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CHEONWONSA

검색 서비스

가정연합 대사전은 천일국학술원에서 제공합니다.
이 사전은 2019년까지의 내용을 수록하였고 섭리의 변화에 따라 항목을 추가할 예정입니다.

dictionary_pt1-172

개혁회의

改革會議 / General council of constance

항목체계 사상교리

[정의] 1414년부터 1418년까지 콘스탄티노플에서 열렸던 로마가톨릭공의회.

[내용] 복귀섭리시대의 유대 민족 포로 및 귀환시대 210년을 실체적으로 탕감복귀하는 복귀섭리 연장시대의 교황 포로 및 귀환시대 210년 기간 중인 1414년-1418년에 걸쳐 교황청의 분열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개최되었던 가톨릭공의회를 개혁회의라고 부른다.

교황과 성직자들은 그들의 부도덕으로 말미암아 점차로 국민들의 신망을 잃어버리게 되었고, 십자군 전쟁에서 패하여 교황의 권위가 땅에 떨어지게 되었다. 한편 십자군 전쟁 이후 봉건제도가 몰락하고 근대국가가 성립되자 점차로 왕권이 신장되면서 교황과 국왕의 충돌이 격화되었다. 교황 보니파키우스 8세는 프랑스의 왕 필립 4세와 충돌하여 일시적으로 금고를 당하기도 했다. 1305년 교황으로 피선된 클레멘스 5세는 로마로 가지 못했고, 1309년 교황청을 로마로부터 남프랑스의 아비뇽으로 옮긴 이후로 70년간 역대의 교황들은 프랑스 왕의 구속을 받으면서 포로와 같은 생활을 하였다. 1377년 교황 그레고리우스 11세가 로마로 귀환한 후 서거한 다음에는 추기경들이 이탈리아 바리의 감독 울바누스 6세를 교황으로 선출하였다. 그러나 프랑스인이 다수였던 추기경들은 오래지 않아 울바누스를 배척하고 클레멘스 7세를 또 다른 교황으로 선출하여 남프랑스 아비뇽에 교황청을 세웠다.

그런 분리가 개혁회의라고 불리는 콘스탄트공의회까지 계속되다가 1409년 추기경들이 이탈리아 피사에서 회의를 열어 두 교황을 폐위시키고 알렉산더 5세를 교황으로 임명하였다. 그러나 폐위된 두 교황이 불복함으로써 3인의 교황이 세워지게 되었다. 그 후 다시 감독과 대감독 외에 신학자, 왕후, 사절 등 많은 참석자들이 1414년부터 1418년까지 콘스탄티노플에서 회의를 개최하여 3인의 교황을 모두 폐위시키고 다시 마루티누스 5세를 교황으로 선출하였다. 이로써 교황청 분열의 문제가 해결되었다.

이 회의는 그 후 스위스의 바젤에서 로마교회의 기구를 입헌군주체(立憲君主體)로 할 목적으로 열렸다. 그러나 교황은 회중들의 이러한 주관성을 좋지 않게 생각하고 이 회의에 참석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유회시키려고까지 하였다. 그래도 교황당(敎皇黨) 이외의 의원들은 개회를 강행하였으나 1449년에 저절로 해산되었다. 로마교회 내에 입헌군주체를 수립하려던 계획은 실패했고, 1309년 이래 잃어버렸던 교황전정의 기능을 회복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