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CHEONWONSA

검색 서비스

가정연합 대사전은 천일국학술원에서 제공합니다.
이 사전은 2019년까지의 내용을 수록하였고 섭리의 변화에 따라 항목을 추가할 예정입니다.

dictionary_pt2-373

원리강론 총서

原理講論 總序 / Introduction of Divine Principle

항목체계 사상교리

[정의] 『원리강론』의 전체적 서론.

[내용] 인간은 누구나 불행을 물리치고 행복을 찾아 이루려고 몸부림치고 있다. 개인의 사소한 일로부터 역사를 좌우하는 큰일에 이르기까지 그것들은 결국 하나같이 보다 행복해지려는 삶의 표현인 것이다. 그러면 행복은 어떻게 오는 것인가? 인간은 누구나 자기의 욕망이 이루어질 때 행복을 느끼게 된다. 그런데 욕망이라고 하면, 우리는 흔히 그 본의(本意)를 흐려서 생각하기 쉽다. 그것은 욕망이 선(善)보다도 악(惡)으로 나아가기 쉬운 생활환경 가운데 우리가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불의(不意)를 맺는 욕망은 어디까지나 인간의 본심(本心)에서 나오는 것은 아니다. 인간의 본심은 이러한 욕망이 자신을 불행으로 이끌어간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악을 지향하는 욕망을 물리치고 선을 추구하는 욕망을 따라 본심이 기뻐하는 행복을 찾으려고 필사적인 노력을 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사망의 어두움을 헤치고 생명의 빛을 찾아 고달픈 길을 더듬고 있는 인생이다. 불의의 욕망을 따라가서 본심이 기뻐하는 행복을 누려 본 사람이 어디에 있었던가? 인간은 누구나 그러한 욕망을 채울 때마다 양심의 가책을 받아 고민하게 된다. 자식에게 악을 가르치는 부모가 어디 있으며, 제자에게 옳지 못한 것을 가르쳐 주는 스승이 어디 있을 것인가? 악을 미워하고 선을 세우고자 하는 것은 누구나 다 가지고 있는 본심의 발로이다.

특히 이러한 본심(本心)이 지향하는 욕망을 따라 선을 이루려고 몸부림을 치는 것이 바로 도인(道人)들의 생활이지만, 유사 이래 본심대로만 살다 간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이다. 여기에서 선한 욕망을 성취하려는 본심의 지향성과 이것과는 반대로 악의 욕망을 달성하려는 사심(邪心)의 지향성이 동일한 개체 속에서 각기 서로 다른 목적을 앞세우고 치열한 싸움을 하고 있는 인간의 모순성(矛盾性)을 발견하게 된다.

존재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 자체 안에 모순성을 갖게 될 때에는 파멸된다. 따라서 이와 같이 모순성을 가지게 된 인간 자체는 파멸상태에 놓여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인간의 모순성은 당초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었을 리는 만무하다. 왜냐하면 어떠한 존재도 모순성을 내포하고 생성(生成)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생겨나기 전부터 이러한 모순성을 지닌 운명적인 존재였다면 애당초 생겨날 수도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인간이 가지고 있는 그러한 모순성은 후천적인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인간의 이러한 파멸상태를 타락(墮落)이라고 한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우리는 인간이 타락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며, 누구도 이것을 반박할 여지가 없을 것이다. 인간은 이와 같이 타락해 자기 파멸에 이르고 있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악한 마음으로부터 오는 악의 욕망을 물리치고 본심으로부터 일어나는 선의 욕망을 따라 하나의 목적을 지향하는 것으로써 그 자체의 모순성을 제거하려고 필사적인 노력을 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궁극(窮極)에 있어서 선과 악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를 풀지 못하고 있다. 우리가 악의 욕망을 물리치고 선의 욕망을 따라 본심이 지향하는 선의 생활을 하기 위하여는 무지(無知)를 완전히 극복함으로써 선악(善惡)을 판별할 수 있어야 한다.

인간의 타락을 지적인 면에서 본다면, 그것은 바로 인간이 무지에 떨어진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인간은 마음과 몸의 내외(內外) 양면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지적인 면에 있어서도 내외 양면의 지(知)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무지에도 내적인 무지와 외적인 무지의 두 가지가 있게 된다. 내적인 무지란 종교적으로 말하자면 영적인 무지를 말하는 것으로서 인간은 어디로부터 왔으며, 생(生)의 목적은 무엇이며, 사후(死後)에는 어떻게 되는가? 그리고 내세(來世)와 하나님에 대한 존재 여부, 또 위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선과 악은 무엇인가 하는 문제 등에 대한 무지인 것이다. 그리고 외적인 무지란 인간의 육신을 비롯한 자연계에 대한 무지를 말하는 것으로서 모든 물질세계의 근본은 무엇이며, 그 모든 현상은 각각 어떠한 법칙에 따라 일어나는가 하는 것 등에 대한 무지인 것이다.

인간은 유사이래(有史以來) 오늘에 이르기까지 쉬지 않고 무지(無知)에서 지(知)에 도달하기 위하여 진리를 찾아 나왔다. 그리하여 내적인 무지에서 내적인 지에 도달하기 위하여 내적인 진리를 찾아 나온 것이 종교(宗敎)요, 외적인 무지에서 외적인 지에 도달하기 위하여 외적인 진리를 찾아 나온 것이 과학(科學)이다. 이와 같이 알고 보면, 종교와 과학은 인생의 양면의 무지로부터 양면의 지에 도달하기 위하여 양면의 진리를 찾아 나온 방편임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인간이 무지로부터 완전히 해방되어 본심의 욕망이 지향하는 선한 방향으로만 나아가 영원한 행복을 누리기 위해서는 종교와 과학이 통일된 하나의 과제로서 해결되어 내외 양면의 진리가 상통하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인생의 실제에 있어서 인간이 밟아 온 과정을 두 가지로 대별(大別)하여 본다면, 첫째는 물질로 된 이 결과의 세계에서 인생의 근본문제를 해결하려는 길이다. 이러한 길을 지상(至上)으로 생각하고 걸어온 사람들은 극도로 발달된 과학 앞에 굴복하여 과학의 만능과 물질적인 행복을 자랑하고 있다. 그러나 인간은 과연 이러한 육신을 중심한 외적인 조건만으로 완전한 행복을 누릴 수 있을 것인가? 과학의 발달이 아무리 안락한 사회 환경을 이루고 그 속에서 아무리 부귀와 영화를 누린다 한들 그것으로써 어찌 속사람의 정신적인 욕구까지 근본적으로 만족시킬 수 있을 것인가? 사람에 있어서 마음이 있음으로써 온전한 사람이 되는 것과 같이 기쁨에 있어서도 마음의 기쁨이 있음으로써 비로소 몸의 기쁨도 온전한 것이 되는 것이다.

그러면 이제 과학의 갈 곳은 어디일 것인가? 지금까지의 과학의 연구대상은 내적인 원인의 세계가 아니고 외적인 결과의 세계였으며, 본질(本質)의 세계가 아니고 현상(現象)의 세계였다. 그러나 오늘에 이르러 그의 대상은 외적이며 또한 결과적인 현상의 세계에서 내적이며 또한 원인적인 본질의 세계에로 그 차원을 높이지 않을 수 없는 단계에 들어오고 있다. 그리하여 원인적인 심령세계(心靈世界)에 대한 논리, 즉 내적 진리가 없이는 결과적인 실체세계(實體世界)에 대한 과학, 즉 외적 진리도 궁극적인 목적을 달성할 수는 없다고 하는 결론을 얻기에 이르렀다. 이제 과학의 돛을 달고 외적인 진리의 항해를 마친 사공이 또 하나의 종교의 돛을 달고 내적인 진리의 항로에로 들어오게 될 때, 비로소 그는 본심이 지향하는 이상향(理想鄕)에로 항행(航行)할 수 있게 된다.

인간이 밟아 온 과정의 둘째는 결과적인 현상세계를 초월하여 원인적인 본질세계에서 인생의 근본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이다. 그런데 이 길을 밟아 온 이제까지의 철학이나 종교가 많은 공헌을 한 것이 사실이지만, 그 반면에 우리에게 너무나 많은 정신적인 짐을 지워주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리하여 역사상에 왔다 간 모든 철인들과 성현들은 인생의 갈 길을 열어 주려고 각각 그 시대에 있어서 선구적인 개척의 길로 나섰던 것이었으나, 그들이 해 놓은 일들은 모두 오늘의 우리에게 더 무거운 짐이 되고 말았다. 모든 종교가 어둠 속에서 헤매던 그 시대의 많은 심령(心靈)들에게 비쳐 주던 소생(蘇生)의 빛은 시대의 흐름과 더불어 어느덧 꺼져 버리고 이제는 타다 남은 희미한 불똥만이 그들의 잔해를 드러내고 있다.

그러면 내적인 진리를 찾아 나오던 종교인(宗敎人)들이 오늘에 이르러 본연의 사명을 다하지 못하게 된 원인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본질세계와 현상세계와의 관계는 비유컨대 마음과 몸과의 관계와 같아서 원인적인 것과 결과적인 것,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 그리고 주체적인 것과 대상적인 것의 관계를 가지고 있다. 마치 마음과 몸이 완전히 합해야만 완전한 인격을 이루는 것과 같이 본질과 현상의 두 세계가 완전히 합치되어야만 이상세계를 이룰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마치 마음과 몸이 그러하듯이 본질세계를 떠난 현상세계가 있을 수 없고, 현상세계를 떠난 본질세계도 있을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현실을 떠난 내세는 있을 수 없는 것이므로 진정한 육신의 행복이 없이 심령적(心靈的)인 기쁨도 있을 수 없다.

종교가 이와 같은 운명의 길을 가게 된 또 하나의 중요한 원인이 있다. 즉 과학의 발달에 따라 인간의 지성이 최고로 계발(啓發)된 나머지 현대인은 모든 사물에 대한 과학적인 인식을 필요로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구태의연한 종교의 교리에는 그런 과학적인 해명이 전적으로 결여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즉 위에서 이미 언급한 바 내적인 진리와 외적인 진리가 서로 일치된 해명을 가지지 못한 데 원인이 있는 것이다. 내적인 진리에도 논증적인 해명이 필요하게 되어 종교는 오랜 역사의 기간을 통하여 그 자체가 과학적으로 해명될 수 있는 시대를 추구해 나왔던 것이다.

이와 같이 종교와 과학은 인생의 양면의 무지를 타개하기 위한 사명을 각각 분담하고 출발하였기 때문에 그 과정에 있어서는 그것들이 상충하여 서로 타협할 수 없을 것 같은 양상을 보여 왔으며, 인간이 양면의 무지를 완전히 극복하여 본심이 요구하는 선(善)의 목적을 완전히 이루자면 어느 때든지 과학을 찾아 나온 종교와 종교를 찾아 나온 과학을 통일된 하나의 과제로서 해결해 주는 새 진리가 나와야 하는 것이다.

새 진리가 나와야 한다는 주장은 종교인들, 특히 기독교 신도들에게는 못마땅하게 생각될는지도 모른다. 왜냐 하면 그들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경서가 이미 그것만으로 완전무결하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진리는 유일하고 영원불변하며 절대적이다. 그러나 경서란 진리 자체가 아니고 진리를 가르쳐 주는 하나의 교과서로서 시대의 흐름과 더불어 점차로 심령과 지능의 정도가 높아져 온 각 시대의 인간들에게 주어진 것이기 때문에 진리를 가르쳐 주는 범위나 그것을 표현하는 정도와 방법에 있어서는 시대를 따라서 달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성격을 띠고 있는 교과서마저 절대시해서는 안 된다.

인간이 본심의 지향성에 의하여 하나님을 찾아 선의 목적을 이루는 데 필요한 방편으로 나오게 된 것이 종교이기 때문에 모든 종교의 목적은 동일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명분야와 그를 대하는 민족에 따라서, 또 시대의 흐름에 따라서 위와 같은 이유로 경서를 서로 달리하게 되는 데서 필연적으로 각양각이(各樣各異)의 종교가 나오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경서란 진리의 빛을 밝혀 주는 등잔과 같아서 주위를 밝힌다는 사명은 같지만, 보다 밝은 등불이 나올 때에는 그것으로써 낡은 등잔의 사명은 끝나는 것이다.

그러면 새 진리는 어떠한 사명을 다해야 할 것인가? 이 진리는 위에서 이미 논술한 바 종교가 찾아 나온 내적인 진리와 과학이 찾아 나온 외적인 진리를 통일된 하나의 과제로서 해결해 줄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모든 인간들을 내 외 양면의 무지에서 내 외 양면의 지에 완전히 도달할 수 있게 하여야 한다. 그리하여 타락한 인간으로 하여금 사심(邪心)이 지향하는 악의 길을 막고 본심이 추구하는 바를 따라 선의 목적을 이루게 함으로써 선악(善惡) 양면의 지향성을 가지고 있는 인간의 모순성과 위에서 이미 논한 바 종교인들이 당면하고 있는 도(道)의 생활의 모순성을 극복하게 할 수 있어야 한다.

인간이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떠나서는 살 수 없도록 지어졌다면, 하나님에 대한 무지야말로 우리 인생을 얼마나 비참한 길로 몰아내고 있는 것인가? 새 진리는 하나님의 실재성에 관하여서는 말할 것도 없고 하나님의 창조의 심정을 비롯하여 하나님의 자신을 반역하는 타락한 인간을 버리지 못하고 유구한 역사의 기간을 두고 구원하려고 애써 온 애달픈 심정을 우리에게 알려 줄 수 있어야 한다.

선과 악의 두 면을 지향하는 인간들의 상충적인 생활로써 형성되어 온 인류 역사는 거의 싸움으로 엮어져 내려왔다. 우리 앞에는 피할 수 없는 마지막 싸움이 하나 남아 있으니 그릇이 바로 민주주의와 공산주의의 내적인 이념 싸움이다. 그들은 서로 무서운 무기를 마련하고 외적인 싸움을 겨루고 있으나, 실은 내적인 이념의 싸움의 판가리를 하기 위함인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섭리가 완전히 이루어지려면 바로 이 새 진리가 지금까지 민주주의 세계에서 주창해 온 유심론을 새로운 차원으로 승화시켜 유물론을 흡수함으로써 온 인류를 새 세계로 옮겨 놓을 수 있어야 한다. 이와 같이 이 진리는 역사 이래의 모든 주의나 사상은 물론 모든 종교까지도 하나의 길로 완전히 통일시킬 수 있어야 한다.

그러면 온 인류가 하나의 진리에 의하여 하나의 형제로서 하나의 목적지에서 만나게 된다면, 거기에서 이룩되는 세계는 어떠한 세계일 것인가? 이 세계는 유구한 역사의 흐름을 따라 인생의 양면의 무지에서 헤어나려고 몸부림쳐 온 인간들이 그 암흑으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진리의 빛 가운데서 함께 만나 하나의 대가족을 이룬 세계이다. 그런데 진리의 목적이 선을 찾아 이루려는 데 있고, 선의 본체가 바로 하나님이므로 그 진리에 의하여 도달된 세계는 바로 하나님을 부모로 모시고 서로 형제애(兄弟愛)에 얽혀 사는 세계인 것이다. 타락한 인간이 오랜 역사의 기간을 두고 찾아 나온 이 세계야말로 바로 천국인 것이다. 그리고 이 천국은 지상의 현실세계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므로 지상천국이 되는 것이다.

인류 역사는 하나님의 창조목적을 완성한 세계를 복귀하여 나아가는 섭리역사라는 사실을 알았다. 따라서 새 진리는 타락한 인간을 창조 본연의 인간으로 돌아가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이 인간을 비롯한 피조세계를 창조한 목적이 무엇이었던가 하는 것을 가르쳐 줌으로써 복귀과정에 있는 타락한 인간의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인가를 알게 해야 된다.

그리고 인간은 과연 성서가 말하는 문자 그대로 선악과라는 과실을 따먹고 타락했는가? 그렇지 않다면 타락한 원인은 어디에 있는가? 또 완전완미(完全完美)한 하나님이 어찌하여 타락할 가능성이 있는 인간을 창조하였고, 전지전능한 하나님이 그들이 타락하는 것을 알면서도 막을 수 없었던 이유는 어디에 있었으며, 더 나아가서 하나님은 왜 창조의 권능을 가지고 일시에 죄악인간을 구원하지 못하는가 하는 것 등 실로 오랜 역사의 기간을 두고 깊이 생각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괴롭혀 온 모든 문제들을 완전히 풀어 줄 수 있어야 한다.

우리가 피조세계에 비장(秘藏)되어 있는 과학성을 살펴볼 때, 그것을 창조한 하나님이야말로 과학의 근본이기도 한 분이라는 것을 미루어 알 수 있다. 그런데 인류 역사가 하나님의 창조목적을 완성한 세계를 복귀하여 나아가는 섭리의 역사임이 사실일진데, 그와 같이 모든 법도의 주인인 하나님이 이처럼 오랜 복귀섭리의 기간을 두고 아무 계획도 없이 무질서하게 이 역사를 섭리해 나왔을 리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류의 죄악역사가 어떻게 출발하여 어떠한 공식적인 섭리의 과정을 거쳐서 어떠한 모양으로 종결되어 어떠한 세계로 들어갈 것인가를 아는 것은 우리에게 긴절(緊切)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그러므로 새 진리는 이러한 근본문제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명백하게 풀어 줄 수 있어야 한다.

또 새 진리는 오늘날 문화권 형성의 세계적인 사명을 띠고 있는 기독교의 많은 난해한 문제들을 명백히 풀어 줄 수 있어야 한다. 새 진리는 하나님과 예수님과 인간과의 창조원리적인 관계를 밝혀 주어야 한다. 뿐만 아니라 이에 못지않게 어려운 문제로 되어 있는 삼위일체에 대해서도 근본적인 해명이 없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인류에 대한 구원은 어찌하여 독생자로 하여금 십자가에 달려 피를 흘리게 하여야만 가능하였던가 하는 것도 응당 풀고 넘어가야 할 문제인 것이다. 더 나아가서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으로 인하여 분명히 구속함을 받았다고 믿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역사 이래 어느 한 사람도 구주의 속죄가 필요 없이 천국에 갈 수 있는 죄 없는 자녀를 낳아 보지 못하였다는 사실은 그들이 중생한 후에도 여전히 원죄를 자녀들에게 유전하고 있다는 것을 증거하는 것이 아닐 것인가? 이러한 실증적인 사실로 보아 십자가 대속의 한계는 과연 어디까지인가 하는 것이 커다란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 진리는 예수님이 왜 재림하여야 하며, 또 그의 재림은 언제 어디로 어떻게 이루어질 것인가 하는 것과 그때에 타락한 인간의 부활은 어떻게 이루어질 것이며, 천변지이(天變地異)가 일어나서 하늘땅이 불에 소멸되어 없어질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는 말씀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하는 것 등 상징과 비유로 기록되어 있는 성서의 많은 어려운 문제들을 이미 예수님 자신이 직접 말씀한 바와 같이 비사가 아니고 누구나 알 수 있도록 밝히 가르쳐 줄 수 있어야 한다. 이와 같이 인간을 생명의 길로 인도하는 최종적인 진리는 어떠한 경서나 문헌에 의한 종합적인 연구의 결과로나, 혹은 어떠한 인간의 두뇌에서 나올 수는 없는 것이다. 이 진리는 하나님의 계시로서 우리에게 나타나지 않으면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