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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EONWONSA

말씀 플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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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 상사리의 풍경


고향 문촌(文村)의 기억

나는 1921년 양력 4월 3일 평안북도 정주군 덕언면 상사리 2220번지에서 문경천 아버지와 김덕경 어머니 사이에서 5남2녀 중 넷째로 태어났다. 조부 문신국 할아버지는 참아버님의 친조부이신 문치국 할아버지의 바로 아래 동생이다.

어린 시절과 학창시절을 상사리와 서울에서 참아버님과 함께 보냈다. 참아버님께서는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시고 나는 서울에서 경성전기회사에 취직했다. 8·15광복을 맞고 1·4후퇴를 겪으면서 부산으로 내려갔는데 그곳에서 참아버님과 만나게 됐다. 지금의 아내(장병주)도 부산에서 만났다. 1년 정도 부산에서 생활하다가 경성전기회사에서 복직 명령을 받고 서울로 올라와 생활했다.

나는 1957년 1월 1일 참아버님의 말씀을 듣고 통일교회에 입교했다. 아내와 함께 참부모님의 뜻길을 따라오면서 1961년 5월 15일 청파동 전 본부교회에서 36가정 축복을 받고 1남3녀의 자녀를 두었다. 또 통일산업과 세계기독교통일신령협회 유지재단, 선도산업, 한국티타늄, 일성종합건설 등에서 참부모님을 모시고 일하기도 했다.

우리 동네 상사리는 문씨가 여덟 가구가 돼 ‘문촌(文村)’으로 불렸다. 그런데 이남에 나오니까 문씨가 사십만 명이나 된다고 해 놀랐다. 이북에서는 문씨가 희귀성이어서, 정주군에서 ‘문촌’ 하게 되면 고향 상사리를 꼽았다. 문씨가 여덟 가구밖에 안 되는데 ‘문촌’이라면 다 알 정도이니 얼마나 희귀한 성이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덕언면에서도 문씨가 여기저기 떨어져 살고 있었는데 1년에 한 번 문중회의가 있을 때는 우리 동네로 모였다. 큰할아버지께서 그 일대에서는 제일 장손이었기 때문이다.

우리 집이나 참아버님 댁인 큰집은 농사를 지었다. 우리 집은 논 3천평과 밭 1천500평 정도 되었고 큰집은 좀 더 된 것 같다. 당시에는 지나가는 사람들이 “옥수수 좀 주시오.”라고 하면 주고 또 밭에서 옥수수를 따서 구워 먹어도 주인이 뭐라고 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문씨촌으로 자주 지나갔다. 특히 생활이 어려워 만주에 가서 넓은 땅에 마음껏 농사짓고 싶어 했던 호남 사람들이 주로 지나갔다. 그들은 돈이 없어 기차를 타지 못하고 걸어서 가다가 여름에는 어느 집 밑에서 이슬만 피하면 그만이었다. 그때 큰집에서는 사람들을 재워 보냈다. 사랑방에는 큰할아버지께서 혼자 계셨기 때문에 남자들은 사랑채에 머물게 했고 여자일 때는 윗방에서 잤다. 집에 온 손님이었기 때문에 식사도 함께했다. 이남 사람들은 생활이 어려워 만주로 갔지만 이북 사람들은 돈을 벌기 위해 가기도 했다. (님따라 뜻따라 9~11쪽)



※ 문승룡(文昇龍) : 36가정, 세계기독교통일신령협회 유지재단 부이사장, 브룬디 국가메시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