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용기
文龍基
항목체계 인물
이칭/별칭 화목동이
출신지 평안북도 정주군 덕언면 상사리 2222번지
성별 남 생년월일 1924.3.2(음)
[정의] 참아버님의 사촌동생으로 초창기 입교하여 참부모님을 모신 종친.
[내용] 1924년 음력 3월 2일 평안북도 정주군 덕언면 상사리 2222번지에서 참아버님의 숙부인 문경복의 3남 1녀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참아버님 가정과 한 집처럼 지내면서 유년시절을 보냈다. 노래를 잘 부르고 성격이 좋아 충부님이 ‘화목동이’라 불렀다. 광복 이후 참아버님과 곽산지서 고난을 함께하였다. 한국동란 중에 배를 타고 피난하여 인천 자월도에 있었으나 향토방위대에 붙잡혀 고문을 당하였다. 유엔군에 의해 간신히 구출된 후 인천 미군부대에서 근무하다 7년 만에 문용선, 문용현 등 형제들과 재회하였다.
1955년 참아버님 소식을 듣고 서울 청파동을 찾아가 입교하였다. 다수의 몽시를 통해 참부모님이 재림주인 것을 깨닫고 모심의 생활을 다하였다. 1957년 참아버님이 3형제에게 토기공장을 만들라고 하여 충남 아산에 땅을 사 토기사업을 시작했다. 1968년 4월 12일 기성축복을 받고 성심으로 헌신하던 중 1973년부터 청평에서 산림사업을 하였다. 청평에 잣나무를 심으라는 참부모님의 명을 받고 17년 동안 나무를 심어 산림청장 표창을 비롯하여 많은 표창과 감사장을 받았고, 1996년에는 대통령 표창을 수상하였다. 참부모님의 만수무강을 위해 3년 동안 정성을 들이며 설악산에서 산삼 16뿌리를 캐어 진상하기도 하는 등 충심으로 모심의 생활을 다하였다. 1989년 미국을 비롯하여 세계 9개 국가를 순회하며 참아버님의 어린 시절과 가정적 준비기대를 증언하였으며, ‘대한지리가’ 등 노래를 전승하기도 하였다. 또한 1997년 몰디브 국가메시아로 임명받았다. 1999년 5월 10일 75세의 일기로 성화하자 참부모님은 심정을 함께 한 동생이라는 의미로 ‘심제(心弟)’라는 휘호를 하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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