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균관
成均館
항목체계 종교일반종교학
[정의] 인재 양성을 위해 설립된 조선시대 최고의 국립 교육기관.
[내용] 조선시대 최고의 국립 교육기관으로서 고급 관료 양성을 위한 교육의 기능 외에 공자를 비롯한 성현을 모시는 사묘(祠廟)의 역할도 담당했다. 태학(太學), 현관(賢關), 수선지지(首善之地)라고도 하였다. 성균관은 고려 충선왕 때 당시의 최고 교육기관이던 국학(國學)을 성균관으로 개칭한 데서 비롯되었는데 공민왕 때 잠시 국자감(國子監)이라 불리다가 다시 성균관이라는 명칭을 회복하여 조선으로 이어졌다. 고려시대의 국자감은 기술학을 교육하였으나, 성균관은 명실 공히 유학 교육만을 전담했다. 사학(四學)이나 향교에서 공부를 마치고 초시인 생원시와 진사시에 합격한 유생들에게 우선적으로 입학 기회가 주어졌다.
성균관 유생의 정원은 개국 초에는 150명이었으나 1429년(세종 11)부터 200명으로 정착되었다. 유생은 오늘날의 기숙사격인 동재와 서재에서 생활하였으며, 출석 점수를 300점 이상 취득해야 대과의 초시에 응시할 수 있었다. 이와 같이 성균관은 과거제도와 유기적인 관계 속에서 운영되었다. 16세기부터 발달해 온 서원도 성균관과 유사한 수준과 질의 교육을 담당하였으며 점차 그 힘이 강화되었지만 서원은 어디까지나 사립 기관이었고, 성균관은 1894년 갑오개혁 때까지 여전히 조선을 대표하는 공식적인 최고의 공교육기관으로 존재하였다. 조선 후기에 이르면서 재정이 궁핍화하고 과거제도가 불공정하게 운영되면서 성균관의 기능이 약화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