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산당이 점점 더 기승을 부리자 외할머니는 더 이상 이곳에서는 신앙생활은 물론 평범한 삶조차 이어가가기 어렵다고 판단해 남한으로 내려가는 것이 어떨까 많은 고심을 했습니다.
1948년 가을 어느 날, 한밤중에 어머니는 나를 업고 외할머니는 보따리 두어 개를 들고 집을 나섰습니다. 안주에서 삼팔선까지 직선거리로 200킬로미터나 되는 먼 길이었습니다. 몇 날 며칠을 걸어서 내려와야만 했습니다. 가까스로 삼팔선 인근에 다다랐지만 나와 어머니, 외할머니는 삼엄하게 경비를 서고 있던 북한 인민군에게 덜컥 붙잡혔습니다. 그들은 우리를 빈집 헛간에 가뒀습니다. 그곳에는 이미 잡혀 온 여러 사람이 겁에 질려 있었습니다. 하루는 한 어른이 보초를 서던 인민군들에게 먹을 것을 가져다주라고 나에게 심부름을 시켰습니다. 나는 떨리는 마음을 억누르고 미소를 지으며 먹을거리를 인민군에게 건넸습니다. 그렇게 몇 차례 하니 저들의 마음이 누그러졌습니다. 어느 날 밤 인민군들이 고향으로 돌아가라면서 우리 세 모녀를 풀어주었습니다. 하늘의 보살핌이 생사의 기로에서 삶의 길로 인도한 것입니다.
남한에서도 경비가 삼엄했습니다. 그 사실을 까마득히 모르는 나는 즐거운 마음에 노래를 몇 소절 불렀습니다. 그때 우리 앞의 나무덤불에서 부스럭 소리가 났습니다. 우리는 깜짝 놀라 그 자리에 얼어붙었습니다. 인민군에게 또 붙잡히는 것은 아닌지 두려움이 몰려왔습니다. 그런데 덤불을 헤치고 나타난 것은 남한 군인이었습니다. 그를 보는 순간 우리는 동시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총을 든 군인들은 인기척을 느끼고 방아쇠를 당겨 총을 쏘려다가 어린아이의 맑은 노랫소리를 듣고 총부리를 거뒀습니다.
그때 내가 만약 노래를 부르지 않았다면 북한 인민군으로 오해받아 그 자리에서 총탄에 맞아 목숨을 잃었을 것입니다. 하늘은 이렇듯 애틋하게 우리를 보호해 주셨습니다. (평화의 어머니 76-8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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