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
孔子
항목체계 사상교리
[정의] 중국 춘추시대의 사상가이자 정치가.
[내용] 동아시아 문명의 사상적 흐름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 중국 춘추시대의 사상가 및 정치가이다. 공자는 B.C. 551년 주(周)나라의 제후국인 노나라 태생으로서 공부자(孔夫子)라고도 하며 자는 중니(仲尼)였다. 6예-예(禮)·악(樂)·사(射: 활쏘기)·어(御: 마차술)·서(書)·수(數)—에 능통했다고 전해지며, 30대부터 고전과 역사 그리고 시 부문에 있어서 훌륭한 스승으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그는 모든 사람에게 교육을 개방하고 전수하기를 원했고, 배움이야말로 지식의 습득뿐만 아니라 인격의 도야, 더 나아가 사회를 개조할 수 있는 동력이 된다고 믿었다. 따라서 식자(識者)는 배움을 자기실현으로만 여겨선 안 되며, 공직(公職)으로 나아가 인본주의적 이상을 현실 속에서 실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공자 스스로도 수십 년 동안 노나라에서 대사구(大司寇)를 비롯한 여러 공직을 맡아 정치에 적극적으로 가담했지만 그의 도덕적 엄정함으로 인해 미움을 사 망명길을 떠나게 되었다. 정치적으로는 좌절을 겪었지만, 그를 스승으로 따르던 제자들의 숫자는 늘어만 갔다. 공자는 말년에 고향으로 돌아와 제자들을 기르며 저술과 편집에 몰두하였고, 그의 학문적 뼈대가 되는 고전의 전통을 보존하는 일에 힘썼다. 그는 B.C. 479년 73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공자의 목표는 사회와 정치 속에 ‘인(仁)’을 배양함으로써 사회를 도덕공동체로 변모시키는 것이었다. 인은 인간의 고유한 특성으로서 타인에 대한 자애로움, 친근함, 인정(人情) 등으로 해석될 수 있다. 공자는 인을 고양하는 것이야말로 인간다움을 실현하는 길이며, 인을 배양한 군자(君子)들이 앞장서서 사회를 도덕적으로 개조해 나가야 한다고 보았다. 그는 또한 도덕적 사회질서의 근간으로서 가정의 질서를 강조했으며, 가정 내 덕목 중에서도 ‘효(孝)’를 으뜸으로 꼽았다. 부모를 생명의 원천으로 인식하고 공경하는 효를 통하지 않고서는 인에 다다를 수 없다고 본 것이다. 공자의 삶과 사상은 동아시아 문명권의 사상적 흐름, 특히 유가(儒家)와 법가(法家)의 발달에 큰 영향을 주었으며 유교 전통의 시발점으로 일컬어진다.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은 공자를 예수님, 석가모니, 마호메트와 더불어 4대 성인(聖人)으로 추앙한다. 이는 유교를 세계 4대 종교들 중의 하나로 보고 공자를 유교 전통의 창시자로 인정하는 것이다.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의 관점에서 볼 때 세계 종교의 탄생과 발달에는 하나님의 섭리가 내재되어 있으며, 각 종교는 시대와 지역의 특성에 따라 인류의 정신을 선(善)의 방향으로 계도하는 공통된 목적성을 공유한다. 따라서 공자의 생애와 사상은 동아시아 문명권의 심령과 지능을 깨우치는 유교의 전통 확립에 주춧돌을 놓았다는 점에서 하나님의 섭리에 일조한 공을 인정받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