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선주
吉善宙
항목체계 종교일반종교학
[정의] 우리나라 장로교 초기의 대표적 지도자이자 1909년 평양 대부흥운동을 이끈 부흥목사.
[내용] 우리나라 장로교 초기의 대표적 지도자로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시무하고 있던 중 1909년 대부흥운동을 이끈 부흥목사이다. 영계(靈溪) 길선주는 평안남도 안주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한학을 수학하였고, 차력술을 연마하였으며, 19세부터 관성교에 심취하고 선도(仙道)를 수련하면서 영적인 갈구의 도정에서 도반 김종섭(金鍾燮)의 소개로 기독교를 접했다. 기독교 교리서를 읽으며 관심을 가지게 된 길선주는 “예수님이 참구주인지 알려 주옵소서!”라고 간절히 기도하던 중 “길선주야, 길선주야, 길선주야!”라고 세 번 부르는 소리를 듣고 방성대곡하며 부복한 체험을 통해 기독교 신앙으로 회심하였다고 한다. 그 뒤 1879년 29세 때 세례를 받고 1901년 평양 장대현교회의 장로가 되었으며, 1903년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여 1907년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장로교 목사 7인으로 안수를 받고 평양 장대현교회 목사가 되었다. 그는 새벽기도회와 사경회로 심령부흥을 일으키며 1909년 대부흥운동으로 전국적 부흥운동이 번져 나가는 데 핵심적 역할을 하며 초기의 한국교회를 영적으로 발전시킨 대표적인 토착 부흥목사이며 기독교 최고의 전도사였다. 교회 지도자로서 백만구령운동을 이끌고 교회의 토착화와 근대화에도 힘썼다. 뿐만 아니라 길선주는 국권 상실과 민족 고난의 시기에 민족을 위한 기독교가 되고자 했던 민족적 지도자로서 105인 사건의 수난에 함께했고, 3·1운동 때 기독교 대표로 33인의 한 사람으로 독립선언서를 공포하고 옥고를 치렀다. 석방된 이후 계속 전국 순회 부흥집회를 인도하다가 1935년 쓰러져 67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었다. 교육에도 관심을 쏟아 숭실학교(崇實學校)와 숭덕학교(崇德學校)를 설립하였고, 설교집 『강대보감』(1926년)을 남겼다. 유고로는 『말세학』과 『길선주목사설교집』 등이 있다.
☞ ‘대부흥운동’, ‘김익두’, ‘이용도’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