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선명 선생 송덕비
文鮮明 先生 頌德碑
항목체계 성지
건립시기 2016.5.31
소재지 경기도 연천군 청산면 장탄리 산 300-5 정주공원
[정의] 참아버님의 공덕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기념비.
[내용] 경기도 연천군 청산면 장탄리에 참아버님의 공덕을 기리기 위해 세운 기념비이다. 1984년 정주군민회에서 송덕비를 제작하였으나 그동안 세우지 못하고 일신석재에서 보관하고 있다가 2016년 5월 31일에 건립되게 되었다. 건립식의 명칭은 ‘천지인참부모 문선명 총재 송덕비 봉헌식’이었고, 송덕비문은 이병도 박사가 썼다. 건립기념식은 정주공원에서 5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거행되었다.
참아버님 송덕비 비문 전문은 다음과 같다.
“반만년 역사를 이어온 나라의 운세가 기울매 일제가 침략의 마수를 뻗쳐 국권마저 빼앗으니 삼천리강토는 침략자의 병마에 짓밟히었고 백성이 도탄에 빠져 신음하며 울부짖는 소리가 반도에 메아리쳤다.
이에 하늘인들 어찌 무심할 수 있으리오. 어둠이 깊으면 여명이 오듯 새 세기를 잉태할 시운을 따라 하늘이 예비하신 한 분을 내시니, 1920년 1월 6일 평북 정주 설봉 묘두산 아래 상사리 남평 문씨의 가문에 탄생한 참아버님을 이름이다.
인걸은 지령이라 본래 정주는 고래로부터 문향으로서 많은 영걸을 내어 서구문물을 깨치고 이름을 떨친 이가 많았다. 선생의 가계 중 선고의 위는 경유요, 자당은 김문의 경계 여사이다. 조부의 위는 치국이며 증조는 위가 정흘이었다. 조고 치국은 혜안이 있어 선생이 장차 대인이 될 것을 예견하였으니 과연 성장하매 용모가 준수하며 기골이 장대하였고 성품은 호방진격 자신이 넘쳤으며 굽힐 줄 모르는 집념이 엿보였다.
10세 안팎에 높은 이상을 가슴에 품으니 학문을 한다면 다방면에서 권위 있는 석학이 되겠다는 포부를 가졌다. 학업을 닦으매 향리 오산에서 보통교육을 받으며 애국의 정신을 가다듬었고 상경하여 중등교육과정에 정진하였다. 고등교육은 피압박 민족의 한을 품은 채 일본 와세다에서 이수하였다.
불의에 굽힘이 없이 민족 수난기의 지하 항일운동에 가담한 사실이 뒤늦게 발각되어 경기도경찰부의 체포로 혹독한 고문과 옥고를 치렀다.
선생은 일찍이 인생문제에 남달리 고심하였으며 종교의 구극에 매달려 그 숙제를 풀고 인류 구제를 결심하였는 바 수많은 역경을 극복하였다. 섭리의 일선에 서서 하늘이 내리신 소명을 받들어 그 대임을 수행하고 해방 후 적도 평양에 들어가 복음전파에 극력하다가 공산 감옥의 고초를 겪었다.
수다한 생명이 생사의 기로에서 허덕이던 흥남감옥에서 천우신조로 견디어 UN군이 북진하자 출옥, 자유의 남한 땅에서 인류 구원의 대역사를 시작하였다. 1950년대 민족이 참담한 비극에 휩쓸려 방황할 때 통일교회를 창립, 섭리의 거보를 내디뎠다. 이는 선생의 성인다운 기상과 도량에 기인한다.
30여 년이 지난 오늘 선생의 위용은 세계적 종교 지도자로 태산처럼 솟아 있다. 이 종교운동은 한국을 성지 삼아 날로 그 세를 더해가니 중인은 금세기의 기적이라 일컬으나 이는 오로지 투철한 경천애인의 정신을 바탕으로 한 선생의 피와 땀과 눈물의 결정이다. 뿐만 아니라 절망에서 헤매다 새 삶을 회복한 세계인의 관심은 날로 더하여 반만년 역사에 없었던 국위를 세계에 떨친다. 이러한 세계적인 구세경륜은 종교에 그치지 아니하고 사상, 미증유의 종교와 과학의 융합점을 마련하여 하나의 진리를 입증함으로써 종교와 과학의 상보 조화통일을 꾀하게 되니, 이는 인류의 문화를 새롭게 할 금세기의 대도를 높이 세움이다.
공생·공영·공의주의에 입각한 통일문화 세계를 내다보는 선생은 세계의 석학들을 평화운동에 결집시키며 언론기관을 세워 세계 여론을 바르게 선도하니 범인은 구상키도 어려운 일이다. 선생의 평화추구의 집념은 종교 간의 분쟁과 인종차별로 빚어지는 비극을 막고자 세계종교회의까지 창설하고 또 세계의 정치 지도자와 경제인들까지 일석에 모으니 경천동지의 경지를 넘는 장거라 아니할 수 없다. 선생의 거인 됨은 민주와 공산 사상의 대립으로 빚어지는 해독에서 인류를 건져내려는 웅지에서도 드러난다. 유물사상을 극복하고 그 폐해에서 불행을 겪는 이들까지 구제하려 승공사상을 창도, 세계 승공운동의 선봉에 서시니 그 대기됨을 어찌 다 측량하랴. 공산감옥의 체험이 이렇듯 귀중하게 기여되니 불원 장막세계의 인민들이 밝은 세상을 보리라. 사람은 생각이 깊으면 행동이 둔하고 결단이 빠르면 사려가 깊지 못한 법이거늘 선생의 생각과 실천이 하나같이 미치지 않는 데가 없어 필시 신인인 듯 싶으니 뉘라서 판단하리오.
선생은 이렇듯 거인의 기상으로 세계적 위업을 이룩하면서도 한편 세심한 데까지 마음을 써서 정주군 발전을 위하여 힘을 기울여 왔다. 근자에는 정주장학회에 거재를 혜척하여 후학들의 배움 길을 열어주니 군민이 한 마음으로 감사히 여겨 덕을 기린다. 그러나 선생의 높고 큰 자취를 뉘라서 필설로 다 그려낼 수 있으리오.
놀라운 일이로다. 정주 이 고을에서 이처럼 거성이 날 줄 짐작이나 하였으랴. 향촌의 성의를 모아 비를 세움은 선생의 공적을 현창하여 후세에 길이 구람되게 하려 함이로다. 정주군민회로부터 참아버님 송덕비문의 제술을 청함이 있어 평소 참아버님을 숭모하는 마음에서 삼가 졸문이나마 위와 같이 기술하는 바이다.
斗溪 이병도 지음 廣州 안광석 前隷, 東坡 김소동 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