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완용
李完用
항목체계 사상교리
[정의] 을사오적의 한 사람으로 한·일 강제합병을 주도한 인물.
[내용] 한말 을사오적 중 한 사람으로 을사조약과 한·일 강제합병을 주도한 최악의 매국노로 불린다. 1858년 이호석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집안이 가난하여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하였다. 10세 때 고종의 신임을 받는 관리였던 이호준의 양아들이 된 후 많은 경제적 지원을 받게 되었다. 1887년 미국참사관으로서 미국으로 건너가 외교관 생활을 했고, 1896년까지 친러 정치인으로 활동했다. 조선에서 일본의 힘이 점점 강해지자 변절하여 친일파 정치인으로 돌아섰고, 이토 히로부미와 함께 고종을 압박해 을사조약을 강제로 체결하는 데 일조하여 을사오적의 한 사람이 되었다. 통감 이토 히로부미의 강력한 추천으로 내각총리대신이 되었고, 이후에 헤이그 특사사건을 빌미로 고종을 퇴임시키고 한·일 강제병합을 주도해 우리나라를 일본에게 넘겨주는 데 기여했다. 그 공로로 일본 정부에 의해 백작(伯爵)으로 봉해져 막대한 부를 누리다 1929년 69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원리강론』에서 이완용은 한 번 언급된다. 즉 “1905년에 일본의 이등박문과 당시의 한국 학부대신이었던 친일파 이완용 등에 의하여서 한국의 외교권 일체를 일본제국의 외무성에 일임하는 조약이 성립되었다.”고 밝히고 있다.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은 이완용을 자신의 이익을 위해 민족과 조국을 배반한 인물로 평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