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 시절 만주로 피난을 떠나던 이들이 지나던 길목이 평안북도 선천宣川이었는데, 우리 집이 바로 선천으로 가는 큰길가에 있었습니다. 집도 땅도 모두 일본인들에게 빼앗기고 살 길을 찾아 만주로 향하던 사람들이 우리 집 앞을 지나갔습니다. 어머니는 집 앞을 지나가는 팔도 사람들에게 언제든 밥을 해서 먹이셨습니다. 거지가 밥을 달라고 하는데 어머니가 냉큼 밥을 내가지 않으면 할아버지가 먼저 당신 밥상을 번쩍 들고 나가셨습니다. 그런 집안에 태어나서인지 나도 평생 밥 먹이는 일에 매달려 살았습니다. 내게는 사람들에게 밥을 먹이는 일이 다른 무엇보다 귀하고 소중합니다. 내가 밥 먹을 때 밥을 못 먹는 사람이 있으면 마음이 아프고 목이 메어 숟가락질하던 손이 그냥 멈춰버립니다.
열한 살 때였습니다. 섣달그믐날이 다가와 마을 전체가 떡을 하느라 분주한데, 형편이 어려워 밥을 굶는 이웃이 있었습니다. 나는 그 사람들의 얼굴이 눈에 선하여 온종일 집 안을 뱅뱅 돌며 어찌할까 고민을 하다가 결국 쌀 한 말을 지고 뛰쳐나갔습니다. 식구들 몰래 쌀자루를 내가느라 자루에 새끼줄 하나 엮어 맬 겨를도 없었습니다. 그래도 어깨에 쌀자루를 짊어진 채 힘든 줄도 모르고 가파른 산비탈 길을 이십 리나 겅중겅중 뛰었습니다. 배고픈 사람들을 배불리 먹일 생각을 하니 기분이 좋아 가슴이 벌렁벌렁 풀무질을 해댔습니다. (평화를 사랑하는 세계인으로 p.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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