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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부모님 생애
모든 이의 친구가 되어
어느 동네든 잘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못사는 사람도 있기 마련입니다. 못사는 친구들이 도시락으로 조밥을 싸오는 것을 보면 차마 내 밥을 먹지 못하고 친구의 조밥과 바꿔 먹었습니다. 나는 잘살고 드센 집 아이들보다는 어렵게 살고 밥을 못 먹는 아이와 더 친했고, 무슨 짓을 해서라도 그 아이의 배고픔을 해결해주고 싶었습니다. 그게 바로 내가 제일 좋아하는 놀이였기 때문입니다. 어린 나이였지만 모든 사람의 친구, 아니 친구 그 이상으로 깊은 마음을 나누는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평화를 사랑하는 세계인으로 p.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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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부모님 생애
아버지 한승운 선생
아버지는 그곳 안주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청주 한씨 승운 선생은 1909년 1월 20일, 평안남도 안주군 대니면 용흥리 99번지에서 부친 한병건(韓炳健) 선생과 모친 최기병(崔基炳) 여사 사이에서 5형제 중 맏아들로 출생했습니다. 11세 때인 1919년에 만성공립보통학교에 입학했지만 4학년까지만 다니다 중퇴했습니다. 그러나 배움의 열망이 너무 커서 1923년 사립 육영학교(育英學校)에 다시 입학해 1925년 졸업했습니다. 그때가 17세였습니다. 졸업 후 선생님이 되어 10년 동안 모교인 육영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쳤습니다. 광복 직후 혼란기인 1946년까지는 만성공립보통학교의 교두(교감)로 일하셨습니다.나는 아버지와 함께 산 기간이 무척 짧았습니다. 그러나 그 온후한 성품과 모습은 내 머릿속에 깊이 각인되어 있습니다. 성품은 치밀하고 알뜰하셨으며, 체격이 건장하고 체력도 뛰어났습니다. 어느 날엔 길을 걷다가 사람들이 논 가운데 있는 큰 바위를 치우는데 힘겨워하는 모습을 보고는 번쩍 들어내셨을 만큼 힘이 장사였습니다. 공부도 잘했으며 기독교 신앙이 독실하셨는데, 충직한 교편생활과 신앙생활로 인해 집안에 머무는 날이 드물었습니다. 이용도 목사의 새예수교에 몸담아 중견 간부로 바쁘게 생활하셨습니다. 악랄한 일본 경찰의 온갖 핍박과 감시를 받으면서도 오직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과 심정으로 삶을 이어가셨습니다. (평화의 어머니 p.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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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부모님 생애
고향 평안남도 안주의 풍경
1943년 2월 10일, 음력으로는 1월 6일 새벽, 나는 평안남도 안주에서 태어났습니다. 지금은 안주시 칠성동(七星洞)으로 이름이 바뀐 ‘안주읍 신의리(新義里) 26번지’를 지금도 또렷이 기억하고 있습니다.내 고향 마을은 그렇게 깊은 시골은 아니었습니다. 마치 암탉이 날개 아래 병아리를 품은 듯 따뜻하고 정겨운 동네였습니다. 초가집이 대부분이었는데 내가 태어난 집은 마루가 넓은 기와집이었습니다. 집 뒤로는 밤나무와 소나무가 우거진 아늑한 야산이 있었습니다. 철마다 예쁜 꽃들이 때맞춰 피어나고 갖가지 새소리가 합창처럼 들려왔습니다. 봄기운이 따사로울 때 집집마다 울타리 사이로 노란 개나리가 환하게 미소 짓고, 뒷산에는 진달래가 무리를 이루어 붉게 피어났습니다. 마을 앞으로 작은 개울이 흘렀는데 물이 꽁꽁 어는 한겨울을 빼고는 언제나 졸졸졸 정겨운 소리가 들렸습니다. 나는 그 물소리를 새소리와 함께 자연의 합창으로 여기며 자랐습니다. 지금도 아득히 떠올리면, 눈시울이 촉촉해질 만큼 포근한 정감을 안겨 주는 어머니의 품속과 같은 고향입니다.뒤뜰에는 옥수수를 촘촘히 심은 작은 밭이 있었습니다. 늦여름이면 옥수수가 잘 익어서 껍질이 터지고 길고 가느다란 수염들 사이로 반들반들하고 노란 이들을 드러냈습니다. 햇살 따사로운 오후에 어머니는 알차게 영근 옥수수를 삶아서 대나무 바구니에 담아 마루에 내놓고 이웃들을 불렀습니다. 그러면 이웃집에서 사람들이 하나둘 사립문 안으로 들어와 마루에 둥그렇게 둘러앉아 옥수수를 나눠 먹었습니다. 동네 사람들은 고마운 마음으로 오후의 허기를 달랬지만 표정은 그리 밝지 못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다들 살림살이가 넉넉지 못했고, 일제의 착취가 너무 심해 몸과 마음이 피폐해졌기 때문이었습니다. 나도 그 틈에 끼어 자그마한 옥수수 하나를 애써 뜯어 먹으려 했습니다. 그러나 제대로 될 리 없었습니다. 그럴 때면 어머니는 살며시 웃으며 노란 알맹이들을 손수 뜯어 내 입안에 넣어 주셨습니다. 그 달콤한 옥수수 알맹이가 입안에서 이리저리 굴러다니던 기억이 마치 어제 일 같습니다. (평화의 어머니 p.4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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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부모님 생애
하늘이 선택한 참다운 선민 한민족
우리 민족은 별자리를 연구해서 하늘의 운세를 풀던 슬기로운 동이(東夷)민족이었습니다. 기원전부터 찬란한 농경문화를 일군 민족으로, 하늘을 숭상하며 평화를 사랑하는 선민이었습니다. 한민족인 동이족이 한(韓)씨 왕국을 세웠습니다. 역사적으로 고조선 이전에 한씨가 살았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이를 신화로 폄하하는 의견이 없지는 않으나 단군신화에는 한민족을 천손민족으로 택한 하나님의 깊은 뜻이 담겨있습니다. 또한 우리 민족은 배달민족이기도 합니다. 배달(倍達)은 밝은 나라, 환한 나라, 하늘을 숭상하는 우리 민족을 말합니다.그런데 한민족이 걸어온 5천 년 역사를 헤아려 보면 누군들 가슴 아프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선천적으로 평화를 사랑하는 착한 민족임에도 끊임없이 외민족의 침입을 받았습니다. 그때마다 한민족은 들풀처럼 짓밟히고, 매서운 추위에 나목(裸木)처럼 헐벗기도 했지만, 그 뿌리는 결코 잃지 않았습니다. 슬기와 끈기로 외세의 침입을 물리쳤으며, 자랑스러운 한민족의 나라를 굳건히 지켜 왔습니다. 하나님이 왜 우리 선한 민족을 그토록 큰 시련과 아픔을 통해 연단하셨는지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한민족에게 커다란 사명을 맡기기 위해서였습니다. 성경에도 그런 역사가 나옵니다. 하나님은 노아, 아브라함 등 중심인물을 세워 섭리를 이끌어 오시면서 이스라엘 민족을 선민으로 택해 예수님을 보내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민족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게 하는 어리석음을 범했습니다.2천 년이 흐른 후 하늘은 한민족을 택해 독생자와 독생녀를 보내셨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사랑을 가장 먼저 받을 수 있는 유일한 남성과 유일한 여성을 말합니다. 한반도에서 독생자와 독생녀를 탄생시켜 세계를 구원하고 인류를 사랑으로 이끌어 나가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한민족이 길고 처절한 고난과 고통으로 벌거벗은 나목이 되었을지언정 죽은 고목(枯木)이 되지 않았던 까닭은 우리 민족에게 주어진 숭고한 사명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한민족은 하늘이 선택한 참다운 선민입니다. (평화의 어머니 p.46-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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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부모님 생애
본관 청주한씨와 이름 풀이
눈을 살포시 감으면 옥수수 밭을 휘감아 나가는 거친 바람소리가 들립니다. 광야를 달리는 수천 마리의 말발굽 소리를 떠올리게 합니다. 그 소리는 대륙을 힘차게 달렸던 고구려 무사들의 웅혼한 기백과도 같습니다. 가만히 귀를 기울이면 또 다른 정겨운 소리도 들려옵니다. “소쩍, 소쩍…….” 깊은 산중턱의 높은 나뭇가지에 둥지를 튼 소쩍새 울음소리가 아련히 들립니다. 여름밤, 어머니 손을 잡고 잠을 청할 때 들려오던 소쩍새 울음은 지금도 내 귓가에 맴돌고 있습니다. 나의 고향 평안남도 안주의 아름다운 풍광과 정겨운 소리들은 벌써 70여 년이 흘렀음에도 내 마음속에 오롯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꼭 가고 싶은 정든 고향입니다. 언젠가는 내가 돌아가야 할 본향 땅입니다.내가 태어날 때 아버지 한승운(韓承運) 선생께서는 태몽이라기보다는 몽시(夢示)를 받으셨습니다. 푸른 소나무 숲이 아주 울창한 가운데 맑고 아름다운 햇살이 비치면서 두 마리 학이 정답게 어울리는 모습이었습니다. 그래서 내 이름을 ‘학자(鶴子)’라고 지었습니다. 나는 청주 한씨이고, 본관은 충청북도 청주입니다. 충청(忠淸)은 ‘마음의 중심이 맑다’는 뜻이며, 청주(淸州)는 ‘맑은 고을’이라는 의미입니다. 강이나 바다의 물이 맑으면 물고기뿐만 아니라 바닥까지 훤히 들여다보이는 것처럼, 그 고을에 살던 나의 선조들은 마음이 맑고 겸손했습니다. 청주 한씨의 한(韓)은 여러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을 상징하고, ‘크다(大)’는 우주만물을 품에 안으며, ‘가득하다(滿)’는 충만함을 뜻합니다. (평화의 어머니 p.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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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부모님 생애
하늘이 특별히 찾아 세운 가문
나의 고향 안주는 본래 애국의 혼이 살아 숨 쉬는 곳이며 일찍이 기독교가 전래된 지역입니다. 3·1 독립만세 운동 당시 서울과 더불어 안주에서도 독립선언서 낭독과 함께 만세 시위가 일어났습니다. 조원모 외할머니의 독립만세 운동은 계속되었습니다. 외할머니와 어머니에 이어 나도 함께했습니다. 1919년 외할머니가 독립만세를 외치고 24년 후 내가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내가 세 살이 되던 1945년 8·15 광복을 맞았습니다. 이번에는 외할머니가 나를 업고 다시 거리로 나섰습니다. 손에는 태극기를 들고 해방된 기쁨에 겨워 목청이 터져라 만세를 불렀습니다.이렇게 소용돌이치는 역사의 중심에 하늘은 ‘우주의 어머니’ ‘평화의 어머니’를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기미년 독립만세 운동에 뛰어들었던 그 여인, 조원모 외할머니로부터 시작되어 절대믿음을 지닌 홍순애 어머니, 그리고 나에 이르기까지 3대 외동으로 이어진 가문을 선택하셨습니다. 다시 오시는 주님을 맞이하기 위해 온갖 어려움을 극복하고 준비해 왔을 뿐만 아니라,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이 이어진 집안이었습니다. 잃어버린 인류를 찾기 위해 하늘이 특별히 찾아 세운 가문을 통해 하나님의 독생녀인 나는 핍박받는 한반도 땅에 왔습니다. 그리고 그 후 100년, 하늘이 예비하신 평화의 어머니 독생녀의 인류구원을 향한 섭리의 발자취는 온 지구촌에 펼쳐지고 있습니다. (평화의 어머니 p.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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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부모님 생애
겨울날 연자방앗간에 찾아온 거지들 대접
우리 집 옆에는 연자방앗간이 있었습니다. 방앗간 안에 있는 불 싸라기가 밖으로 새나가지 않게끔 사방을 잘 둘러막아 겨울에도 웃풍이 없이 꽤 훈훈했습니다. 어쩌다 집 안의 아궁이에서 숯불이라도 얻어다 피우면 온돌방보다 더 뜨뜻했습니다. 팔도를 떠돌아다니며 구걸을 하는 거지들 중에는 우리 집 연자방앗간에 터를 잡고 겨울을 나는 이들이 여럿 있었습니다. 나는 그 거지들이 들려주는 바깥세상 이야기가 재미나서 걸핏하면 연자방앗간으로 찾아들었습니다. 어머니는 아들이 친구 삼은 거지의 밥까지 같이 차려서 방앗간으로 밥상을 가져오셨습니다. 내 숟가락 네 숟가락도 없이 밥 한 그릇을 같이 떠먹고, 담요 한 장을 나눠 덮으며 함께 겨울을 보냈습니다. 한겨울이 지나고 봄이 되어 그들이 멀리 떠나고 나면 그들이 돌아올 다음 겨울이 기다려지곤 했습니다. 몸이 헐벗었다고 해서 마음까지 헐벗은 건 아닙니다. 그들에게는 분명 따뜻한 사랑이 있었습니다. 나는 그들에게 밥을 주었고 그들은 내게 사랑을 나눠주었습니다. 그들이 가르쳐준 깊은 우정과 따뜻한 사랑은 오늘까지도 내게 큰 힘이 되고 있습니다.세계를 돌며 가난과 배고픔에 고통받는 어린이들을 볼 때마다 남들에게 밥을 먹이는 데 조금도 아낌이 없으셨던 할아버지의 모습을 떠올립니다. (평화를 사랑하는 세계인으로 p.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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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부모님 생애
열한 살 때 섣달그믐날 일화
일제강점기 시절 만주로 피난을 떠나던 이들이 지나던 길목이 평안북도 선천宣川이었는데, 우리 집이 바로 선천으로 가는 큰길가에 있었습니다. 집도 땅도 모두 일본인들에게 빼앗기고 살 길을 찾아 만주로 향하던 사람들이 우리 집 앞을 지나갔습니다. 어머니는 집 앞을 지나가는 팔도 사람들에게 언제든 밥을 해서 먹이셨습니다. 거지가 밥을 달라고 하는데 어머니가 냉큼 밥을 내가지 않으면 할아버지가 먼저 당신 밥상을 번쩍 들고 나가셨습니다. 그런 집안에 태어나서인지 나도 평생 밥 먹이는 일에 매달려 살았습니다. 내게는 사람들에게 밥을 먹이는 일이 다른 무엇보다 귀하고 소중합니다. 내가 밥 먹을 때 밥을 못 먹는 사람이 있으면 마음이 아프고 목이 메어 숟가락질하던 손이 그냥 멈춰버립니다.열한 살 때였습니다. 섣달그믐날이 다가와 마을 전체가 떡을 하느라 분주한데, 형편이 어려워 밥을 굶는 이웃이 있었습니다. 나는 그 사람들의 얼굴이 눈에 선하여 온종일 집 안을 뱅뱅 돌며 어찌할까 고민을 하다가 결국 쌀 한 말을 지고 뛰쳐나갔습니다. 식구들 몰래 쌀자루를 내가느라 자루에 새끼줄 하나 엮어 맬 겨를도 없었습니다. 그래도 어깨에 쌀자루를 짊어진 채 힘든 줄도 모르고 가파른 산비탈 길을 이십 리나 겅중겅중 뛰었습니다. 배고픈 사람들을 배불리 먹일 생각을 하니 기분이 좋아 가슴이 벌렁벌렁 풀무질을 해댔습니다. (평화를 사랑하는 세계인으로 p.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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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부모님 생애
밥 먹이는 가풍
나는 평안도 정주군 덕언면 상사리 2221번지에서 아버지 남평 문씨 문경유文慶裕와 어머니 연안 김씨 김경계金慶繼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기미독립운동이 일어난 이듬해인 1920년 음력 1월 6일이 내가 태어난 날입니다. 상사리에는 증조할아버지 때 이사를 했다고 합니다. 수천 석의 농사를 손수 지으시며 자수성가로 가문을 일으키신 증조할아버지는 술과 담배는 입에도 대지 않으시고 그 돈으로 다른 사람에게 밥 한 끼라도 더 먹이는 것을 보람으로 아는 분이셨습니다. 돌아가실 때는 ‘팔도강산 사람에게 밥을 먹이면 팔도강산에서 축복이 몰려든다’는 유언을 남기셨습니다. 그래서 우리 집 사랑방은 사람들로 늘 북적거렸습니다. 우리 동네 너머 사람들까지도 ‘아무 동네 문씨 댁에 가면 밥을 거저 준다’는 것을 모두 알 정도였습니다. 어머니는 그 고단한 수발을 척척 해내면서 불평 한번 하지 않으셨습니다. 잠시도 쉬는 법이 없을 만큼 부지런하셨던 증조할아버지는 틈틈이 짚신을 삼아 장에 내다 파셨고, 늙어서는 “후대에 우리 자손이 잘 되게 해주십시오” 하고 빌면서 오리를 여러 마리 사서는 놓아주시곤 했습니다. 또 사랑방에 한문 선생을 들여 동네 청년들에게 글을 무료로 가르치셨습니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증조할아버지에게 ‘선옥善玉’이라는 호를 지어주고 우리 집을 일컬어 ‘복 받을 집’이라고 불렀습니다.하지만 증조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내가 자랄 적에는 그 많던 재산이 모두 날아가고 그저 밥술이나 먹고살 정도였습니다. 그래도 밥 먹이는 가풍만은 여전해서 식구들이 먹을 밥이 없어도 남을 먼저 먹였습니다. 그 덕분에 내가 걸음마를 떼자마자 배운 것이 바로 남에게 밥을 먹이는 일이었습니다. (평화를 사랑하는 세계인으로 p.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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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부모님 생애
오산집 쪼끔눈이
나는 눈이 아주 작습니다. 어찌나 작은지 어머니는 나를 낳으시고는 “우리 아기 눈이 있나 없나?” 하며 일부러 눈을 벌려보셨다고 합니다. 그러자 갓 태어난 내가 눈을 깜빡깜빡해서 “어머나, 우리 아가 눈이 있기는 있구나!” 하며 기뻐하셨답니다. 그렇게 눈이 작았던 탓에 어려서는 ‘오산집 쪼끔눈이’라고 불렸습니다.그래도 눈이 작아 볼품없다는 얘기는 별로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관상을 좀 볼 줄 아는 이들은 내 작은 눈에 종교 지도자의 기질이 들어있다고 합니다. 카메라의 조리개도 구멍을 좁힐수록 더 멀리 볼 수 있는 것처럼 종교 지도자는 남보다 멀리 내다보는 선견이 있어야 하는 점에서 그런가 봅니다. 내 코도 별나기는 마찬가지여서 한눈에 봐도 누구 말도 듣지 않을 것 같게 생긴 고집불통 코입니다. 관상이 영 허튼소리만은 아닌 것이, 내가 살아온 날들을 돌아보면 ‘이렇게 살려고 그렇게 생겼나’ 싶습니다. (평화를 사랑하는 세계인으로 p.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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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부모님 생애
평화에 대하여
내가 태어난 1920년은 일본이 우리나라를 강제로 점령하고 있던 때였습니다. 해방 이후에도 6·25전쟁과 외환위기 등 힘겨운 혼란을 여러 차례 겪으며 이 땅은 평화와는 거리가 먼 세월을 보내야 했습니다. 이런 아픔과 혼란은 비단 우리나라만의 일은 아니었습니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과 베트남전쟁, 중동전쟁 등 세상 사람들은 끊임없이 서로를 미워하며 총을 겨누고 폭탄을 터뜨렸습니다. 살이 찢기고 뼈가 부러지는 환란을 겪은 이들에게 평화란 꿈에서나 그려보는 허황된 것이었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평화를 실현하는 것은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나를 둘러싼 공기, 자연환경, 그리고 사람에게서 우리는 쉽게 평화를 구할 수 있습니다. 들판을 내 집처럼 생각하고 살았던 어린 시절, 나는 아침밥 한 그릇을 뚝딱 비우고 뛰쳐나가 온종일 산으로 강으로 쏘다녔습니다. 온갖 새와 동물들이 살고 있는 숲 속을 누비며 풀과 열매를 따먹다보면 온종일 배가 고픈 줄도 몰랐습니다. 어린 마음에도 숲 속에만 들어가면 몸과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을 느꼈습니다.산에서 뛰놀다 잠이 든 적도 많았습니다. 그럴 때면 아버지께서 숲으로 나를 찾으러 오셨습니다. “용명아! 용명아!” 하는 아버지의 목소리가 멀리서 들리면 자면서도 웃음이 절로 나게 반가웠습니다. 나의 어릴 적 이름은 용명龍明입니다. 나를 부르는 소리에 얼핏 잠이 깼지만 잠든 척하고 아버지 등에 덥석 업혀가던 그 기분, 아무 걱정도 없이 마음이 척 놓이는 기분, 그것이 바로 평화였습니다. 그렇게 아버지 등에 업혀 평화를 배웠습니다.내가 숲을 사랑한 것도 그 안에 세상의 모든 평화가 깃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숲 속의 생명들은 싸우지 않습니다. 물론 서로 잡아먹고 잡아먹히지만, 그것은 배가 고파 어쩔 수 없이 그러는 것이지 미워서 그러는 것이 아닙니다. 새는 새끼리, 짐승은 짐승끼리, 나무는 나무끼리 서로 미워하는 법이 없습니다. 미움이 없어야 평화가 옵니다. 같은 종끼리 서로 미워하는 것은 사람뿐입니다. 나라가 다르다고 미워하고, 종교가 다르다고 미워하고, 생각이 다르다고 또 미워합니다. (평화를 사랑하는 세계인으로 p.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