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CHEONWONSA

말씀 플러스


2001102203 안주.jpg


1943년 2월 10일, 음력으로는 1월 6일 새벽, 나는 평안남도 안주에서 태어났습니다. 지금은 안주시 칠성동(七星洞)으로 이름이 바뀐 ‘안주읍 신의리(新義里) 26번지’를 지금도 또렷이 기억하고 있습니다.

내 고향 마을은 그렇게 깊은 시골은 아니었습니다. 마치 암탉이 날개 아래 병아리를 품은 듯 따뜻하고 정겨운 동네였습니다. 초가집이 대부분이었는데 내가 태어난 집은 마루가 넓은 기와집이었습니다. 집 뒤로는 밤나무와 소나무가 우거진 아늑한 야산이 있었습니다. 철마다 예쁜 꽃들이 때맞춰 피어나고 갖가지 새소리가 합창처럼 들려왔습니다. 봄기운이 따사로울 때 집집마다 울타리 사이로 노란 개나리가 환하게 미소 짓고, 뒷산에는 진달래가 무리를 이루어 붉게 피어났습니다. 마을 앞으로 작은 개울이 흘렀는데 물이 꽁꽁 어는 한겨울을 빼고는 언제나 졸졸졸 정겨운 소리가 들렸습니다. 나는 그 물소리를 새소리와 함께 자연의 합창으로 여기며 자랐습니다. 지금도 아득히 떠올리면, 눈시울이 촉촉해질 만큼 포근한 정감을 안겨 주는 어머니의 품속과 같은 고향입니다.

뒤뜰에는 옥수수를 촘촘히 심은 작은 밭이 있었습니다. 늦여름이면 옥수수가 잘 익어서 껍질이 터지고 길고 가느다란 수염들 사이로 반들반들하고 노란 이들을 드러냈습니다. 햇살 따사로운 오후에 어머니는 알차게 영근 옥수수를 삶아서 대나무 바구니에 담아 마루에 내놓고 이웃들을 불렀습니다. 그러면 이웃집에서 사람들이 하나둘 사립문 안으로 들어와 마루에 둥그렇게 둘러앉아 옥수수를 나눠 먹었습니다. 동네 사람들은 고마운 마음으로 오후의 허기를 달랬지만 표정은 그리 밝지 못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다들 살림살이가 넉넉지 못했고, 일제의 착취가 너무 심해 몸과 마음이 피폐해졌기 때문이었습니다. 나도 그 틈에 끼어 자그마한 옥수수 하나를 애써 뜯어 먹으려 했습니다. 그러나 제대로 될 리 없었습니다. 그럴 때면 어머니는 살며시 웃으며 노란 알맹이들을 손수 뜯어 내 입안에 넣어 주셨습니다. 그 달콤한 옥수수 알맹이가 입안에서 이리저리 굴러다니던 기억이 마치 어제 일 같습니다. (평화의 어머니 p.49-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