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당
敎皇黨 / Guelfi
항목체계 사상교리
[정의] 중세 말기 교황과 황제의 대립에서 교황을 지지한 당파.
[내용] 신성 로마제국의 황제 하인리히 4세(재위 1050-1106)와 로마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재위 1073-1085)가 성직 임명권을 놓고 갈등하면서 황제를 지지한 황제당(기벨린당)과 교황을 지지한 교황당(겔프당)이 대립했다. 이 대립이 이탈리아로 파급되면서 이탈리아 여러 도시들에서도 교황당과 황제당의 대립이 벌어졌다. 교황당은 교황 포로 및 귀환시대 말기에 교회공의회와 교황이 대립할 때 교황을 지지하였다.
기독교역사에서 1309년부터 약 210년간은 교황 포로 및 귀환시대로서 유대 민족 포로 및 귀환시대 210년을 실체적 동시성 섭리로 탕감복귀한 기간이다. 클레멘스 5세는 1309년에 교황청을 로마에서 남프랑스 아비뇽으로 옮기고, 이후 거기에서 약 70년간 7명의 교황들이 프랑스 왕의 구속을 받으며 생활하였다. 1377년 교황 그레고리우스 11세는 로마로 귀환하였으며, 그가 사망한 후 울바누스 6세가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프랑스인이 다수였던 추기경들은 따로 클레멘스 7세를 교황으로 선출하여 아비뇽에 또 하나의 교황청을 세웠다. 1409년 이탈리아 피사에서 열린 공의회에서 두 교황을 모두 폐위시키고 알렉산더 5세를 교황으로 선출하였다. 그러나 폐위된 두 교황이 이에 불복하여 동시에 3명의 교황이 정립하는 상황이 발생했다. 1417년 콘스탄트공의회는 3인의 교황을 모두 폐위시키고 마루티누스 5세를 교황으로 선출하였다.
이 공의회는 공의회의 권위를 교황권보다 우위에 두려고 하였다. 1418년 스위스 바젤에서 회의를 열어 로마교회를 입헌군주제로 개혁하려고 하였으나 교황은 이에 반대하여 참석하지 않고 그것을 유회시키려고 하였다. 이때 교황당 의원들은 교황을 지지하여 회의에 참석하지 않았으며, 그 이외의 의원들이 회의를 강행했으나 1449년에 저절로 해산되었다. 그럼으로써 1309년 이래 상실되었던 교황의 전제군주적 권위와 기능이 회복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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