우리 아버지가 장로가 되었고 어머니와 은균 형님, 경익 셋째 숙부도 집사가 됐다. 아버지는 경훈, 경익 숙부보다 신앙심이 더 두터우셨다. 할머니께서는 예수님을 믿다가 내가 서너 살 될 무렵 돌아가셨다.문윤국 작은할아버지는 우리 할머니가 예수님을 믿은 후 믿었던 것 같고, 내가 열 살 무렵에 목사가 되셨다. 큰집은 교회를 다니지 않다가 집안에 문제가 생기면서 예수님을 믿기 시작했다.우리 아버지 문경천 장로는 상사리에서 어려운 문제들을 잘 해결해 어른 노릇을 하셨다. 동네 청년들끼리 서로 싸우다가도 해결이 안 나면 “새집 아주머니한테 가서 재판하자.”고 하면서 찾아왔다. 이북에서는 아저씨를 아주머니라고 불렀다. 밤에 싸우는 경우에도 재판 좀 해 달라고 찾아왔다. “그래, 이놈들 싸우긴 왜 싸우나? 이야기해 봐라.”고 해 그들의 말을 듣고 “이것은 이러하고 저것은 저러하다.”라면서 재판을 해주면 저희들끼리 화해하고 돌아갔다.또 바른 이야기를 잘해 동네에서 인정받는 영감이었다. 동네뿐만 아니라 면에서도 아버지를 아는 사람들은 그렇게 대했다고 한다. 아버지는 공부를 많이 한 분도 아니셨는데 그렇게 사셨다. (님따라 뜻따라 12~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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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승룡(文昇龍), 향수 2
큰집우리 집 옆에 큰집인 참아버님댁이 있었는데 앞채와 옆채가 기와이고 안채는 따뜻한 초가였다. 그 옆집이 참아버님의 사촌이자 내게는 육촌 되는 용선 형님댁이었고 그 뒷집에 이처범, 이처규 형제가 살았다. 집 담장 밖에는 큰 밤나무가 있었다. 또 노가지나무(노간주나무의 방언)가 참아버님댁과 용선 형님댁을 한 집처럼 에워싸고 있었다. 우리 집도 나란히 있어 서로 옆문을 통해 들락날락할 수 있었다.우리 큰집에서는 큰어머니인 김경계 충모님의 주장이 제일 강했다. 큰할아버지는 며느리보고 이래라저래라하지 않으셨다. 충모님께서 참아버님을 잉태했을 때 용꿈을 꾸었다는 이야기를 그때는 들어 보지 못했는데 남한에 나와 문용기 장로가 그런 이야기를 잘해 알게 됐다. 노가지나무 이야기도 여기 와 들었는데 나는 ‘그런 이야기가 있었나?’ 하는 정도다.문경유 큰아버지는 학자처럼 걱정이 없는 분처럼 보였으며, 누구와도 대인관계를 잘하지 못했다. 그래서 부부싸움이라는 것을 모르고 사셨다. 누구를 비판한다거나 아이들에게 매를 들지 않으셨다. 혼자서 새끼를 꼬고 짚신을 삼으며 시간을 보내셨다.참아버님집 앞에 문경구 숙부님이 살고 있었는데 재앙이 자꾸 생겨 집을 헐게 됐다. 내가 열다섯 살 때쯤 소가 죽고 말이 죽고 돼지가 4마리 죽고 강아지가 아기의 귀를 잘라먹고 절구통의 절구 봉이 넘어져 개 허리를 부러뜨리는 우환이 일어났다. 사람들이 밤나무로 집을 지어서 그런 일이 생겼다고 해 집을 헐게 됐다. 집은 보통 소나무로 짓는다. 밤나무집은 소나무집보다 두세 배 더 비싸다. 밤나무라는 재료도 흔치 않을 뿐만 아니라, 곧게 뻗은 나무가 많지 않아 구하기도 힘들다고 한다. 그런데 이렇게 비싼 집이지만 자꾸 우환이 생기니 집을 헐고 숙부는 정주읍으로 이사 갔다. (님따라 뜻따라 11~12쪽)참부모님과 경주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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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승룡(文昇龍), 향수 1
고향 상사리의 풍경고향 문촌(文村)의 기억나는 1921년 양력 4월 3일 평안북도 정주군 덕언면 상사리 2220번지에서 문경천 아버지와 김덕경 어머니 사이에서 5남2녀 중 넷째로 태어났다. 조부 문신국 할아버지는 참아버님의 친조부이신 문치국 할아버지의 바로 아래 동생이다.어린 시절과 학창시절을 상사리와 서울에서 참아버님과 함께 보냈다. 참아버님께서는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시고 나는 서울에서 경성전기회사에 취직했다. 8·15광복을 맞고 1·4후퇴를 겪으면서 부산으로 내려갔는데 그곳에서 참아버님과 만나게 됐다. 지금의 아내(장병주)도 부산에서 만났다. 1년 정도 부산에서 생활하다가 경성전기회사에서 복직 명령을 받고 서울로 올라와 생활했다.나는 1957년 1월 1일 참아버님의 말씀을 듣고 통일교회에 입교했다. 아내와 함께 참부모님의 뜻길을 따라오면서 1961년 5월 15일 청파동 전 본부교회에서 36가정 축복을 받고 1남3녀의 자녀를 두었다. 또 통일산업과 세계기독교통일신령협회 유지재단, 선도산업, 한국티타늄, 일성종합건설 등에서 참부모님을 모시고 일하기도 했다.우리 동네 상사리는 문씨가 여덟 가구가 돼 ‘문촌(文村)’으로 불렸다. 그런데 이남에 나오니까 문씨가 사십만 명이나 된다고 해 놀랐다. 이북에서는 문씨가 희귀성이어서, 정주군에서 ‘문촌’ 하게 되면 고향 상사리를 꼽았다. 문씨가 여덟 가구밖에 안 되는데 ‘문촌’이라면 다 알 정도이니 얼마나 희귀한 성이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덕언면에서도 문씨가 여기저기 떨어져 살고 있었는데 1년에 한 번 문중회의가 있을 때는 우리 동네로 모였다. 큰할아버지께서 그 일대에서는 제일 장손이었기 때문이다.우리 집이나 참아버님 댁인 큰집은 농사를 지었다. 우리 집은 논 3천평과 밭 1천500평 정도 되었고 큰집은 좀 더 된 것 같다. 당시에는 지나가는 사람들이 “옥수수 좀 주시오.”라고 하면 주고 또 밭에서 옥수수를 따서 구워 먹어도 주인이 뭐라고 하지 않았다.사람들은 문씨촌으로 자주 지나갔다. 특히 생활이 어려워 만주에 가서 넓은 땅에 마음껏 농사짓고 싶어 했던 호남 사람들이 주로 지나갔다. 그들은 돈이 없어 기차를 타지 못하고 걸어서 가다가 여름에는 어느 집 밑에서 이슬만 피하면 그만이었다. 그때 큰집에서는 사람들을 재워 보냈다. 사랑방에는 큰할아버지께서 혼자 계셨기 때문에 남자들은 사랑채에 머물게 했고 여자일 때는 윗방에서 잤다. 집에 온 손님이었기 때문에 식사도 함께했다. 이남 사람들은 생활이 어려워 만주로 갔지만 이북 사람들은 돈을 벌기 위해 가기도 했다. (님따라 뜻따라 9~11쪽)※ 문승룡(文昇龍) : 36가정, 세계기독교통일신령협회 유지재단 부이사장, 브룬디 국가메시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