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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울의 작은 거인
다섯 장의 넓고 큰 것은 꽃받침이다. 노란 꿀을 두 방울씩 달고 있는 게 꽃잎. 그 무게를 지탱하려고 깔때기 모양으로 동그랗게 말았다.3월 초, 중부 이북의 깊은 산은 이제 한겨울의 꺼풀을 벗으려 한다.눈 녹은 물기를 머금고 산기슭에서 낙엽 사이를 비집고 작은 키를 최대한 올려봤자 10센티미터 내외다. 매크로렌즈로 부분부분 집중하여 담아 보니 아름답지 않은 구석이 없다. 겨울에 불쑥 꽃대를 올리는 건 땅속 어둠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가늠할 수 없는 처절함이 있었기에 흰 꽃은 저리도 환한가 보다.몇 해를 찾다 허탕을 친 보상으로 흥이 쉬이 가시지 않는다.춘향의 태를 살피듯 두루두루 눈길을 보낸다.가장 먼저 나온 포엽은 잎의 역할을 한다. 몸체에 비해 넓은 잎으로 햇빛을 자양분 삼는 광합성을 하여 줄기와 꽃대를 키우고 꽃봉오리를 피워 올린다. 그 후엔 포대기가 되어 꽃을 감싸 안아서 수시로 엄습하는 추위를 이겨내게 돕는다. 꽃이 피고 나면 자신을 아래로 접어 꽃을 돋보이게 하는 겸양까지 보인다. 상황과 진전에 따라 능동적으로 롤 플레이하는 사실을 발견하는 묘미는 섬세한 관찰에서 얻는 수확이다.1경 1화, 꽃대 하나에 꽃 하나 피우는 것으로 족하다. 바로 옆에 피어오른 두세 송이는 한 뿌리에서 나온 형제들이다. 바라보는 곳도 같아 다정하다.아직도 밤이면 겨울왕국이다. 폭설에도 서서 버텨야 한다.서성거릴 수 없는 생이다. 향기는 없다. 스스로 꽃이니 굳이 향기 필요하랴.우리가 흔히 흰 꽃으로 말하는 꽃잎은 정확하게는 꽃받침이다.꽃받침은 포엽의 지지를 받아 그 위에서 꽃을 감싸 추위를 이겨내도록 돕는다. 그러니까 너도바람꽃은 쌍 겹의 보호를 받아 한겨울 높은 산 계곡에서 존재감을 드러낼 수 있었던 거다. 꽃받침은 수정을 마친 이후에도 지지 않고 씨방을 감싸 씨가 옹골차게 영글도록 마지막까지 충절을 지킨다. 조선시대에 왕의 유모에게 내린 봉보부인奉保夫人의 작위에 어울린다.흰 꽃받침 안쪽으로 둥그렇게 열 지어 노란 점박이를 달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그게 꽃잎이다. 점박이는 꿀 덩어리다.다섯 장의 넓고 큰 것은 꽃받침이다. 노란 꿀을 두 방울씩 달고 있는 게 꽃잎. 그 무게를 지탱하려고 깔때기 모양으로 동그랗게 말았다.너도바람꽃이 안전하게 자라는데 큰 역할을 하는 것이 총포다. 언 땅에서 가장 먼저 나와 햇빛을 자양분 삼아 키를 키우고 꽃봉오리를 보호하고 꽃을 피우기까지 공을 들인다. 꽃이 지기까지 지켜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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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이른 봄의 전령, 너도바람꽃
새로운 한 해를 맞이한 설렘의 유효가 멎을 즈음 남녘에서 전해진 화신이 꺼진 불씨처럼 살아나 심장을 데운다.‘너도바람꽃’이 앞장을 선다. 학명 Eranthis도 ‘일찍 피는 봄꽃’을 의미한다.그리스 신화에서는 봄에 부는 서풍의 신인 제피로스와 꽃의 여신인 아내 플로라, 그리고 예쁜 하녀 아네모네에 얽힌 사랑 이야기가 등장한다. 쫓겨난 아네모네가 바람꽃으로 피어났다.‘바람꽃’은 한여름에 피고, ‘나도바람꽃’은 완연한 봄에 핀다. ‘너도바람꽃’은 아직 겨울이 머무는 2월에 핀다. 형상은 비슷해도 그 둘은 분류상 엄연히 속이 다르고 별도의 일가를 이룬다.무슨 바람으로 ‘너도’라는 접두어를 붙여 이름을 지은 걸까. 그런 이름을 가진 식물이 또 있으니 변명의 여지는 있을 것이다. 그래도 뭔가 억지스럽다. 지역마다 부르던 옛 이름 중에 더 근사한 게 있었을 텐데, 살짝 아쉽다.이름은 중요하다. ‘너도, 나도’ 바람꽃이길 원하기나 했던 것처럼 새해의 첫 선물로 다가온 예쁜 꽃을 마치 ‘개똥아, 간난아’라고 부른다는 느낌이 들어서 하는 말이다. 조롱이 스민 ‘며느리밑씻개’, ‘개불알풀’보다는 그래도 나은 편이니 예서 트집은 그만 잡겠다.찬바람을 막아 주는 바위를 등지고 핀 두 송이. 한 뿌리에서 나온 형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