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요한
李耀翰
항목체계 인물
출신지 평안북도 선천군 봉산동 성별 남
생년월일 1916.9
[정의] 최초로 입교한 목사로 신학교육의 기초를 다진 36가정 원로.
[내용] 1916년 9월 평안북도 선천군 봉산동의 기독교 가정에서 출생하여 신천읍의 장로교회에 다니며 성장하였다. 만주 봉천으로 이주하여 중국인 중학교를 다니다가 중국 하남성으로 이주하였고, 1935년부터 중국 하북성 한국인장로회 전도사로 활동하였다. 1943년 일본 도쿄 소재의 동아신학교를 수료하고 일본신학교로 편입하려 하였으나 신사참배를 하지 않아 퇴학을 당하였다.
해방 후 1946년 황해도 영일감리교회 전도사로 활동하다 남하하여 서울에서 지내게 되었다. 기도 중에 ‘한국 주 재림’이라는 계시를 받았고 남산의 청해신학교 2학년에 편입하여 한 학기를 다니며 남대문교회에서 임시로 목회를 하였다. 그때 옥세현을 만나 참아버님에 관련된 이야기를 들었다. 한국동란 발발 후 부산을 거쳐 제주도에서 기도 정성을 들이며 이봉운 가족과 교류하였다. 1952년 부산에서 참아버님을 뵙고 ‘원리’를 듣고서 깊은 감동을 받았다. 12월 통일교회에 입교한 뒤 목사들과 신령한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말씀을 전하였다.
1953년 8월 대구교회 전도사로 발령받아 여러 핍박 중에 교회를 세우기 위해 노력하였다. 이후 1957년 부산교회 전도사, 1958년 경상 지구장, 1961년 대구 교회장, 1961년 경북 지구장 겸 제4지구 기대장, 1965년 전국 순회사, 1965년 서울 제3특별지역장, 1965년 전국순회사실장, 1966년 서울 제2특별지역장, 1968년 협회 가정부장, 1968년 서울 특별지구장 겸 본부 특별지역장, 1969년 성북 지구장, 1970년 중앙수련소장, 1970년 본부교회 부교회장, 1974년 협회 전도부장, 1974년 협회 순회사실장, 1978년 본부교회 특별교역장 등 공직에 헌신하였다. 특히 1977년부터 통일신학교 교장으로 시무하면서 목회자의 양성에도 힘썼다. 1961년 원심희와 36가정 축복결혼을 받았으며, 1996년 스웨덴 국가메시아 및 분봉왕으로 봉직했다. 2019년 1월 4일 104세의 일기로 성화하여 ‘축 신통일한국시대개문 충성자(神統一韓國時代開門 忠誠子)’의 휘호를 받았다.
☞ ‘옥세현’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