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본관은 전라도 나주 옆에 있는 남평입니다. 문정흘文禎紇 증조할아버지는 문성학文成學 고조할아버지가 낳으신 3형제 중 셋째 아드님이셨습니다. 그 증조할아버지가 또 치국致國, 신국信國, 윤국潤國의 3형제를 낳으셨는데 우리 할아버지가 맏이셨습니다.
할아버지는 무조건 베풀며 살라는 증조할아버지의 유언을 잘 따르셨습니다만, 재산을 지키지는 못하셨습니다. 셋째인 윤국 작은할아버지가 집안 재산을 저당 잡혀 몽땅 날리셨기 때문입니다. 그 후 집안 식구들의 고생은 이만저만이 아니었지만, 우리 할아버지나 아버지는 한번도 윤국 할아버지를 원망하지 않으셨습니다. 윤국 할아버지가 노름하느라 재산을 없앤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윤국 할아버지가 저당을 잡혀가며 빌린 돈은 모두 상하이 임시정부로 전해졌습니다. 당시 7만 원이면 상당히 큰돈이었는데 윤국 할아버지는 그 돈을 독립운동 자금으로 털어넣으셨습니다.
윤국 할아버지는 평양신학교를 졸업한 목사로 영어와 한학에 능한 인텔리였습니다. 덕언면의 덕흥교회를 비롯해서 세 군데 교회의 담임목사를 지낸 윤국 할아버지는 최남선 선생 등과 더불어 기미독립선언문을 기안했지만, 기독교 대표 16인 중에 덕흥교회 사람이 셋이나 되자 민족대표 자리에서 스스로 물러나셨습니다. 그러자 오산학교 설립에 뜻을 같이 했던 남강 이승훈 선생은 윤국 할아버지의 두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며 만약의 경우 거사에 실패하면 후사를 맡아달라고 당부했다고 합니다. (평화를 사랑하는 세계인으로 p.2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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