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바누스 6세
울바누스 6世
항목체계 사상교리
[정의] 제202대 교황.
[내용] 제202대 교황으로 본명은 바르톨로메오 프리냐노였다. 1318년경 나폴리에서 태어났고, 아비뇽에서 신학을 공부했다. 1364년 나폴리 왕국의 아체렌자의 대주교로 서품을 받았고, 1377년에 바리의 대주교로 임명되었다. 교황 선출 전에는 교황청에서 상서국장으로 시무하였다. 1378년 3월 27일 교황청의 환도를 주도했던 교황 그레고리우스 11세가 선종하자 시민들은 교황청을 포위하고 로마인을 교황으로 선출하라는 대규모 시위를 벌렸다. 프랑스 출신이 교황으로 선출될 경우 다시금 교황좌가 아비용으로 돌아가게 될까봐 우려한 것이다. 시민들의 압박을 받은 추기경들은 서둘러 만장일치로 1378년 4월 8일 이탈리아 출신인 프리냐노를 202대 교황으로 선출하였다.
울바누스 6세는 아비뇽 유수로 실추된 로마의 권위를 회복하려는 개혁운동을 적극적으로 펼쳤다. 교회에 만연한 부패를 비판하면서 성직자들의 연금 중단과 뇌물 금지를 명하였고, 특히 아비뇽 유수기에 막대한 이권을 챙긴 프랑스 추기경들을 엄중히 다스렸다. 이에 반발한 추기경들은 아나니(Anagni)에서 회의를 열어 교황을 주살하려는 계획을 세웠으나, 울바누스 6세는 사전에 이를 간파하여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프랑스 추기경들은 1378년 8월 20일 울바누스 6세의 선출이 폭도들의 압력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므로 무효라고 선언하며 폰디에서 자신들만의 콘클라베를 열어 프랑스인 로베르 드 쥬네브를 새로운 교황으로 선출하였다. 울바누스 6세와 대립 교황 클레멘스 7세인 쥬네브는 40여 년간 서로를 적그리스도이자 교황좌를 탈취한 자로 매도하면서 각자의 정통성을 주장하였다.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은 교황을 재림 메시아를 위한 영적인 기대를 조성하고 국왕이 실제적인 기독교 이상을 이루어 나갈 수 있도록 인도하여 만왕의 왕에게 그 나라와 왕위를 인계해야 할 중요한 사명을 지닌 자라고 본다. 만약 교황이 하늘의 뜻에 따라 국왕과 하나 되어 메시아 이상이 실현된 기독왕국을 세웠더라면, 그 기대 위에 바로 메시아가 오실 수 있었다. 그러나 교황들은 교만에 빠져 하나님의 뜻 가운데 서지 못하였고, 거듭된 불신과 타락으로 재림주를 위한 영적인 기대를 조성하지 못하고 말았다. 이를 탕감복귀하기 위하여 하나님은 교황이 포로가 되어 남불 아비뇽에 유수되었다가 다시 풀려나는 섭리를 진행하였으나, 이후에도 교황들은 아비뇽 유수 전과 같은 입장으로 되돌아가 버리고 말았다. 이로 인해 교황을 중심한 하늘의 섭리는 실패로 끝나고 복귀섭리는 다시금 연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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