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평화를 사랑하는 세계인으로
한다면 하는 하루울이 고집쟁이
어릴 적 내 별명은 ‘하루울이’입니다. 한번 울기 시작하면 온종일 울어야 끝이 나서 붙여진 별명입니다. 한번 울음을 터뜨리면 무슨 큰일이나 난 것처럼 크게 울어 잠자던 사람들이 다 깨어 나와봐야 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가만히 앉아서 운 것도 아닙니다. 방 안을 훌떡훌떡 뛰면서 난리를 쳐대 온 몸에 상처가 나고 살이 터져 방 안을 피투성이로 만들 정도로 울어댔습니니다. 어려서부터 그렇게 성질이 지독한 데가 있었습니다. 한번 맘을 정하면 절대 양보를 안 했습니다. 뼈가 부러져도 양보를 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철이 들기 전의 일입니다. 고집이 센 만큼 승부욕도 강해 어떤 일이든 지고는 못 살았습니다. 오죽하면 “오산집 쪼끔눈이. 그놈, 한번 한다면 하는 놈이다”라고 동네 어른들이 다 인정할 정도였습니다. 또래 아이들보다 훨씬 덩치도 크고 힘도 장사여서 동네에서 팔씨름으로 나를 당할 자가 없었습니다. 나보다 세 살 더 많은 녀석한테 씨름에서 진 적이 있었는데 도통 분해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매일 밤 산에 올라가 아카시아 나무껍질을 벗기며 힘을 길러서는 여섯 달 만에 그 녀석을 이겨버렸습니다. (평화를 사랑하는 세계인으로 p.37)
22.04.05 -
평화를 사랑하는 세계인으로
아버지와 어머니를 닮아나
아버지는 돈을 빌려주고 떼일 줄은 알아도 받아올 줄은 모르는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빚을 얻어 쓰고서 갚기로 한 약속은 소를 팔고 집안 기둥을 뽑아 팔아서라도 반드시 지키는 분이었습니다. 아버지는 늘 “작은 꾀로 진리를 움직이지 못한다. 참이란 작은 꾀의 지배를 받지 않는다. 꾀로 이룬 것은 몇 년 못 가 드러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풍채가 좋으셨던 아버지는 볏섬을 지고 층계를 성큼성큼 올라가실 만큼 힘이 장사였습니다. 내가 아흔 살이 되도록 세계를 돌아다니며 활동할 수 있는 것은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체력 덕분입니다. 찬송가 중에서 ‘저 높은 곳을 향하여’를 즐겨 부르시던 어머니도 대단한 여장부셨습니다. 이마랑 머리가 두리두리하셨던 모습만이 아니라 곧고 괄괄한 성격도 그대로 닮아 나 또한 고집이 대단하니 그 어머니에 그 아들인 셈입니다. (평화를 사랑하는 세계인으로 p.31)
22.03.25 -
평화를 사랑하는 세계인으로
반드시 광명한 아침이 올지니
내가 일고여덟 살쯤의 일입니다. 윤국 할아버지가 잠시 우리 집에 머물러 계신 것을 알고 독립군들이 찾아온 적이 있었습니다. 독립자금이 부족해 도움을 요청하려고 눈이 쏟아지는 밤길을 걸어온 것이었습니다. 아버지는 잠든 우리 형제들이 깰세라 우리 얼굴을 이불로 덮으셨습니다. 이미 잠이 달아나버린 나는 이불 속에서 두 눈을 말똥말똥 뜨고 누워 어른들이 나누는 이야기 소리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어머니는 그 밤중에 닭을 잡고 국수를 삶아 독립군들을 대접했습니다.아버지가 덮어씌운 이불 밑에서 숨을 죽인 채 듣던 윤국 할아버지의 말씀은 지금도 귓전에 생생히 남아있습니다. 할아버지는 “죽어도 나라를 위해 죽으면 복되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지금 눈앞에 보이는 것은 암흑이지만, 반드시 광명한 아침이 온다”라는 이야기도 하셨습니다. 고문의 후유증으로 늘 몸이 불편하셨지만 목소리만은 쩌렁쩌렁하셨지요. ‘저렇게 훌륭한 할아버지가 왜 감옥에 가야 하나? 일본보다 우리가 더 힘이 세면 그런 일이 없을 텐데…’ 하며 안타까워하던 심정도 잊히지 않습니다. (평화를 사랑하는 세계인으로 p.31)
22.03.18 -
평화를 사랑하는 세계인으로
내 인생의 분명한 나침반
우리 본관은 전라도 나주 옆에 있는 남평입니다. 문정흘文禎紇 증조할아버지는 문성학文成學 고조할아버지가 낳으신 3형제 중 셋째 아드님이셨습니다. 그 증조할아버지가 또 치국致國, 신국信國, 윤국潤國의 3형제를 낳으셨는데 우리 할아버지가 맏이셨습니다. 할아버지는 무조건 베풀며 살라는 증조할아버지의 유언을 잘 따르셨습니다만, 재산을 지키지는 못하셨습니다. 셋째인 윤국 작은할아버지가 집안 재산을 저당 잡혀 몽땅 날리셨기 때문입니다. 그 후 집안 식구들의 고생은 이만저만이 아니었지만, 우리 할아버지나 아버지는 한번도 윤국 할아버지를 원망하지 않으셨습니다. 윤국 할아버지가 노름하느라 재산을 없앤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윤국 할아버지가 저당을 잡혀가며 빌린 돈은 모두 상하이 임시정부로 전해졌습니다. 당시 7만 원이면 상당히 큰돈이었는데 윤국 할아버지는 그 돈을 독립운동 자금으로 털어넣으셨습니다. 윤국 할아버지는 평양신학교를 졸업한 목사로 영어와 한학에 능한 인텔리였습니다. 덕언면의 덕흥교회를 비롯해서 세 군데 교회의 담임목사를 지낸 윤국 할아버지는 최남선 선생 등과 더불어 기미독립선언문을 기안했지만, 기독교 대표 16인 중에 덕흥교회 사람이 셋이나 되자 민족대표 자리에서 스스로 물러나셨습니다. 그러자 오산학교 설립에 뜻을 같이 했던 남강 이승훈 선생은 윤국 할아버지의 두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며 만약의 경우 거사에 실패하면 후사를 맡아달라고 당부했다고 합니다. (평화를 사랑하는 세계인으로 p.29-31)
22.03.18 -
평화를 사랑하는 세계인으로
옳다 생각한 일에는 물러섬이 없이
삼촌 중에 욕심 많은 이가 한 분 있었습니다. 동네 한복판에 삼촌네 참외밭이 있었는데 여름이면 달콤한 냄새 때문에 밭을 지나던 동네 아이들이 안달을 했습니다. 그런데도 삼촌은 길가의 원두막을 지키고 앉아 참외를 한 개도 나눠주지 않았습니다. 하루는 내가 “삼촌, 내가 언제 한번 참외를 원 없이 가져다 먹어도 되지요?” 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삼촌은 “그럼, 그렇고말고” 하고 선선히 대답했습니다. 나는 “참외 먹고 싶은 애들은 포댓자루 하나씩 들고 밤 열두 시에 우리 집 앞으로 모두 모여라!” 하고는 아이들을 불러모았습니다. 그러고는 삼촌네 참외밭으로 몰려가서 “너희들 마음대로 아무 걱정 말고 한 고랑씩 다 따라”고 했습니다. 아이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참외밭으로 뛰어들어가 순식간에 참외 몇 고랑을 모조리 따버렸습니다. 그날 밤 배고픈 동네 아이들은 싸리밭에 앉아 참외를 배가 터지도록 먹었습니다.이튿날 삼촌네는 난리가 났습니다. 벌집을 쑤셔놓은 듯한 삼촌 댁을 찾아갔더니, 삼촌은 나를 보자마자 “이놈, 네가 한 짓이냐? 참외농사를 헛수고로 만든 게 바로 네놈이란 말이냐?” 하며 펄펄 뛰셨습니다. 나는 삼촌이 뭐라고 야단을 쳐도 기죽지 않고, “삼촌, 원 없이 먹어도 된다고 하셨잖아요. 동네 아이들이 참외를 먹고 싶어하는 그 마음이 바로 내 마음이에요. 먹고 싶어하는 아이들한테 참외 한 개씩 나눠줘야겠어요, 절대로 안 줘야겠어요?” 하고 따져 물었습니다. 그러자 화가 나서 펄펄 뛰던 삼촌도 “그래, 네가 옳다” 하며 물러서고 말았습니다. (평화를 사랑하는 세계인으로 p.26)
22.03.07 -
평화를 사랑하는 세계인으로
모든 이의 친구가 되어
어느 동네든 잘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못사는 사람도 있기 마련입니다. 못사는 친구들이 도시락으로 조밥을 싸오는 것을 보면 차마 내 밥을 먹지 못하고 친구의 조밥과 바꿔 먹었습니다. 나는 잘살고 드센 집 아이들보다는 어렵게 살고 밥을 못 먹는 아이와 더 친했고, 무슨 짓을 해서라도 그 아이의 배고픔을 해결해주고 싶었습니다. 그게 바로 내가 제일 좋아하는 놀이였기 때문입니다. 어린 나이였지만 모든 사람의 친구, 아니 친구 그 이상으로 깊은 마음을 나누는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평화를 사랑하는 세계인으로 p.26)
22.03.04 -
평화를 사랑하는 세계인으로
겨울날 연자방앗간에 찾아온 거지들 대접
우리 집 옆에는 연자방앗간이 있었습니다. 방앗간 안에 있는 불 싸라기가 밖으로 새나가지 않게끔 사방을 잘 둘러막아 겨울에도 웃풍이 없이 꽤 훈훈했습니다. 어쩌다 집 안의 아궁이에서 숯불이라도 얻어다 피우면 온돌방보다 더 뜨뜻했습니다. 팔도를 떠돌아다니며 구걸을 하는 거지들 중에는 우리 집 연자방앗간에 터를 잡고 겨울을 나는 이들이 여럿 있었습니다. 나는 그 거지들이 들려주는 바깥세상 이야기가 재미나서 걸핏하면 연자방앗간으로 찾아들었습니다. 어머니는 아들이 친구 삼은 거지의 밥까지 같이 차려서 방앗간으로 밥상을 가져오셨습니다. 내 숟가락 네 숟가락도 없이 밥 한 그릇을 같이 떠먹고, 담요 한 장을 나눠 덮으며 함께 겨울을 보냈습니다. 한겨울이 지나고 봄이 되어 그들이 멀리 떠나고 나면 그들이 돌아올 다음 겨울이 기다려지곤 했습니다. 몸이 헐벗었다고 해서 마음까지 헐벗은 건 아닙니다. 그들에게는 분명 따뜻한 사랑이 있었습니다. 나는 그들에게 밥을 주었고 그들은 내게 사랑을 나눠주었습니다. 그들이 가르쳐준 깊은 우정과 따뜻한 사랑은 오늘까지도 내게 큰 힘이 되고 있습니다.세계를 돌며 가난과 배고픔에 고통받는 어린이들을 볼 때마다 남들에게 밥을 먹이는 데 조금도 아낌이 없으셨던 할아버지의 모습을 떠올립니다. (평화를 사랑하는 세계인으로 p.23)
21.10.24 -
평화를 사랑하는 세계인으로
열한 살 때 섣달그믐날 일화
일제강점기 시절 만주로 피난을 떠나던 이들이 지나던 길목이 평안북도 선천宣川이었는데, 우리 집이 바로 선천으로 가는 큰길가에 있었습니다. 집도 땅도 모두 일본인들에게 빼앗기고 살 길을 찾아 만주로 향하던 사람들이 우리 집 앞을 지나갔습니다. 어머니는 집 앞을 지나가는 팔도 사람들에게 언제든 밥을 해서 먹이셨습니다. 거지가 밥을 달라고 하는데 어머니가 냉큼 밥을 내가지 않으면 할아버지가 먼저 당신 밥상을 번쩍 들고 나가셨습니다. 그런 집안에 태어나서인지 나도 평생 밥 먹이는 일에 매달려 살았습니다. 내게는 사람들에게 밥을 먹이는 일이 다른 무엇보다 귀하고 소중합니다. 내가 밥 먹을 때 밥을 못 먹는 사람이 있으면 마음이 아프고 목이 메어 숟가락질하던 손이 그냥 멈춰버립니다.열한 살 때였습니다. 섣달그믐날이 다가와 마을 전체가 떡을 하느라 분주한데, 형편이 어려워 밥을 굶는 이웃이 있었습니다. 나는 그 사람들의 얼굴이 눈에 선하여 온종일 집 안을 뱅뱅 돌며 어찌할까 고민을 하다가 결국 쌀 한 말을 지고 뛰쳐나갔습니다. 식구들 몰래 쌀자루를 내가느라 자루에 새끼줄 하나 엮어 맬 겨를도 없었습니다. 그래도 어깨에 쌀자루를 짊어진 채 힘든 줄도 모르고 가파른 산비탈 길을 이십 리나 겅중겅중 뛰었습니다. 배고픈 사람들을 배불리 먹일 생각을 하니 기분이 좋아 가슴이 벌렁벌렁 풀무질을 해댔습니다. (평화를 사랑하는 세계인으로 p.22)
21.10.24 -
평화를 사랑하는 세계인으로
밥 먹이는 가풍
나는 평안도 정주군 덕언면 상사리 2221번지에서 아버지 남평 문씨 문경유文慶裕와 어머니 연안 김씨 김경계金慶繼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기미독립운동이 일어난 이듬해인 1920년 음력 1월 6일이 내가 태어난 날입니다. 상사리에는 증조할아버지 때 이사를 했다고 합니다. 수천 석의 농사를 손수 지으시며 자수성가로 가문을 일으키신 증조할아버지는 술과 담배는 입에도 대지 않으시고 그 돈으로 다른 사람에게 밥 한 끼라도 더 먹이는 것을 보람으로 아는 분이셨습니다. 돌아가실 때는 ‘팔도강산 사람에게 밥을 먹이면 팔도강산에서 축복이 몰려든다’는 유언을 남기셨습니다. 그래서 우리 집 사랑방은 사람들로 늘 북적거렸습니다. 우리 동네 너머 사람들까지도 ‘아무 동네 문씨 댁에 가면 밥을 거저 준다’는 것을 모두 알 정도였습니다. 어머니는 그 고단한 수발을 척척 해내면서 불평 한번 하지 않으셨습니다. 잠시도 쉬는 법이 없을 만큼 부지런하셨던 증조할아버지는 틈틈이 짚신을 삼아 장에 내다 파셨고, 늙어서는 “후대에 우리 자손이 잘 되게 해주십시오” 하고 빌면서 오리를 여러 마리 사서는 놓아주시곤 했습니다. 또 사랑방에 한문 선생을 들여 동네 청년들에게 글을 무료로 가르치셨습니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증조할아버지에게 ‘선옥善玉’이라는 호를 지어주고 우리 집을 일컬어 ‘복 받을 집’이라고 불렀습니다.하지만 증조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내가 자랄 적에는 그 많던 재산이 모두 날아가고 그저 밥술이나 먹고살 정도였습니다. 그래도 밥 먹이는 가풍만은 여전해서 식구들이 먹을 밥이 없어도 남을 먼저 먹였습니다. 그 덕분에 내가 걸음마를 떼자마자 배운 것이 바로 남에게 밥을 먹이는 일이었습니다. (평화를 사랑하는 세계인으로 p.21)
21.10.24 -
평화를 사랑하는 세계인으로
오산집 쪼끔눈이
나는 눈이 아주 작습니다. 어찌나 작은지 어머니는 나를 낳으시고는 “우리 아기 눈이 있나 없나?” 하며 일부러 눈을 벌려보셨다고 합니다. 그러자 갓 태어난 내가 눈을 깜빡깜빡해서 “어머나, 우리 아가 눈이 있기는 있구나!” 하며 기뻐하셨답니다. 그렇게 눈이 작았던 탓에 어려서는 ‘오산집 쪼끔눈이’라고 불렸습니다.그래도 눈이 작아 볼품없다는 얘기는 별로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관상을 좀 볼 줄 아는 이들은 내 작은 눈에 종교 지도자의 기질이 들어있다고 합니다. 카메라의 조리개도 구멍을 좁힐수록 더 멀리 볼 수 있는 것처럼 종교 지도자는 남보다 멀리 내다보는 선견이 있어야 하는 점에서 그런가 봅니다. 내 코도 별나기는 마찬가지여서 한눈에 봐도 누구 말도 듣지 않을 것 같게 생긴 고집불통 코입니다. 관상이 영 허튼소리만은 아닌 것이, 내가 살아온 날들을 돌아보면 ‘이렇게 살려고 그렇게 생겼나’ 싶습니다. (평화를 사랑하는 세계인으로 p.20)
21.10.24 -
평화를 사랑하는 세계인으로
평화에 대하여
내가 태어난 1920년은 일본이 우리나라를 강제로 점령하고 있던 때였습니다. 해방 이후에도 6·25전쟁과 외환위기 등 힘겨운 혼란을 여러 차례 겪으며 이 땅은 평화와는 거리가 먼 세월을 보내야 했습니다. 이런 아픔과 혼란은 비단 우리나라만의 일은 아니었습니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과 베트남전쟁, 중동전쟁 등 세상 사람들은 끊임없이 서로를 미워하며 총을 겨누고 폭탄을 터뜨렸습니다. 살이 찢기고 뼈가 부러지는 환란을 겪은 이들에게 평화란 꿈에서나 그려보는 허황된 것이었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평화를 실현하는 것은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나를 둘러싼 공기, 자연환경, 그리고 사람에게서 우리는 쉽게 평화를 구할 수 있습니다. 들판을 내 집처럼 생각하고 살았던 어린 시절, 나는 아침밥 한 그릇을 뚝딱 비우고 뛰쳐나가 온종일 산으로 강으로 쏘다녔습니다. 온갖 새와 동물들이 살고 있는 숲 속을 누비며 풀과 열매를 따먹다보면 온종일 배가 고픈 줄도 몰랐습니다. 어린 마음에도 숲 속에만 들어가면 몸과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을 느꼈습니다.산에서 뛰놀다 잠이 든 적도 많았습니다. 그럴 때면 아버지께서 숲으로 나를 찾으러 오셨습니다. “용명아! 용명아!” 하는 아버지의 목소리가 멀리서 들리면 자면서도 웃음이 절로 나게 반가웠습니다. 나의 어릴 적 이름은 용명龍明입니다. 나를 부르는 소리에 얼핏 잠이 깼지만 잠든 척하고 아버지 등에 덥석 업혀가던 그 기분, 아무 걱정도 없이 마음이 척 놓이는 기분, 그것이 바로 평화였습니다. 그렇게 아버지 등에 업혀 평화를 배웠습니다.내가 숲을 사랑한 것도 그 안에 세상의 모든 평화가 깃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숲 속의 생명들은 싸우지 않습니다. 물론 서로 잡아먹고 잡아먹히지만, 그것은 배가 고파 어쩔 수 없이 그러는 것이지 미워서 그러는 것이 아닙니다. 새는 새끼리, 짐승은 짐승끼리, 나무는 나무끼리 서로 미워하는 법이 없습니다. 미움이 없어야 평화가 옵니다. 같은 종끼리 서로 미워하는 것은 사람뿐입니다. 나라가 다르다고 미워하고, 종교가 다르다고 미워하고, 생각이 다르다고 또 미워합니다. (평화를 사랑하는 세계인으로 p.14)
21.1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