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평안도 정주군 덕언면 상사리 2221번지에서 아버지 남평 문씨 문경유文慶裕와 어머니 연안 김씨 김경계金慶繼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기미독립운동이 일어난 이듬해인 1920년 음력 1월 6일이 내가 태어난 날입니다. 상사리에는 증조할아버지 때 이사를 했다고 합니다. 수천 석의 농사를 손수 지으시며 자수성가로 가문을 일으키신 증조할아버지는 술과 담배는 입에도 대지 않으시고 그 돈으로 다른 사람에게 밥 한 끼라도 더 먹이는 것을 보람으로 아는 분이셨습니다. 돌아가실 때는 ‘팔도강산 사람에게 밥을 먹이면 팔도강산에서 축복이 몰려든다’는 유언을 남기셨습니다. 그래서 우리 집 사랑방은 사람들로 늘 북적거렸습니다. 우리 동네 너머 사람들까지도 ‘아무 동네 문씨 댁에 가면 밥을 거저 준다’는 것을 모두 알 정도였습니다. 어머니는 그 고단한 수발을 척척 해내면서 불평 한번 하지 않으셨습니다.
잠시도 쉬는 법이 없을 만큼 부지런하셨던 증조할아버지는 틈틈이 짚신을 삼아 장에 내다 파셨고, 늙어서는 “후대에 우리 자손이 잘 되게 해주십시오” 하고 빌면서 오리를 여러 마리 사서는 놓아주시곤 했습니다. 또 사랑방에 한문 선생을 들여 동네 청년들에게 글을 무료로 가르치셨습니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증조할아버지에게 ‘선옥善玉’이라는 호를 지어주고 우리 집을 일컬어 ‘복 받을 집’이라고 불렀습니다.
하지만 증조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내가 자랄 적에는 그 많던 재산이 모두 날아가고 그저 밥술이나 먹고살 정도였습니다. 그래도 밥 먹이는 가풍만은 여전해서 식구들이 먹을 밥이 없어도 남을 먼저 먹였습니다. 그 덕분에 내가 걸음마를 떼자마자 배운 것이 바로 남에게 밥을 먹이는 일이었습니다. (평화를 사랑하는 세계인으로 p.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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