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원제도
莊園制度
항목체계 사상교리
[정의] 봉건사회에서 토지의 소유자인 영주와 경작자인 농노 간에 맺은 예속관계.
[내용] 장원제도는 중세 봉건사회를 굳건히 지켰던 경제적 기반으로서 영주의 관할 아래 반노예인 농민들이 영주에게 지대형식으로 제공하던 부역을 핵심으로 했다. 8세기경 프랑크왕국은 이교도와 이민족의 침입에 대비하여 제후들에게 토지를 나누어 주고 정치적, 군사적 충성의 서약을 받았다. 왕에게 토지를 하사받은 지방의 제후나 영주들은 자체적으로 기사를 양성하고 농민들에게 토지를 경작하게 하여 소작세 등 각종 세금을 바치도록 하는 계약관계를 맺었는데, 이를 장원제도라고 했다. 이렇듯 중세 유럽은 정치적으로는 왕과 신하 사이에 봉토를 기반으로 주종관계를 맺은 봉건사회였으며, 경제적으로는 농노의 노동을 중심으로 생산이 이루어지는 장원제도에 기반한 자급자족의 사회였다.
장원을 소유한 영주들은 왕과 같은 권력을 누리며 농민들을 착취했다. 농노들은 농토를 하사받아 생계를 유지하는 대신 일주일에 3번 정도 영주의 경작지에서 부역해야 할 의무를 지고 있었다. 또한 영주에게 지대를 비롯한 많은 세금과 생필품을 헌납해야 했고, 각종의 노역에도 동원되었다. 장원제도는 농노들에게 많은 부담과 고통을 준 착취제도였고, 이로 인해 농노들의 삶은 피폐했다.
그러나 14세기 십자군 전쟁 이후 교역과 경제의 발달로 중세를 떠받들던 장원제도가 점차 해체되기 시작했다. 도시와 상공업이 발달하면서 화폐가 널리 사용되자 봉건적인 부역 대신 화폐를 요구하는 영주들이 늘어났다. 이들은 농노들의 노동력을 착취하는 부역제도를 폐지하고 일정한 조세만 내면 토지에 대한 권리를 스스로 가질 수 있도록 해 주었다. 이에 따라 예속관계에 있던 농노들이 해방되어 자유농민이 늘어났다. 그러나 흑사병으로 농사를 지을 노동력이 턱없이 감소하자 일부 지역에서는 농노들의 부역을 다시 강화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특히 서유럽과 달리 동유럽에서는 영주들이 금납화 대신 부역이나 생산물 지대를 통해 장원을 부활하려고 하였다. 이에 분노한 농노들은 영주들에 맞서 농민반란을 일으켰고, 이후 장원이 점점 해체되면서 중세 봉건사회가 무너지기 시작했다.
☞ ‘봉건사회’, ‘장원’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