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심
良心 / Conscience
항목체계 사상교리
[정의] 선을 지향하는 마음의 형상적 부분.
[내용] 양심이란 일반적으로 선을 지향하는 인간의 마음을 의미한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아무리 악한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선하게 살려고 하는 마음의 지향성, 곧 양심의 힘은 뚜렷이 그 내부에서 작용하고 있다. 이러한 힘은 누구도 막을 수 없는 것으로서 자기 자신도 모르게 강력히 작용하고 있기 때문에 악을 행할 때에는 즉각적으로 양심의 가책을 받게 된다.
만일 타락한 인간에게 이러한 양심의 작용이 없다면, 하나님의 복귀섭리는 불가능하다. 그런데 모든 힘은 수수작용에 의하여서 생기므로 양심도 역시 독자적으로 그 작용의 힘을 일으킬 수는 없다. 양심도 어떠한 주체에 대한 대상으로 서서 그와 상대기준을 조성하여 수수작용을 함으로써 힘을 발휘하게 된다. 이 양심의 주체가 바로 하나님이다.
그런데 선을 지향하는 마음은 보다 깊이 분석되어야 한다. 선을 지향하는 양심적인 사람들끼리도 상충할 때가 많기 때문이다. 통일원리는 선을 지향하는 마음을 본심과 양심으로 세분하여 이해한다. 이것을 위하여 먼저 인간의 구조를 살펴봐야 한다.
지상의 인간은 영인체와 육신으로 구성되며, 각각은 성상과 형상의 이성성상으로 존재한다. 영인체의 성상은 영인체의 마음인 생심이며, 영인체의 형상은 영인체의 몸인 영체이다. 생심은 하나님이 임재하는 영인체의 중심이다. 육신의 성상은 육신의 마음인 육심이며, 육신의 형상은 육신의 몸인 육체이다.
생심과 육심의 관계는 성상과 형상의 관계와 같아서 그것들이 하나님을 중심하고 수수작용을 하여 합성일체화하면 영인체와 육신을 합성일체화하게 하여 창조목적을 지향하게 하는 하나의 작용체를 이룬다. 이것이 인간의 마음이다. 인간은 타락되어 하나님을 모르게 됨에 따라 선의 절대적인 기준도 알지 못하게 되었으나, 위와 같이 창조된 본성에 의하여 인간의 마음은 항상 자기가 선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지향하게 된다. 이 마음의 작용을 양심이라고 한다. 그런데 타락한 인간은 선의 절대적인 기준을 알지 못하여 양심의 절대적인 기준도 세울 수 없기 때문에 각자 자신의 생각에 따라 선의 기준을 다르게 세우면 양심의 기준도 달라져서 양심을 주장하는 사람들 사이에도 투쟁이 일어날 수 있다.
선을 지향하는 마음의 성상적인 부분을 본심이라 하고, 그 형상적인 부분을 양심이라고 한다. 타락한 인간이 무지하여 창조본연의 것과 기준을 달리한 선을 세우게 될 때에도 양심은 그 선을 지향하지만, 본심은 이에 반발하여 양심을 본심이 지향하는 곳으로 돌이키도록 작용한다. 창조본연의 인간은 하나님을 중심한 창조목적을 알고 그것을 지향하므로 본심과 양심이 일치하지만, 타락한 인간은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에 절대적인 선의 기준도 알지 못하여 본심과 양심의 방향이 다를 수 있다. 이로 인해 양심적인 사람들 사이에도 갈등이 일어날 수 있으며, 양심이 창조목적과 배치되는 것을 선으로 여겨 그것을 지향할 경우 본심은 그것을 돌이켜 창조목적을 지향하도록 작용한다.
선을 지향하는 마음속에서 본심이 항상 하나님을 중심한 창조목적을 지향하는 것은 영인체의 생심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생심은 하나님이 임재하는 영인체의 중심부분으로서 영인체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생소와 육신으로부터 오는 생력요소의 두 요소가 수수작용을 하는 가운데서 성장한다. 영인체는 육신으로부터 생력요소를 받는 반면에 육신에게 생령요소를 돌려준다. 생심의 요구대로 육심이 호응하여 생심이 지향하는 목적을 따라 육신이 움직이면 육신은 영인체로부터 생령요소를 받아 선화되고, 그에 따라 육신은 좋은 생력요소를 영인체에 다시 돌려 줄 수 있게 되어 영인체는 선을 위한 정상적인 성장을 하게 되는 것이다. 악인에 있어서도 그의 본심이 선을 지향하고 있는 것은 항상 생심이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생심의 작용은 그를 선의 방향으로 이끌 정도의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본심은 생심과 육심이 하나님을 중심으로 주체와 대상의 관계로 합성일체화한 것이다. 주체인 생심이 요구하는 대로 대상인 육심이 따르게 되면, 그것이 곧 하나님을 중심으로 창조본연의 선을 지향하는 본심의 작용이다. 타락한 인간에게도 생심은 항상 작용하지만, 생심과 육심의 관계가 역전되어 육심이 주체가 되고 생심은 대상이 되어 육심을 중심으로 살게 된다. 또한 타락한 인간은 하나님을 모르게 되어 하나님을 중심한 창조본연의 선의 기준을 분명하게 알지 못하므로 생심이 지향하는 선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지 못한다. 그러나 선을 지향하는 창조본성이 작용하므로 자신이 선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지향하게 된다. 이것이 곧 양심의 작용이다. 악인도 생심의 작용으로 인해 그 안에 본심과 양심이 작용하지만 육심을 중심한 이기적인 욕망에 따라 본심과 양심을 무시하고 악한 생활을 하게 된다.
그러므로 타락한 인간은 새 진리를 통해 하나님을 온전히 알고 생심의 요구를 깨달아 육심으로 하여금 생심의 요구를 따르게 하여 본심과 양심을 일치시키며 본심을 따라 살도록 노력해야 한다. 하나님을 지향하는 본심과 일치되지 않는 양심을 중심한 삶만으로는 충분히 선한 생활을 하지 못하며, 또한 평화로운 인류공동체를 건설하기 어렵다. 양심에 대한 기존의 이해들은 본심과 양심을 구분하지 못함으로 인해 선을 지향하는 인간의 마음을 보다 깊이 이해하지 못하고 창조본연의 방향으로 인도하지 못하고 있다. 인간이 하나님과 연결된 생심의 요구를 따르는 본심을 중심으로 살아갈 때 창조본연의 선한 생활을 할 수 있으며, 보편적인 선의 기준에 따라 평화로운 인류공동체를 건설할 수 있다.
사탄을 중심으로 육심이 주체로 생심이 대상으로 수수작용을 하여 합성일체화하면 인간으로 하여금 악을 지향하게 하는 또 하나의 작용체를 이루게 된다. 이것을 사심(邪心)이라고 한다. 인간의 본심과 양심은 이 사심에 반발하여 인간으로 하여금 사탄을 분립하고 하나님을 상대하게 함으로써 악을 물리치고 선을 지향하도록 작용한다.
하나님을 중심으로 생심의 요구를 따라 본심이 지향하는 창조본연의 선이란 이타적인 사랑의 실천이다. 하나님의 가장 깊은 본성은 사랑을 통해 기쁘고자 하는 심정이다. 하나님은 사랑의 대상인 인간도 사랑의 심정적 존재로 창조했다. 따라서 인간의 가장 깊은 본성도 사랑을 통해 기쁘고자 하는 욕구이다. 이러한 인간의 본성은 바로 인간의 생심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생심은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으며, 따라서 참사랑의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는 생심은 하나님처럼 사랑함으로써 기쁨을 느끼고자 하는 지향성을 갖는다. 인간의 마음에서 이러한 생심의 지향성을 중심으로 육심이 따르게 되면, 그 마음이 곧 하나님을 중심으로 참사랑을 실천하려는 본심의 작용인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을 중심한 참사랑이 선의 절대적인 기준이다. 참사랑을 실천하려는 보다 내적인 본심의 지향성에 보다 외적인 양심의 지향성이 일치될 때, 그 인간은 창조본연의 선을 추구하는 창조본연의 인간이 될 수 있다.
선을 지향하는 마음은 단순한 도덕적 의무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본심과 양심은 하나님의 참사랑과 그 결과로 나타나는 기쁨과 연결되어 있다. 인간이 본심을 따라 참사랑의 실천에 근거한 선을 실천할 때 인간은 진정한 기쁨을 느낀다. 이렇게 사랑을 통하여 기쁨을 느끼는 것이 하나님의 창조목적이다. 인간도 이러한 목적을 위하여 창조되었으므로 인간의 본심과 양심은 창조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작용하는 것이다. 인간이 사심을 따라 악을 행하며 사랑을 실천하지 않을 때 이에 반발하는 본심과 양심으로부터 괴로움이 느껴지며, 이것이 곧 양심의 가책이다.
본심과 양심은 오늘날 주목받고 있는 영성이라는 관점에서도 논할 수 있다. 선을 지향하는 인간의 마음은 영인체의 마음인 생심에 근거한 본심의 차원에서 항상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다. 그러므로 선을 지향하는 마음은 영적인 차원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인간이 하나님을 중심한 참된 진리로써 자신의 영성을 올바르게 계발할 때, 인간은 자신의 영인체의 생심으로부터 오는 하나님을 향한 지향성을 더 강하게 느낄 수 있고, 하나님을 중심한 선한 생활을 더 잘 할 수 있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