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보키 오사미
久保木 修己 / Kuboki Osami
항목체계 인물
이칭/별칭 모봉사(母奉士) 출신지 만주 단동
성별 남 생년월일 1931.2.3
[정의] 일본 통일교회의 초대협회장으로 27년간 사무한 공로로 모봉사(母奉士)로 임명된 원로.
[내용] 구보키 오사미는 1964년 세계기독교통일신령협회 일본교회의 초대협회장으로 시무한 이후 1992년까지 27년 동안 일본 통일교회를 이끌었으며, 외국인들 중 가장 먼저 축복을 받은 430가정이다. 구보키 오사미는 1931년 만주 단동에서 태어나 16세에 일본으로 귀국하여 인생의 여러 문제에 대해 고민하였다. 부모의 권유로 일본 입정교성회(立正佼成会)에 입교하여 두각을 나타내 회장의 비서실장이 되었다. 차기 회장의 후보로서 참의원선거에 나갈 정도로 신망을 받았으나 인생의 근본문제에 대한 답을 얻지 못하였다. 친구였던 고미야마 카이치의 권유로 통일원리를 듣고 감동을 받아 입정교성회의 청년들까지 통일원리의 수련을 받게 하였다. 40일 통일원리의 수련 중에 산에 올라가 신비체험을 하고 마음의 결정을 내린 뒤 통일교회에 입교하였다.
1968년 430가정 축복결혼식 뒤 참부모님은 구보키에게 ‘일본지정 충효지원(日本之情 忠孝之源)’이라는 휘호를 내리며 일본의 대표로서 축복해 주었다. 1968년 일본 국제승공연합 회장을 맡아 국제적인 승공운동을 펼쳤으며, 1970년 세계반공연맹(WACL) 세계대회 집행위원장의 자격으로 박정희 대통령과 단독회견을 가지기도 했다. 1971년에는 중화민국의 장개석 총통과 회담을 가졌다. 1974년 육영수 여사 암살 뒤 조문을 와서 박정희 대통령과 우의를 다지기도 했다. 기시 노부스케 전 총리 등 일본 정치인들과도 교류하면서 일본 내에서 통일교회가 자리 잡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1996년 33년 이상 공직을 한 공로를 인정받아 ‘참부모상’을 수상하였다. 1998년 향년 67세로 성화하자 참부모님께서는 일본을 어머니 국가로 세우기 위해 헌신한 사람이라는 의미로 ‘모봉사(母奉士)’라는 휘호를 내려 주었다. 성화식장에서 “참부모님의 심정 안에서 구보키 회장은 일본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는 내용의 참부모님 회고의 말씀이 소개되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