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스 1세
Charles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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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스튜어트왕조의 잉글랜드 왕.
[내용] 1625년 제임스 1세 사후 스튜어트 왕가의 두 번째 왕으로 즉위했다. 찰스 1세는 왕권신수 사상을 고수한 전제적인 통치방식으로 의회와 잦은 마찰을 빚었다. 왕권신수설은 왕의 권력은 신이 내려준 것이므로 국민은 왕에게 절대적으로 복종해야 한다는 사상이다. 의회주의의 전통이 강했던 영국은 왕권신수설을 비판하며 찰스 1세에게 헌법상의 인민의 자유와 권리를 존중할 것을 거듭 요청하였지만, 그는 의회를 철저히 무시하고 사치를 일삼으며 마음대로 세금을 거두는 등 악정(惡政)을 일삼았다. 이에 1628년 영국의회는 의회의 승인 없는 과세는 불가하고, 국민의 각종 자유권을 보장해 달라는 내용을 골자로 하는 권리청원을 제출하였다. 이에 격분한 찰스 1세는 의회를 해산하고 11년 동안 의회를 소집하지 않았다.
1640년 스코틀랜드의 반란 처리비용의 문제로 의회를 다시 소집하였으나, 의회가 왕권을 제한하는 법률을 통과시키고 왕의 측근들을 반란죄로 처형하자 의회와 전면 대립하였다. 이후 찰스 1세와 의회의 대립은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커졌고, 이는 왕당파와 의회파의 내전으로 더욱 확대되었다. 전투 초기에는 왕당파가 우세하였으나 올리버 크롬웰이 이끌던 철기군의 활약으로 차츰 전세가 의회파 쪽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마침내 1645년 네이즈비전투에서 의회파가 왕당파에게 대승을 거두면서 승리를 확정지었다. 내전에서 패한 후 찰스 1세는 스코틀랜드로 도망쳤지만 곧 체포되었고, 1649년 1월 인민의 적이라는 죄목으로 화이트홀 궁전 앞에서 처형당했다.
『원리강론』에서 찰스 1세는 아벨형 민주주의를 설명하는 과정에서 한 번 언급된다. 프랑스의 민주주의는 가인형 인생관인 무신론 및 유물론의 주창자들이 절대주의 사회를 타파하기 위해 실현한 가인형 민주주의였다. 이에 반하여 영국의 민주주의는 아벨형 인생관의 결실체인 열광적인 기독교 신도들이 신교의 자유를 찾기 위하여 절대주의와 싸워 승리함으로써 실현한 아벨형 민주주의에 해당한다. 영국은 찰스 1세가 전제주의와 국교를 강화하기 위해 청교도들을 탄압하자 이에 맞서 크롬웰을 중심하고 청교도혁명을 일으켰다. 이후 1688년에는 제임스 2세의 가톨릭 부활정책에 대한 반발로 명예혁명이 일어났다. 이처럼 영국의 혁명은 내적인 신교의 자유와 해방을 위해 일어난 운동이었으며, 이를 기반으로 아벨형 민주주의가 확립되었다.
☞ ‘청교도 혁명’, ‘아벨형 민주주의’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