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리강론 예정론
原理講論 豫定論 / Predestination
항목체계 사상교리
[정의] 『원리강론』 전편 제6장의 내용으로 하나님의 예정에 대한 통일원리적 이해.
[내용] 뜻에 대한 예정
하나님은 인간의 타락으로 인하여 창조목적을 이루지 못하였다. 하나님의 뜻은 창조목적을 다시 찾아 이루려는 것이며 복귀섭리의 목적을 이루는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고 창조목적을 이루려는 뜻을 세웠으나 인간의 타락으로 그 뜻을 이루지 못하였기 때문에 그 뜻을 다시 이루기 위하여 그것을 다시 예정하고 복귀섭리를 진행하였다. 하나님은 이 뜻을 선(善)으로 예정하고 이루며 악(惡)으로 예정하고 이룰 수 없다. 하나님은 선의 주체이므로 창조목적도 선이요, 복귀섭리의 목적도 선이어서 그 목적을 이루려는 뜻도 선이다. 하나님은 창조목적을 이루는 데 있어서 반대되거나 장애가 되는 것을 예정할 수 없다. 예를 들어 인간의 타락이나 타락한 인간에 대한 심판 혹은 우주의 멸망 등을 예정할 수 없다. 악의 결과는 인간 자신이 사탄과 연관되어 그의 책임분담을 다하지 못함으로써 일어난다.
하나님은 유일하고 영원하며 불변한 절대자이므로 하나님의 창조목적도 유일하고 영원하며 불변한다. 따라서 창조목적을 다시 이루려는 복귀섭리의 뜻도 유일하고 불변하며 절대적이다. 그러므로 뜻에 대한 예정은 절대적이다. 하나님은 뜻을 절대적인 것으로 예정하기 때문에 만일 이 뜻을 위하여 세워진 인물이 그것을 이루지 못하면, 하나님은 다른 인물을 세워서 끝까지 그 뜻을 이루어 나아간다.
예를 들면 아담을 중심하고 창조목적을 이루려고 하였던 뜻이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그 뜻에 대한 예정은 절대적이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예수님을 후 아담으로 보내어 그를 중심하고 뜻을 다시 이루려고 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유대인들의 불신으로 인해 뜻이 완전히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예수님은 재림하여 그 뜻을 기필코 완수할 것을 약속하였던 것이다.
뜻 성사에 대한 예정
하나님의 창조목적은 인간이 책임분담을 완수함으로써 이루어지도록 되어 있다. 하나님의 창조목적을 다시 찾아 이루려는 복귀섭리의 뜻은 절대적이기 때문에 인간이 관여할 수 없으나, 뜻의 성사에는 인간의 책임분담이 가담된다. 복귀섭리의 목적을 이루려는 뜻은 절대적인 것이지만, 그 뜻의 성사는 상대적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95퍼센트 책임분담에 중심인물이 담당해야 할 5퍼센트 책임분담이 가담되어서만 그것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예정한다. 인간의 책임분담 5퍼센트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책임분담에 비하여 극히 작은 것임을 표시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인간 자신에게는 100퍼센트에 해당한다.
예를 들면 아담 해와를 중심한 뜻 성사는 그들이 선악과를 따먹지 않는 것으로 책임분담을 완수함으로써 이루어지도록 예정하였다. 노아를 중심한 복귀섭리도 노아가 방주를 제작하는 일에 충성을 다하는 것으로 그의 책임분담을 완수함으로써 뜻이 이루어지도록 예정하였다. 예수님의 구원섭리도 타락한 인간이 그를 메시아로 믿고 따르는 것으로 책임분담을 완수함으로써 그 뜻이 이루어지도록 예정되어 있었다.
이 모든 경우를 보면, 인간이 담당했던 책임분담은 하나님이 그의 책임분담으로 담당한 수고와 은사에 비하여 얼마나 작은 것인지 알 수 있는 동시에 섭리적 중심인물들이 그들의 책임분담을 감당치 못함으로써 복귀섭리를 연장시켜 왔던 사실로 미루어 보아 이 경미한 책임분담이 인간 자신에게는 힘에 겨울만큼 큰 것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인간에 대한 예정
어떤 인물을 중심한 하나님의 뜻 성사에는 그 자신이 언제나 인간책임분담을 완수해야만 된다는 필수적인 요건이 따라다닌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어떤 인물을 사명자로 예정하는 것은 95퍼센트의 하나님 책임분담에 대하여 5퍼센트의 인간 책임분담 수행이 합하여서 그 인물을 중심한 뜻이 100퍼센트 완성되어 그러한 인물이 될 수 있도록 예정한다. 그러므로 그 인물이 자신의 책임분담을 다하지 못하면 하나님이 예정한 대로의 인물이 될 수 없다.
예를 들면 하나님은 모세를 택할 때, 그가 자신의 책임분담을 완수함으로써만 선민을 가나안까지 인도할 수 있는 영도자가 되도록 예정하였다. 그러나 그가 가데스바네아에서 반석을 두 번 침으로써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여 자신의 책임을 다하지 못하게 될 때 모세에 대한 예정은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목적지를 향하여 가던 도중에 죽고 말았다.
하나님 구원섭리의 목적은 타락한 피조세계를 창조본연의 세계로 완전히 복귀하려는 것이다. 따라서 그 시기의 차이는 있으나 타락한 인간은 누구나 다 빠짐없이 구원을 받도록 예정되어 있다. 그런데 하나님의 창조가 그러했듯이 재창조 역사인 구원섭리도 일시에 이루어질 수는 없는 것이며, 그것은 하나로부터 시작하여 점차 전체적인 것으로 넓혀 가는 것이다. 하나님의 섭리가 그렇기 때문에 구원섭리를 위한 예정에서도 먼저 중심인물을 예정하고 부르는 것이다.
하나님의 예정에서 복귀섭리의 중심인물이 될 수 있는 조건은 다음과 같다. 첫째, 그는 먼저 복귀섭리를 담당한 선민으로 태어나야 한다. 둘째, 같은 선민 중에서도 선(善)의 공적이 많은 선조의 후손이어야만 한다. 셋째, 똑같은 선의 공적이 많은 선조의 후손이라도 뜻을 이루는 데 필요한 천품을 타고나야 한다. 넷째, 같은 천품의 인간이라도 후천적인 조건이 구비되어 있어야 한다. 다섯째, 후천적인 조건마저 똑같이 갖춘 인물들 중에서도 보다 하늘이 필요로 하는 때와 장소에 맞추어진 개인이 먼저 택함을 받는다.
예정설을 뒷받침하는 성구의 해명
성서에 하나님의 예정을 뒷받침해 주는 성구들이 많이 있는데, 그 성구들은 어떻게 이해될 수 있는가? 『원리강론』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① 로마서 8장 29절-30절: 하나님은 미리 아신 사람을 미리 정하사, 미리 정하신 이를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이를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심을 받은 이를 또한 영화롭게 하신다. 하나님은 전지하므로 어떤 사람이 복귀섭리의 중심인물이 될 수 있는 조건을 갖추고 있는지 알고, 그 인물을 예정하고 부른다. 그러나 부르는 하나님의 책임분담만으로는 그가 의롭다 함을 얻어 영화를 누리는 데까지 이를 수 없다. 그는 부름 받은 입장에서 자기의 책임을 완수할 때 비로소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있는 것이고, 의롭다 함을 얻은 후에야 또한 하나님이 주는 영화를 누릴 수 있게 된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주는 영화도 인간이 책임분담을 다함으로써만 누릴 수 있도록 예정되는 것이다. 로마서 성구에는 인간 책임분담에 대한 말씀이 생략되어 있기 때문에 그것들이 오직 하나님의 절대적인 예정으로 이루어지는 것같이 보이는 것이다.
② 로마서 9장 15절-16절: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였으니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복귀섭리의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어떠한 인물이 가장 적합한가 하는 것은 하나님만이 미리 알고 택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인물을 택하여 긍휼히 여기거나 혹은 그를 불쌍히 보는 것은 하나님의 특권이기 때문에 인간이 원함으로 말미암아 되는 것이 아니요, 또 인간의 노력으로 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이 성구는 하나님의 권능과 은총을 강조하는 말씀이다.
③ 로마서 9장 21절: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이 없느냐? 하나님은 인간으로 하여금 그의 창조성을 닮게 함으로써 피조세계의 주인으로 세우기 위하여 인간 책임분담이라는 조건을 세웠다. 그런데 인간은 이 조건을 스스로 범하여 타락하고 말았다. 타락한 인간은 마치 쓰레기와 같이 버림을 받은 존재가 되었기 때문에 설혹 하나님이 이러한 인간을 어떻게 취급한다 하더라도 결코 불평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가르치기 위한 말씀이다.
④ 로마서 9장 10절-13절: 하나님이 태중에서부터 야곱은 사랑하시고 에서는 미워하시어 장자 에서가 차자 야곱을 섬기리라. 에서와 야곱은 복중(腹中)에 있어서 아직 선악 간의 아무런 행동의 결과도 나타낼 수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에서를 미워하고 야곱을 사랑한 것은 복귀섭리 노정의 원칙을 맞추기 위함이었다. 에서와 야곱을 쌍태로 세웠던 것은 그들을 각각 가인과 아벨의 자리에 갈라 세워 아벨의 자리에 있는 야곱이 가인의 자리에 있는 에서를 굴복시킴으로써 일찍이 아담 가정에서 가인이 아벨을 죽임으로써 이루지 못하였던 장자기업 복귀의 뜻을 탕감복귀하기 위함이었다. 에서는 가인의 자리이므로 하나님의 미움을 받을 수 있는 자리에 있었던 것이며, 야곱은 아벨의 자리이므로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처지에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들을 실제로 미워하거나 사랑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그들 자신의 책임분담 수행여부에 따라서 좌우될 문제이다. 에서는 야곱에게 순종굴복하였기 때문에 미움을 받을 수 있는 처지에서 야곱과 같은 사랑의 축복을 받는 자리로 옮기게 되었다. 아무리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입장에 세워진 야곱이라고 할지라도 만일 그가 자기의 책임분담을 완수하지 못하였더라면, 그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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