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아버님의 옥중 수난
참아버님의 獄中 受難
항목체계 역사사건
[정의] 참아버님이 경기도경찰부, 곽산지서, 대동보안서, 흥남감옥, 서대문형무소, 댄버리 연방교도소에서 겪은 옥중 수난.
[내용] 참아버님이 제2이스라엘인 기독교 지도자들의 책임분담 실패를 탕감복귀하기 위하여 여섯 번의 옥고를 치른 것을 의미한다. 인류의 독생자, 메시아, 구세주, 재림주, 참부모로 현현한 참아버님은 일제와 북한 정권, 한국 이승만 정권, 미국 정권 하에서 옥중 수난을 겪었다. 『원리강론』에 의하면, “재림 때에 있어서도 만일 제2이스라엘인 기독교 신도들이 불신으로 돌아가면 그 영적인 고난의 노정을 다시 실체로써 탕감복귀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라고 언급되어 있다. 이에 참아버님은 섭리적 중심인물과 인류의 책임분담 실패를 옥중 수난으로 실체적으로 탕감복귀하였다.
일제와 북한에서의 옥중 수난
참아버님은 일본 제국주의와 공산당국으로부터 옥중 수난의 박해를 겪었다. 세계적 기독교 섭리기반의 책임분담 실패와 출발섭리의 탕감복귀를 위한 노정이었다. 먼저 지하 항일민족 독립운동을 펼친 일본 유학시절의 행적 때문에 참아버님은 1944년 10월부터 1945년 2월까지 경기도경찰부에서 옥중 수난을 겪었다. 경기도경찰부는 경기도지역과 서울의 4개 경찰서를 관할하던 경찰관서로 수감자들에 대한 모진 고문으로 악명이 높았다. 참아버님의 항일지하운동 혐의와 지하운동 동지탐문조사를 명목으로 강도 높은 고문이 가해졌다. 매질로 시작해서 매질로 끝이 나던 하루였다. 고문의 형태는 판자 쪼가리로 조이고 뒤틀어 짜기, 두 팔을 뒤로 묶고 매달아 치는 비행기태우기, 콘크리트 바닥에 눕혀 찬물을 끼얹고 무한정 물 먹이기, 군화 발로 배 짓이겨 밟기, 각목을 무릎 안쪽 오금에 끼우고 징 박은 가죽구두로 짓밟기, 열 손가락 전기고문 등 15분간 사람을 미치게 하는 평생 잊지 못할 고문이었다. 참아버님은 사경을 넘나들던 과정에서도 침묵하였다. 이때의 혐의는 1971년 미국 입국 때까지 공산주의자로 오인을 받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해방 이후 북한 정권 하에서 참아버님은 정주 곽산지서와 평양 대동보안서, 흥남감옥에서도 옥중 수난을 겪었다. 1945년 10월 참아버님은 남한의 화폐로 물건을 구입하여 위폐 사용혐의로 정주 곽산지서에 1주일가량 수감되었다. 남북 체제의 분열로 메시아가 죽음의 고난 길을 갈 수 있음을 보여 주는 사건이었다. 초등학교 담임이었던 경찰서장의 보증으로 석방되었다. 참아버님은 1946년 6월 6일부터 8월 10일까지 동양의 예루살렘으로 불리던 평양에서 뜨겁고 신령한 은사의 집회를 거듭 개최했다. 공산당국은 기성교회와 식구 가족 및 이웃의 밀고를 받고, 참아버님을 이승만 박사의 첩자 및 종교를 사칭한 유사단체 지도자로 긴급 체포하였다. 참아버님은 1946년 8월 11일부터 11월 21일까지 평양 대동보안서에 수감되어 옥중 수난을 겪었다. 허호빈의 복중교단과 3차에 걸쳐 접촉하던 중 참아버님은 혹독한 고문을 받게 되었다. 벽이 온통 새빨간 감옥에서 일주일간 밥을 안 주고 잠을 안 재우는 고문을 받았다. 참아버님은 동공을 멈추고 휴식하는 비법을 터득하여 고문관과 간수를 경악하게 하였다. 황소 생식기로 만든 채찍으로 구타를 당했으며, 매를 맞다 책상다리에 거꾸로 넘어져 어금니가 깨지기도 했다. 빈사상태로 무죄 석방되었는데, 고문 후유증으로 10일간 토혈하고 피골이 상접한 인사불성의 상태로 지내다 극적으로 살아났다.
이어 평양에서의 집회를 계속하던 중 1948년 2월 22일 참아버님은 평양 기독교 지도자 83명의 공동명의 투서로 긴급 체포되었다. 이승만의 첩자, 부녀자 재산 갈취, 사회질서 문란혐의였다. 2월 25일 삭발을 당하고 4월 7일 공판에서 사회질서 문란죄로 단심 5년 형을 언도받았다. 참아버님은 이후 평양형무소로 이감되었다가 옥중의 옥으로 불리는 흥남감옥으로 이감되었다. 새벽 4시 반에 일어나 오전 9시부터 오후 5시까지 강제노역을 겪으며 고난을 당했다. 1948년 6월 21일부터 1950년 10월 14일까지의 강제노역을 견뎠으며, 이곳에서 12제자를 복귀하고 모범수로 수형생활을 감내했다. 유엔군의 흥남폭격 도중 극적으로 옥문이 열려 출감하였다.
서대문형무소 수난
참아버님은 1954년 5월 1일 세계기독교통일신령협회를 창립한 이후 연세대학교와 이화여자대학교를 중심으로 교수, 학생, 일반인을 대거 전도하였다. 연세대학교와 이화여자대학교는 통일교회 신앙운동에 위기감을 느끼고 1955년 3월 초 연세대학교 박상래 교수를 퇴직조치하였으며, 이화여자대학교는 3월 24일 김영운 교수, 이정호 교수, 최원복 교수, 한충화 교수, 양윤영 교수 등을 퇴직시켰다. 또한 이화여자대학교는 5월 11일 신미식, 사길자, 김정은, 서명진, 김경식, 박승규, 지생련, 정대화, 박영숙, 임승희, 이계순, 강정원, 최순화, 김숙자 등 학생 14명을 ‘통일교회 신앙’을 이유로 퇴학시켰다. 연세대학교도 7월 7일 황환채, 유경규 등을 퇴학시켰다.
당시에 기성교단을 중심으로 통일교회에 대한 헛소문도 조성되었다. 즉 “통일교회에 나가면 가정이 파괴된다. 불법감금을 해서 사람을 묶어 놓는다. 금품을 착취하고 사람을 바보로 만든다. 지하실에서 벌거벗고 요란하게 춤을 춘다. 밥에 약을 타서 맛이 좋다. 전기장치가 돼 있어 엉덩이가 들러붙어 나올 수 없다. 음란과 피가름이 교리에 의해 공공연히 진행된다.”는 등 온갖 루머가 퍼져나갔다.
이승만 대통령을 중심으로 이대 김활란 총장, 박마리아 부총장 및 5대 장관들이 연대하여 통일교회에 대한 핍박이 시작됐다. 김활란 총장과 기독교 목사들이 80여 통의 투서를 당국에 제출하였다. 한국의 유력 신문들은 사실무근의 유언비어를 보도하였다. 참아버님은 1955년 7월 4일 오후 5시경 장충동 본부교회에서 긴급체포 되었다. 소문과 병역법 위반, 불법감금 혐의였다. 김원필, 유효민, 유효영, 유효원도 함께 구금되었다. 7월 13일 전원 기소로 서울지검 송치 후 서대문형무소로 이감되었다.
서대문형무소는 한국의 감옥 1호라고 할 수 있다. 1908년 경성감옥으로 시작해 유관순 열사 등 수많은 애국지사와 범법자들을 수감했던 장소이다. 참아버님의 옥중의 수난과정에 기록적인 면회의 행렬이 이어졌다. 영계의 증거와 협조로 죄수들과 간수들이 감화되어 출옥 때에는 배웅하였으며, 일부는 통일교회에 입교하기도 하였다. 참아버님은 10월 4일 오전 11시 언도공판에서 무죄 판결을 받고 오후 9시 40분에 석방되었다.
댄버리 연방교도소 수난
참아버님은 1984년 7월 20일부터 1985년 8월 20일까지 댄버리 연방교도소와 하프웨이하우스에서 수감생활을 하였다. 1981년 7월 뉴욕 검찰은 참아버님과 가미야마 다케루(당시 재정담당)를 3일간 탈세혐의로 취조하였다. 조사 내용은 “1973년부터 1975년까지 3년간 예금액 160만 달러의 이자 11만 2천 달러와 주식 배당금 5만 달러에 대한 세금 총 7,300달러에 대한 탈세혐의 조사”였다. 이후 미국 법원은 1982년 7월 16일 참아버님에 대해 18개월 금고형을 내렸으며, 1984년 7월 20일 참아버님이 댄버리 연방교도소에 수감되었다. 참아버님은 모범수로 생활하면서 교회의 섭리적 선포와 대회를 옥중에서 주관하며 종교 자유의 운동을 전개하였다.
-
PREV 참아버님의 영계 40일 시련과 승리
-
NEXT 참아버님 최후의 기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