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터
Martin Luther
항목체계 종교일반종교학
[정의] 1517년 가톨릭교회의 면죄부 남용을 비판하는 95개조 반박문을 발표한 독일의 종교개혁가이자 신학자.
[내용] 마르틴 루터는 가톨릭교회의 사제였으나 종교개혁운동을 주도하여 개신교신학을 정초하게 된 종교개혁가이며 신학자이다. 루터는 1483년 독일 작센의 아이슬레벤에서 태어나 1501년 에르푸르트대학교에 입학해 부친의 뜻대로 법률가의 길을 준비하다가 신적 소명체험을 통해 삶의 궤도를 수정하고 에르푸르트의 아우구스티누스수도회에 들어갔다. 1507년 사제 서품과 1512년 비텐베르크대학교의 신학박사 학위를 받은 후 금욕적 수도생활과 성서연구에 몰두하고 신학자로서 인정을 받아 비텐베르크대학의 성서학 교수가 되었다. 당시 교황 레오 10세, 막데부르크 대주교 알브레히트(Albrecht von Mainz), 요한 텟첼 등은 막대한 대성당 건축기금 마련 또는 사익을 위해 면죄부를 남발해 판매했으며 설교로 이를 정당화하는 등 가톨릭교회의 부패와 폐단이 극심했다. 루터는 1517년 비텐베르크대학교의 교회 정문에 이를 비판하는 내용의 「95개조 반박문(Disputatio pro declaratione virtutis indulgentiarum)」을 내걸었다. 원래 라틴어로 된 이 반박문은 독일어로 번역되어 유럽 전역으로 퍼져 나가 교회개혁에 대한 사회적, 종교적 열망으로 종교개혁의 불길을 일으키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곤경에 처한 교황과 사제단 그릭고 신성 로마제국의 의회가 루터에게 주장철회를 요구했으나 이에 응하지 않자 결국 루터는 제국으로부터 추방됐고, 1521년에는 가톨릭교회에서도 공식적으로 파문되었다. 그러나 작센 선제후(選帝侯)의 비호를 받아 바르트부르크성에 은신한 루터는 독일어로 성서를 번역하여 종교개혁의 기반을 마련했고, 그 뒤 비텐베르크로 돌아와서 ‘루터파 교회(Lutheran Church)’를 세웠다. 1526년 가톨릭 수녀인 카테리나 폰 보라와 결혼하여 가정을 이루어 사제독신제가 성서적 근거가 없음을 밝히고, 그리스도교인의 삶에 있어서 가정생활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루터의 신학적 입장은 인간의 죄를 면하거나 구원하는 것은 교회나 교황(사제)에 의한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써 가능한 것이며, 신앙과 관련된 권위의 원천은 오직 성서에 있고(오직 성서, 오직 은혜), 그러한 은혜는 행위가 아니라 믿음을 통해 얻는 것이라는 이신칭의(以信秤義)의 교리로 요약된다. 이는 이후로 개신교 신학의 기본적 원칙이 되었다.
루터의 종교개혁은 당시의 독일 농민전쟁과 천년왕국운동에도 영향을 주었으나 과격한 농민전쟁이나 신비주의운동과는 거리를 두고 비판적 관점을 유지했다. 1546년 6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왕성한 신학적, 정치적 활동을 하며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대하여(1520)』와 『로마서 강의(1515-1516)』 등을 비롯한 방대한 신학저작을 남겼다.
☞ ‘종교개혁’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