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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연합 대사전은 천일국학술원에서 제공합니다.
이 사전은 2019년까지의 내용을 수록하였고 섭리의 변화에 따라 항목을 추가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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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효원

劉孝元

항목체계 인물

출신지 평안북도 정주군 관주면 성별

생년월일 1914.9.25

[정의] 『원리해설』과 『원리강론』 집필을 주도적으로 진행하여 교리 정리에 기여한 초대협회장.

[내용] 출생과 성장

1914년 9월 25일 평안북도 정주군 관주면 관삽동 229번지에서 유정한과 이신실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조부 유상찬이 개신교로 개종한 이후 교회 개척과 학교 설립 등에 정성을 다하는 등 독실한 기독교 집안에서 성장하였다. 탄생 전 모친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쓰여질 생명이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하였는데, 새벽녘 마지막 어둠을 비추던 큰 별이 품에 들어와 안기는 태몽을 꾸었다. 어린 시절 머리가 명석하여 수재라고 불렸으며, 독립운동가로 활동한 종조부 유상돈 등 가문 어른들의 영향으로 애국심을 가졌다. 1927년 영창보통학교, 1933년 정주군 오산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1936년 경성제국대학교 예과를 수료하고 의학부에 입학하였다. 그러나 학업에 정진하던 중 결핵균이 뼈에 침투하여 고관절을 제거하는 수술을 받게 되어 1939년 학업을 중단하였다. 26세에 다리를 자유롭게 움직이지 못하는 불구의 몸이 되어 고향 집에서 6년 동안 병마와 싸우며 지냈다.

방황 중 입교

해방 후 남북이 분단되는 상황을 보며 공산정권을 떠나 동생들을 데리고 남하하여 연평도에서 연복중학교를 개교하였다. 연복중학교에서 무상으로 가난한 아이들을 모아 가르치던 중 한국동란이 발발하여 부산으로 피난하였다가 목포로 이동하여 책 표지 만드는 사업을 구상하였다. 1953년 부산으로 다시 이동하여 사업을 시작하던 차에 10월 평소 알고 지내던 양윤신을 통해 ‘원리’ 말씀을 듣게 되었다. 김성실, 김원필 등을 통해 말씀을 더 접하고 참아버님이 지내던 곳을 찾아갔으나 만나지 못하였다. 11월 24일 이수경을 통해 참아버님이 직접 기록한 ‘원리원본’을 빌려 읽고 “‘원리원본’을 읽은 뒤 내가 누구인가를 발견하고 예수님의 말씀이 이 책에서 결론을 내리고 있다.”고 고백하였다. 이어 “미미한 불구의 몸이오나 버린 양으로 거두시와 뜻 이룸에 도움 되고자 합니다. 부르심에 응하여 이 한 몸 바칠 영광의 날이 있기를 바라나이다.”라고 참아버님에게 편지를 올렸다. 참아버님은 이 편지를 읽고 스승을 만나보지 않고 전도가 된 사람이라고 치하하면서 직접 부산으로 오셨다. 12월 24일부터 사촌누이인 유신희 집에서 참아버님에게 직접 말씀을 듣기 시작하였으며, 1월 초에는 유효민과 김명희 등이 합류하여 25일 동안 직접 말씀을 듣고 입교하였다.

충성스러운 효자의 삶

입교 후 ‘원리’ 말씀을 강의로 체계화하여 정리하였으며 참부모님을 절대적으로 믿고 모시는 생활을 하였다. 참부모님도 “명령만 하면 사지(死地)로 갈 수 있는 사나이”라고 그 충심을 인정하였다. ‘원리’ 말씀을 전하는 강사로 하루 18시간까지 강의를 하고 초대협회장으로 교회의 제반 행정을 담당하는 등 초창기 교회의 기반을 만들었다. 또한 1955년 7월 4일에는 참아버님을 따라 스스로 서대문형무소로 찾아가 ‘7·4수난’에 동참하였다. 참아버님보다 먼저 9월 28일 병역기피에 대한 벌금을 내고 출옥한 후 교회를 일신하는 중심이 되었다.

‘원리’의 체계화

참아버님의 지도와 감수를 받아 1954년 1월부터 3년 동안 ‘원리’를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원리해설』을 1957년 8월 15일 출판하였다. 원고 초안을 쓰면 여러 사람들이 읽고 그 내용을 토론하여 수정하고 다시 참아버님이 검토하는 순서로 여러 차례 수정작업이 진행되었다. 이후 참부모님의 지도 아래 『원리해설』을 보다 현대적 문체와 체계적 내용으로 다듬어 1966년 5월 1일 『원리강론』을 출판하였다. 그 과정은 9년 동안 힘든 고난의 연속이었다. 『원리해설』을 출판하던 과정처럼 원고를 같이 읽고 수정하면서 참부모님의 감수를 받아 진행되었는데 경제적으로 어려운 교회의 살림으로 원고를 집필하는 공간을 별도로 마련할 수 없는 열악한 환경에서 참부모님에 대한 절대신앙·절대사랑·절대복종의 자세로 완성할 수 있었다.

축복과 성화

1960년 4월 16일 세 자녀 축복결혼에 참여하여 사길자와 가정을 이루었다. 그는 인류를 대표하는 세 아들 중 하나로서 축복을 받게 되었으며, 이후 사길자와 세 아들을 낳았다. 가정을 돌볼 수 없이 바쁜 생활을 하면서 『원리강론』 원고 집필과 교회 행정은 물론 축복결혼의 식전 준비 책임, 축복에 대한 교육도 진행하였다. 일본과 미국을 다니며 참부모님을 수행하기도 하였다. 1969년 서울대병원에 입원하여 고관절을 복원하는 수술을 두 번 받았는데, 그 과정에서 간암을 발견하였다. 암 완치를 위해 세계의 식구들이 함께 기도하였으나 1970년 7월 24일 57세의 일기로 성화하였다. 이후 성화일을 기념하여 추모예배를 드리고 있다. 참부모님은 “세례 요한은 예수님보다 6개월 나이가 많았고, 유효원은 나보다 여섯 살 많았다”고 하면서 “유효원은 세례 요한의 입장에 있었다.”고 말씀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