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아버님의 종조부 문윤국(文潤國) 목사
종조부 문윤국 할아버지와 아버지 문경천 장로
문윤국 종조부께서는 평양신학교를 11기생으로 졸업하시고 고향에 돌아와 목사 생활을 하셨다. 작은할아버지께서는 양봉을 해 ‘벌이 목사’라고도 불렸다. 그러다가 금광을 한다며 고향을 떠나 강원도로 가셨다. 금광 한다고 말만 들었지 가서 본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고향에서는 아무도 몰랐다. 심지어 금광 한다며 왔다갔다하는 것을 보고 정신이 나간 영감이라고 했다. 금광 한다는 사람들은 대개 외도하고 외박하는 사람들이어서 누가 인정해 주지 않던 시대였다.
큰집에서는 종조부가 금광을 한다면서 돈을 빌려 달라니까 큰집 재산도 줬지만 보증도 많이 섰다고 했다. 독립운동을 했다는 것은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다.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인 이명룡 장로네가 괜찮게 살아 그 집 돈을 빌릴 때도 큰집에서 보증을 섰다고 한다. 예전에는 우리 큰집도 괜찮게 살았다.
우리 할아버지께서는 문경 어딘가에서 살다 돌아가셨다. 그래서 밀양 박씨였던 할머니는 자식들을 데리고 상사리로 들어와 사셨다. 큰할아버지께서 큰집 옆에 새로 집을 지어 주셨기 때문에 사람들은 우리 집을 ‘새집’이라고 했다.
기독교가 우리나라에 처음 들어올 때, 평양으로는 장로교가 들어오고 서울로는 감리교가 들어왔다고 한다. 할머니께서는 장로교가 평양에서 정주를 거쳐 선천과 신의주로 들어갈 무렵부터 믿기 시작했다고 했다. 동네에서는 “저 과부댁이 바람났다.”고 많이 비난했다고 한다. 그 후 우리 할머니는 예수님을 믿게 되었는데 할아버지께서는 교회에 다니지 않으셨다. 하지만 우리 아버지가 장로가 되었고 어머니와 은균 형님, 경익 셋째 숙부도 집사가 됐다. 아버지는 경훈, 경익 숙부보다 신앙심이 더 두터우셨다. 할머니께서는 예수님을 믿다가 내가 서너 살 될 무렵 돌아가셨다.
문윤국 작은할아버지는 우리 할머니가 예수님을 믿은 후 믿었던 것 같고, 내가 열 살 무렵에 목사가 되셨다. 큰집은 교회를 다니지 않다가 집안에 문제가 생기면서 예수님을 믿기 시작했다.
우리 아버지 문경천 장로는 상사리에서 어려운 문제들을 잘 해결해 어른 노릇을 하셨다. 동네 청년들끼리 서로 싸우다가도 해결이 안 나면 “새집 아주머니한테 가서 재판하자.”고 하면서 찾아왔다. 이북에서는 아저씨를 아주머니라고 불렀다. 밤에 싸우는 경우에도 재판 좀 해 달라고 찾아왔다. “그래, 이놈들 싸우긴 왜 싸우나? 이야기해 봐라.”고 해 그들의 말을 듣고 “이것은 이러하고 저것은 저러하다.”라면서 재판을 해주면 저희들끼리 화해하고 돌아갔다.
또 바른 이야기를 잘해 동네에서 인정받는 영감이었다. 동네뿐만 아니라 면에서도 아버지를 아는 사람들은 그렇게 대했다고 한다. 아버지는 공부를 많이 한 분도 아니셨는데 그렇게 사셨다. (님따라 뜻따라 12~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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