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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전은 2019년까지의 내용을 수록하였고 섭리의 변화에 따라 항목을 추가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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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냇골 성지

범냇골 聖地

항목체계 성지

[정의] 참아버님이 거주하던 범냇골 토담집을 중심한 부산 범일동 수정산 일대.

[내용] 참아버님이 남하하여 부산에 처음으로 정착한 범냇골 토담집을 중심한 부산시 동구 범일동 수정산 일대의 성지이다. 참아버님은 1950년 10월 14일 흥남감옥을 출감하여 평양에 도착하여 제자들을 찾았다. 12월 4일 김원필과 다리가 불편하여 자전거에 태워야 했던 박정화를 대동하여 남하하였다. 서울을 거쳐서 55일째인 1951년 1월 27일 부산 초량역에 도착하였다. 거처할 곳이 없어 역에서 추운 밤을 지내다가 일본 유학 시절에 친구였던 엄덕문을 만나 그의 집에 잠시 거처하게 되었다. 평양에서 피난을 위해 남하하던 중 헤어졌던 옥세현도 소문을 듣고 찾아왔다. 참아버님은 최하층 노동생활을 하였고, 여기저기 다니면서 밥을 얻기도 하였다.

참아버님은 1951년 5월부터 8월까지 4개월가량 범냇골 근처 나가야(長屋)에서 하숙을 했다. 나가야는 해방 전에 전기회사 직원들의 사택으로 썼던 곳이다. 방은 협소하여 누우면 머리와 다리가 벽에 닿을 정도였고, 친우 엄덕문이라도 찾아오게 되면 비딱하게 누워야 했다.

당시에 참아버님의 주된 일과는 ‘원리’ 집필이었다. 옆에서 연필을 깎기 바쁘게 속기로 집필하였다. 참아버님은 ‘원리’를 집필하는 동안 찬송을 부르며 울고 기도를 하였다. 그리고 흑석동에서부터 신앙적으로 가까웠던 이기완을 전도하였다. 이기완은 기독교를 믿는 독실한 신앙인으로 소화하기 힘든 참아버님의 말씀에 혼란스러워서 산상기도를 드리게 되었고, 그때에 ‘문선생의 말씀이 옳다.’라는 영적인 응답과 무형의 하나님이 참아버님의 몸 안으로 들어가는 환상을 보고 나서 결국은 입교하게 되었다.

참아버님은 1951년 초여름부터 주변에 건축자재가 될 만한 돌과 흙을 파 옮기었다. 1951년 8월 부산시 동구 범일4동(1970년부터는 범일6동) 1513번지, 범냇골 수정산(306미터) 중허리에 아담한 토담집을 지었다.

토담집은 두 평도 안 되는 단칸방으로 부엌은 따로 없었고, 바깥에 솥을 얹을 수 있는 부뚜막이 있었다. 허리를 펼 수 없는 낮은 지붕은 레이션 상자로 연결해서 가물면 하늘이 보였고, 비가 오는 날에는 비가 들어왔다. 비가 오면 방 한구석에 작은 샘이 솟았고, 밑에는 도랑물이 흐르는 소리가 들렸다.

토담집을 나와서 산 정상을 향해 10미터쯤 오르면 크고 평평한 바위가 있었다. 참아버님은 그곳에서 눈물을 흘리면서 기도를 하였다. 크게 통곡을 하면서 울었기에 그 바위를 눈물의 바위라고 불렀다. 겨울이 되어서 잠바 하나를 걸치고 구부린 채 몰아의 경지에서 기도에 집중하다 보면, 흰 눈이 등에 수북하게 쌓인 경우도 있었다.

참아버님이 토담집을 지을 당시에는 인적이 드물고 공동묘지가 많은 곳이었는데, 이후로 빈민촌이 들어섰다. 1990년대에 그 지역을 중심으로 도시개발이 시작되어 토담집 성지가 아스팔트 도로에 편입될 위기에 처했다. 교구장을 비롯하여 식구들이 각계에 청원을 하고 협조를 구해 비록 토담집은 철거하였으나, 그 자리에 범일전 건립을 허락받았다.

부엌 앞에 솟아난 돌을 파헤치니 그 아래로 큰 바위가 있었다. 그 바위를 중심하고 범일전이 지어졌다. 도시개발이 되는 과정에서 우여곡절을 거쳤지만, 범일전이 토담집의 역사를 묵묵히 지키고 있다.

참아버님은 범냇골 성지에 대해 “지금 현재 범일동은 세상으로 보면 호랑이가 산 고개를 넘나들며 사람을 잡아먹었다는 역사의 기록이 있는 골짜기라고요. 그렇기 때문에 제일 무서운 사람들, 역적이라든가 반역한 사람들을 갖다 묻는 그런 공동묘지가 있던 골짜기인데, 갈 데가 없어서 거기로 간 거예요.”라며 당시의 절박했던 상황을 설명하였다.

참아버님은 범냇골 토담집에서 ‘원리’의 집필을 계속하였다. 밤에는 부산도성을 보면서 명상에 잠기었고, 새벽이면 산에 올라 기도를 하였다. 때론 찬송을 되풀이하면서 울기도 했다. 김원필은 참아버님이 울면서 기도하는 소리와 노래 소리에 놀라서 깨곤 했다고 한다. 1951년 11월 18일 밤, 참아버님은 김원필을 깨워 불을 켜고 연필과 종이를 준비시키고 “내가 부르는 대로 적어 내려가라.”고 하였다. 그러고는 잠시도 쉬지 않고 한 번에 불러 주었다. 그때에 받아쓴 ‘원리’의 소제목이 ‘역사적 실, 두루마리의 원리적 해결은 한국에서 시작’이었다.

참아버님은 늘 식구를 그리워했다. 하나님은 상선 위에 앉은 참아버님의 주변에 수많은 식구들이 밀려드는 환상을 보여 주며 위로하였다. 1952년 2월부터 옥세현이 하늘로부터 책망을 받고 나서 작정하고 장기적으로 머물면서 부엌일을 맡아서 했다.

1952년 5월 10일 오전에 ‘원리원본’ 집필과 교정 및 교열작업을 마감하였다. 기록 제1권부터 기록 제5권으로 나누어서 쓰고, 각 권마다 두 곳에 구멍을 내어 묶은 총 690여 쪽의 원고이다. ‘원리원본’은 이후에 강현실, 김원필, 이수경, 유효원 등이 직접 필사한 이후로 여러 단계의 과정을 거쳐서 식구들에게 전해졌다.

범냇골 성지에는 영적인 인도를 따라 새로운 식구들이 찾아왔다. 기독교 전도사인 강현실과 목사 이요한이 찾아와 입교하였다. 1952년 5월 10일 ‘원리원본’ 집필을 마친 오후에 강현실이 찾아왔다. 강현실은 경북 영주 출신으로 고려신학교 2학년 학생이면서 범천교회에서 시무하는 전도사였다. 범냇골에 이상한 청년에 대한 소식을 듣고 매일 세 시간씩 일주일간 기도한 끝에 스스로 토담집을 찾아왔다. 이후 말씀과 영적 역사를 통해 입교하였다.

1952년 12월 1일에는 목사 이요한이 찾아왔다. 이요한은 평북 선천에서 유소년기부터 장로교 신앙을 갖고 24세 때 목회를 시작했으며 일본 동부 신학교 재학 중 신사 참배 거부로 퇴학까지 당했다. 해방 직후 서울 등지를 거치며 ‘재림주 한국 강림’이라는 계시를 받았다. 제주도에 피난을 갔다가 부산으로 나왔을 때 서울에서 신앙적 교분이 있던 옥세현을 만나 범냇골로 와서 말씀을 듣게 되었다. 그 외에도 많은 식구들이 입교하였다.

참아버님은 식구들이 오면 쉬지 않고 말씀을 하였고, 모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들었다. 참아버님은 하나님과 예수님의 사정을 생각하며 많이 우셨다. 범냇골 토담집은 늘 잔칫집처럼 들떠 있었으며, 날마다 주일 같은 분위기로 사람들이 붐볐다. 식구들은 떡과 음식을 장만해 와서 말씀을 듣다가 간식으로 나눠 먹기도 했다.

참아버님은 돈을 있는 대로 다 털어서 쇠고기를 사다가 실컷 먹이기도 했다. 자신은 단벌이면서 누가 오면 옷을 사 주었고,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들을 아낌없이 도와주었다.

참아버님은 말씀을 전할 때, 비록 옷은 남루하고 밥을 굶는 처지였지만 하늘나라를 이루겠다는 마음으로 큰 소리로 하였다. 서너 사람을 놓고 말씀했지만 수억의 기독교인과 수많은 인류를 상대한다고 생각하였다. 범냇골 시절에 참아버님은 ‘어둠에 싸인 세력’이라는 글을 썼고, 김원필 씨가 메모해 놓았다가 나중에 공개했는데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의 성가가 되었다.

1984년 7월 20일 참아버님이 미국 댄버리교도소에 수감이 되었을 때 인종차별과 종교적 박해라며 많은 성직자들이 규탄하면서 백악관 앞에서 시위를 하였다. 나무 십자가에 매달리는 퍼포먼스를 하기도 하였다. 이들은 고통을 같이 나눈다는 의미에서 동고회(同苦會)를 조직하였다. 참아버님은 이들이 심정의 조국인 한국을 방문하도록 기회를 제공하였다. 많은 성직자들이 한국을 찾아왔고 범냇골 성지를 찾았다. 토담집에 들린 후 눈물의 바위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를 하면서 많은 영적인 역사가 일어났다. 기도를 하고 오랫동안 고통을 안겨 준 고질병이 낫는 것을 체험한 성직자도 있었다.

눈물바위를 지나서 더 올라가면 산 정상에 오르게 된다. 그곳에는 수목이 우거져 있고, 고요히 명상을 할 수 있는 장소가 있다. 이곳에서도 참아버님은 많은 기도를 하였다. 그곳을 범냇골 제1성지라고 부르기도 한다. 푸른 하늘을 가슴에 품을 수 있고, 저 멀리 끝없이 펼쳐지는 바다를 가슴에 껴안으면서 호연지기를 기르기에 좋은 지리적 장점을 갖는다.

지금도 성화학생이나 식구들이 범냇골 성지를 순례하면서 참아버님이 품었던 호연지기와 세계와 천주를 구원하겠다는 굳센 의지를 상속받고 있다.

범냇골 성지 연혁

- 1951.05.01. 범냇골 어귀 나가야에서 김원필 씨와 4개월간 하숙

- 1951.08. 범냇골 토담집 지음

- 1965.02.28. 범냇골 성지 건물 다시 매입

- 1978.10.29. 범일전(凡一殿) 개관식

- 2001.03.18. 범냇골 성역화추진위원회 발족

- 2010.11.21. 범일전기념관 리모델링 개관 기념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