섭리기업을 통한 평화운동
攝理企業을 통한 平和運動
항목체계 기관기업
설립자 문선명·한학자
[정의]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의 섭리기업을 활용한 다양한 평화운동.
[내용] 참부모님은 종교뿐만 아니라 사회의 전반적인 분야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참아버님은 일본 와세다 유학시절부터 기계공업에 관심을 가지고 사업을 구상하였다. 참아버님은 북한의 남침 위협이 상존하는 한국의 실정을 감안할 때 하루 빨리 방위산업을 육성해야 된다고 지적하고 기계공업의 꽃인 자동차산업을 발전시키고자 하였다.
섭리를 위해서 세워진 기업들 중에 최초로 정부의 인가(1959년 12월 말)를 받은 사업은 ‘예화산탄공기총 제작소’였다. 참부모님은 1968년 설립된 ‘한국지탄공업’과 ‘동화지탄’을 1971년에 인수하면서 한국티타늄을 설립하여 중화학공업 분야에도 진출하였다. 한국티타늄은 통일산업의 기계제작 경험을 기반으로 이산화티타늄 신제조법 개발에 성공하여 안정적인 성장이 가능해졌다. 이산화티타늄은 당시에 ‘인류가 고안해 낸 가장 흰색의 결정체’로 불리며 치약, 화장품, 종이, 도자기, 옷감, 페인트, 플라스틱 등의 생필품에 흰색을 더해 주는 제품이었다.
당시 티타늄 제조는 생산과정에서 공해가 많이 발생할 뿐만 아니라 높은 투자비와 고도의 전문 기술이 요청되는 사업이었기 때문에 대기업에서도 기피하는 분야였지만, 한국티타늄이 기술개발과 국산화에 성공하면서 관련 산업의 발전에도 크게 기여하게 되었다.
참부모님은 통일산업과 티타늄사업을 통해 기계공업과 화학공업 분야에 진출하여 기술을 확보하고, 1978년 9월 과학기술의 최강국인 독일의 뒤셀도르프지역에 ‘유럽경제기술정보센터’를 설립하여 통일교회 식구를 유학·파견하여 3년간 해당 지역의 산업 현황과 정보를 보고 받았다. 또한 독일 보쿰대학 교수로 재직하고 있던 김계환 교수의 주선으로 1981년부터 약 8년 동안 독일의 기업들을 인수하였다. 인수한 반도르와 하일겐슈태드 등의 공장은 독일 유수의 공작기계 업체였다. 참아버님은 통일산업의 직원들을 독일 공장에 파견하여 연수를 받게 함으로써 한국 공작기계의 설계, 제조기술을 한 단계 발전시켰다.
한국 정부에서 기술시찰단을 독일에 파견했는데, 그 시찰단이 방문한 공장들 중의 하나가 통일그룹에서 인수한 공장이었다. 참아버님은 이러한 기업을 바탕으로 1981년 ‘제10차 국제과학통일회의(ICUS)’에서 기술평준화를 주창하였다. 국제과학통일회의는 ‘절대가치의 탐구와 새로운 세계의 창조’라는 주제로 109개국에서 노벨상 수상자, 전·현직 국가지도자, 각 분야의 석학 등 8백여 명이 참석한 대규모 학술대회였다.
참아버님은 이 대회에서 하나님에게는 선진국이 필요하지 않으며, 지금까지 선진국이 발전시킨 과학기술을 토대로 약소민족을 착취해 왔던 역사를 반성하고 선진국의 과학기술을 후진국에 이전해 줄 것을 주창하였다. 미국의 공업기술은 남미, 유럽의 공업기술은 아프리카에 이전할 것을 주창한 것이다. 참아버님은 독일 공장의 공업 신기술을 한국과 중국 공업계에 이전하려는 철저한 준비의 토대 위에서 기술평준화를 발표하였다.
참부모님이 평화운동을 위해 세운 섭리기업들로서는 통일중공업(주), 티아이씨(TIC)(주), 한국와콤전자(주), ㈜통일항공시스템, (유)한국타임즈항공, 신정개발특장차(주), 한국티타늄공업(주), ㈜제이씨, ㈜일화, ㈜일신석재, 일성건설(주), 일원보석공예(주), 선원건설(주), ㈜세계일보, ㈜아시아 해양, ㈜일흥조선, 아이엔피중공업(주), 여수해양회사, ㈜세일여행사, 우창흥업(주), ㈜세진, 일성레저산업(주), ㈜용평리조트, 일상해양산업(주), ㈜센트럴시티, 성화출판사, ㈜진화인쇄, ㈜평일기획, 통일실업(주), 선도산업(주), ㈜흥상, ㈜화협, 평화자동차 등이 있다.
또한 참부모님이 세운 언론기관들도 섭리기업으로서 평화를 위한 역할을 충실히 하고 있다. 언론 기업들을 살펴보면 워싱턴타임스, 세계일보, 종교신문, 뉴스월드, 전교학신문 등이 그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이외에도 해외에서 많은 신문이나 잡지 혹은 학술지 등이 발간되었다. 참부모님은 이렇게 세워진 언론사들은 적자를 내더라도 세계평화를 위한 언론으로서의 역할을 하도록 지원과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참아버님은 한국의 안보를 위하여 군수산업을 시작했고, 경제가 어려운 상황에서 기술을 도입해 나라의 살 길을 열어 주고 싶은 마음에서 기업을 시작했다. 한국뿐만이 아니다. 브라질, 중국, 북한 등의 나라에 아낌없이 투자해 기업을 세워서 현지인들에게 기술을 이전해 그들의 살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었다. 일본 유수의 대학 출신자와 독일 기술자들을 한국의 통일중공업의 연구실과 기술부에 배치하여 기술을 전수하도록 했고, 아프리카의 콩고민주공화국 등에서 엔지니어를 초청하여 기술을 전수해 주기도 하였다.
한편 통일중공업에서 완성차 생산 기술을 가지고 있었지만, 한국 정부가 완성차 생산에 대한 허가를 내주지 않자 참부모님은 통일산업의 기술자를 일 년에 3분의 1씩 교체하라고 지시하였다. 보통은 핵심 기술자를 특별히 관리하면서 육성하는 것이 기업의 통례이지만, 참부모님은 한국 과학기술의 수준을 하루 빨리 높이지 않으면 안 된다고 강조하고 핵심 인력이 유출 되는 상황을 알면서도 한국의 기술 발전을 위해 모든 상황을 허락하였다. 이로 인해 통일산업에서 기술을 배워 완성차 업계로 이직하는 기술자들이 많이 생겨나게 됐고, 통일산업은 인재양성소라고 불리기도 하였다.
참부모님은 세계 인구의 4분의 1이나 되는 중국을 제외하고 세계평화를 운운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그 나라를 위해서 많은 정성을 들였다. 1989년 중국 혜주시에서 판다자동차 생산 공장의 기공식을 갖는 한편 같은 해 통일산업을 통해 중국 청도에 50억을 투자하여 트랜스미션 부품 공장을 건설하는 등 중국을 위한 본격적인 투자를 공식적으로 발표하였다. 베트남에도 메콩자동차를 설립하여 쌍용자동차와 합작으로 자동차 제조 사업을 시작하였다. 한국티타늄을 통해 중국에 기술을 전수하기도 했다. 일본으로부터 서러움을 받으며 고가의 로열티를 지급하고 상당한 시간을 투자하여 확보한 기술이었지만 중국에서 기술을 배우러 온 인력들을 호텔에 재우고 양복을 해 입히면서 티타늄 공장의 주요 시설은 물론 세부 도면까지 제공하며 실질적인 기술을 지도해 주었다.
참아버님은 기술 평준화를 추진하는 이유에 대해서 “기술 평준화, 정치 평준화, 경제 평준화를 하지 않으려고 선진국이 후진국에 가르쳐 주지 않고 오히려 지금까지 착취해 나왔습니다. 그것은 세계의 것이지 미국의 것이 아니고, 독일의 것도 아닙니다. 빨리 평준화시켜야 됩니다. 중국에 그런 평준화를 시켰다고 해 보세요. 중국 국민들이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래야 지상천국이 빨리 이루어질 것입니다.”라고 밝혔다.
1991년 12월 김일성 주석과의 만남에서 김 주석의 요청으로 남포에 자동차 공장을 건설할 것을 약속하였다. 그리고 그동안 쌓아 온 기술들을 모두 평화자동차를 통해 북한에 전수해 주었다. 이후에 평화자동차를 계기로 북한과의 신뢰 속에 작은 왕래와 상호협력이 가능하게 되었다. 참부모님은 1971년 세계에서 제일 큰 비행기 제조 회사를 인수해야 되겠다고 생각하였다. 항공 기술은 고도의 정밀성과 최첨단의 전자 기술 등이 요구되는 종합 첨단산업일 뿐만 아니라 방위 및 산업 기술이 총망라되어 있어 국가적 기밀에 해당될 정도의 고급 기술이었다.
참아버님은 1982년 6월 KAIST 기계공학과에서 비행기에 정통한 연구팀에게 3억 원의 연구비를 지원하고 통일산업의 기술진들을 투입하여 국산 경비행기 개발에 착수하였다. 당시 항공기 대부분의 자재를 수입에 의존하였던 상황이었는데, 1983년 5월 개발 1년 만에 순수 국내 기술로만 완성된 비행기 3대를 개발함으로써 국내 최초로 경비행기 개발에 성공하였다.
통일중공업의 자동차 산업이 궤도에 오른 1994년 무렵에는 중국 항공 산업 총괄기업인 ‘항공공업총공사’ 산하의 ‘남창비행제조공사’와 ‘항공기 생산 및 운항에 관한 협력계약’을 체결하고 민간 항공기 제작 사업에 본격적으로 진출하게 된다. 그로부터 10년 후인 2004년 기술 평준화의 완결 단계로서 ‘한국타임즈항공’을 설립하고 세계 최고의 헬기 기술을 보유한 미국의 ‘시콜스키사’와 기술협력을 체결하였다. 참부모님은 미국과 일본 그리고 이스라엘 3개국이 하나 된다면 항공기술을 중심한 지상천국을 이룰 수 있다고 강조하였다.
참부모님은 과학기술뿐만 아니라 인류의 건강에도 관심을 갖고 일화제약을 창립하였다. 참아버님은 한국의 고려인삼을 식물계의 왕자라고 칭하면서 한국의 보화라고 이야기했다. 하늘이 내려 주신 인삼은 한국 백성만을 위해서 준 것이 아니라 세계 인류의 건강을 위해 준 것이라고 강조하고 인삼 수출을 지시하였다. 당시에 인삼은 한약으로만 이용되어 왔는데, 국내 최초로 인삼을 건강식품으로 제품화하여 수출하기 시작한 지 4년 만에 1,000만 달러를 달성했다. 1973년 8월에는 구리 공장을 준공하여 최신 시설로 대량생산 체제를 갖추면서 인삼제품을 해외에 널리 알려 1975년 11월에는 대량 수출한 공로로 대통령상을 수상하기도 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일본 해피월드의 사업이 경제 복귀의 핵심 역할을 하게 되었고, 세계선교와 사회사업을 지원하는 역할을 하게 되었다.
1970년 12월 20일에는 참부모님이 일신(一信)석재 회사를 세웠다. 1971년 2월 26일 전북 전주시 팔복동에 ‘일신석재공예’라는 이름으로 회사가 설립된 이후 본격적으로 공예품(화병) 생산에 착수하면서 전국의 대리석 광산을 탐사하였다. 단양의 대명광산, 제천군 백운면에서 백색 대리석을 발견하고 큰 광산으로 개발하여 화병과 다보탑의 원료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1979년에는 이미 두 회사가 개발을 시도해 실패한 포천 석산 개발에 성공하여 국내 최대 규모인 3만 5천 명 규모의 화강석 산을 보유하게 되었다.
1983년 수출 2천만 달러를 달성한 일신석재는 6만 평에 달하는 경기도 이천 부지에 제조공장을 설립하고 공예품의 일본 수출을 본격화하였고, 1986년에는 전북 이리시 귀금속단지에 일원보석공예를 설립하여 다보탑과 미륵불상 등 공예품을 고가의 보석으로 조각하고 세공하여 공예품은 일본 해피월드, 귀금속은 프랑스 크리스찬버나드의 본사로 수출하였다.
참부모님이 특히 공을 들인 분야는 언론이었다. 처음 언론사를 세울 때에는 공산주의로부터 세계를 구하기 위해서였다. 참부모님은 공산주의를 이기기 위해서는 무기 전쟁보다 이념 전쟁에서 승리해야 하고, 공산주의 사상의 모순을 밝혀 공산주의 스스로 물러나게 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참부모님은 1971년 한국의 ‘주간종교’ 발행을 시작으로 1975년 일본에서 ‘세까이닛보 커뮤니케이션즈’, 1976년에는 미국에서 ‘뉴스월드 커뮤니케이션즈’를 설립하여 이념 전쟁을 위한 기반을 다졌다. 그리고 1978년 미국 뉴욕에서 시작된 세계언론인회의를 계기로 언론 분야를 본격적으로 지휘했다.
참아버님은 기도를 하던 중에 하나님으로부터 로널드 레이건 당시 대통령 후보자를 통해 미국을 구할 준비를 해 놓았다는 계시를 받았다. 1980년 11월, 제40대 대통령선거일을 하루 앞두고 레이건의 압도적인 승리를 예언하는 특집 기사를 실어 선거기간 내 불리한 상황에 있었던 레이건의 당선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이후 1982년 5월 워싱턴타임스를 창간하고 세계 각국의 자매지와 더불어 자유 민주주의 세력을 규합하였다.
참아버님은 1985년 8월 제네바 선언을 통해 소련의 멸망을 예언하고 워싱턴타임스를 앞세워 위기에 처한 미국을 구했다. 첨단 우주 기술을 활용하여 방어체계를 구축하는 레이건 정부의 SDI(Strategic Defense Initiative: 전략방위계획) 정책이 천문학적인 비용으로 여론의 반대에 부딪치게 되었다. 그때에 워싱턴타임스는 신문 1면에 SDI 추진에 대한 특집기사를 싣고 SDI를 포기하지 않겠다는 레이건 대통령과의 대담을 게재함으로써 SDI 정책을 추진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이후 SDI 정책은 고르바초프 정권이 공산주의를 포기하게 된 주요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또한 참아버님은 소련이 쿠바를 적화시키기 위해 니카라과를 교두보로 삼으려고 하던 전략을 차단하려고 니카라과 자유군 지원 캠페인을 실시하고, 미 의회에서 니카라과 지원 예산이 통과될 수 있도록 유도하였다.
1989년 2월 한국에서 세계일보를 창간하였고, 워싱턴타임스 창간 8주년이 되던 1990년 4월 9일에는 제11회 세계언론인대회를 소련 모스크바에서 개최하여 고르바초프 대통령과 단독 회담을 성사시켰으며, 이어 1991년 12월 6일 김일성 주석과의 회담이 성사되어 남북한 교류의 물꼬를 열었다. 이후에도 워싱턴타임스는 1992년 4월 12일 북한 김일성 주석과 조세트샤이너 편집국장의 단독 인터뷰를 성사시켜 세계평화에 공헌하였다.
참부모님은 지구의 3분의 2가 물로 이루어져 있고, 육지보다 바다에 사는 생물이 많기 때문에 세계의 식량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바다에 많은 관심을 가졌다. 앞으로 수중 자원을 관리하는 기술, 즉 해양 산업이 세계를 지배하는 시대가 올 것이라고 예견하였다. 또한 바다의 수산물이 고갈될 것을 염려하여 물고기를 잡는 어업만이 아닌 기르는 어업에도 관심을 갖고 양식장을 설립하고 인류의 식량난에 대비하였다. 인류의 기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1970년대부터 해양 산업을 시작해 막대한 재원을 투자하였다.
참부모님은 1974년 미국 내 수산 관련업체를 중심으로 하여 전 세계 세계기독교통일신령협회에서 관리하는 수산업을 총괄하는 ‘트루월드그룹(당시 I.O.E.)’을 발족시켰다. 1979년에는 ‘흥영수산’을 한국에 설립해 미국의 해양 회사와 연계하여 부산·제주·군산·목포 등의 주요 항구도시를 중심으로 냉동 창고를 운영하면서 수출과 수입을 통해 국내 유통을 담당하게 하였다. 또한 제주와 부산에서는 선단을 구축하여 고등어, 삼치, 오징어, 갈치 등 각종 수산물을 어획하고 유통하며 한국 수산물 시장을 장악하는 선도 기업으로 성장시켰다. 특히 제주를 중심으로 선박을 수리하는 조선소를 운영하였고, 목포와 울산에서는 ‘일흥조선’과 ‘아이엔피중공업’을 설립하여 선박 건조와 고급 보트 개발 및 제작 사업을 주도했다.
참부모님은 세계인들이 한국을 많이 방문할 수 있도록 세일여행사를 설립하였으며, 1988년에는 외국 관광객 유치 업계 1위를 달성하기도 하였다. 1986년 와이키키수안보호텔, 1988년 이천 설봉호텔을 각각 인수하여 운영하였고 1989년에 부곡·설악·제주·지리산·남한강·무주·경주 등지에 콘도미니엄을 건축하였다. 이러한 시설을 기반으로 세계문화체육대전, 피스컵 등 세계인들의 축제이자 섭리사의 주요 행사를 성공적으로 개최할 수 있었다. 참부모님은 일성건설을 세워서 리틀엔젤스예술회관과 도원빌딩 등을 건설하였고, 서울 지하철3호선과 서해안 고속도로의 건설 등에도 참여하였다. 1998년 금융위기로 일성건설의 경영권을 잃게 된 후에 선원건설을 세워서 선문대학교, 여수해양리조트, 김포 항공산업단지 등을 건축하였다.
참부모님은 세계평화를 위한 언론과 기술 평준화의 실현을 위한 기계공업 분야, 건설, 해양, 관광 등 다양한 분야에서 다각적으로 하나님의 섭리를 이루기 위한 역할을 해 나왔다. 언론을 통한 세계평화를 이루는 데 영향력을 행사하였고, 선진국의 고급 기술과 인력을 후진국에 조건 없이 나누어 주었으며, 식량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막대한 자원을 해양 분야에 투자하였다. 참부모님이 세운 기업들은 하나님의 섭리에 동참하고 기여하는 역할을 담당해 왔다. 단순히 이윤을 추구하는 기업의 목적성보다 더 높은 차원의 평화를 위하여, 하나님이 바라는 섭리를 위하여 노력해 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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