댄버리 수난
댄버리 受難
항목체계 역사사건
[정의] 참아버님이 미국의 댄버리 연방교도소에 수감생활을 한 수난.
[내용] 참아버님이 1984년 7월 20일부터 1985년 8월 20일까지 댄버리 연방교도소와 하프웨이 하우스에서 수감생활을 한 수난이다.
댄버리 수난의 배경
1970년대 미국 통일운동의 부흥에 대한 반작용으로 미국의 진보진영 인사들로부터 반발의 움직임이 조직적으로 일어났다. 1978년 3월 22일부터 4차례에 걸쳐 박보희 선교사를 증언대에 세운 미국 하원 국제관계소위원회(위원장: 로널드 프레이저 의원)에서 청문회가 개최되었다. 한국 중앙정보부와 연계하여 미국의 통일교회가 국회의원들에게 거액의 로비자금을 제공했다는 의혹을 집중적으로 조사하였다. 결과적으로 의혹은 해소되었고 통일교회 활동이 합법적이었음이 밝혀졌다.
한편 로버트 돌(Robert Dole) 미국 국회상원 재무위원회 의원은 국세청 장관 도널드 알렉산더(Donald Alexander)에게 서한을 송부하여 통일교회 회계감사를 요청하였다. 통일교회의 자금이 “문선명 목사의 풍족한 개인의 이익을 위해 사용되고 있으므로 면세특권을 인정해서는 안 된다.”는 취지였다. 2년간 장부조사 결과 이에 대해서도 혐의 없음으로 판정되었다.
이후 1981년 7월 뉴욕 검찰은 참아버님과 가미야마 다케루(당시 재정담당)를 3일간 탈세혐의로 취조하였다. 조사의 내용은 ‘1973년부터 1975년까지 3년간 예금액 160만 달러의 이자 11만 2천 달러와 주식 배당금 5만 달러에 대한 세금 총 7,300달러에 대한 탈세혐의 조사’였다.
당시에 종교기관의 경우에는 종교 지도자의 명의 계좌에 예금하는 재정관리 관습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참아버님의 개인 탈세혐의로 특정하고 조사한 것이다. 또한 1년 2,500달러 이하의 탈세는 혐의가 있더라도 형법기소를 하지 않는 법무부 내규에도 불구하고 참아버님을 별도 조치로 기소하였다.
참아버님의 탈세 혐의 재판과정
이후 법무부 차관보대리 길버트 앤드루스(Gilbert Andrews)의 반려 재조사 지시와 그에 따른 불기소 보고에도 일방적인 기소명령의 처분이 내려졌다. 뉴욕 대배심은 13개 조항의 기소장을 작성하여 법무부 승인으로 기소를 결정하였다. 이후 1981년 10월 15일 뉴욕 지방법원 기소가 진행되었으며, 1982년 4월 1일부터 6주 간 뉴욕연방지방법원 배심재판이 치러졌다. 1982년 5월 18일 참아버님과 가미야마 씨에 대한 유죄평결이 있었고, 동년 7월 16일 참아버님 18개월 금고형과 2만 5천 달러의 벌금이 선고되었다. 1982년 11월 30일 변호인단이 제2심 미연방 고등법원에 항소하였다. 1983년 3월 23일 미연방 고등법원에서 재판이 개정되었고, 1983년 9월 13일 미연방 고등법원이 원심을 확정하는 판결을 내렸다. 1984년 1월 26일 변호인단은 미연방 대법원에 상소하였으나, 1984년 5월 14일 연방대법원이 상소를 기각하였다. 이후 1984년 7월 18일 법원의 복역명령이 있었다.
댄버리 수난과 옥중생활
참아버님은 댄버리 연방교도소에서 1984년 7월 20일부터 1985년 7월 4일까지 수감되었다. 1985년 7월 4일부터 8월 20일까지는 하프웨이 하우스에서 생활하며 출감을 준비하였다. 최종 13개월의 옥중수난 생활을 겪어야 했다. 참아버님은 댄버리 수감생활을 휴양처와 같은 생활이었다고 소회를 밝혔다. 일제와 북한 정권, 한국의 이승만 정권 하에서 겪은 옥중생활에 비하면 휴양과도 같은 생활이었다는 것이다. 참아버님의 댄버리 연방교도소 내 이미지는 ‘명상하는 사람, 밤낮으로 책을 읽고 공부하는 사람, 말없이 일하는 사람, 절대 불평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통상적으로 자정 무렵 취침하여 오전 3시 이전에 기상하였으며, 기상 후 2-3시간 기도와 정성의 시간을 가졌다. 평소에는 기름 때로 찌든 행주를 빨고 정리하는 부엌일을 담당하였으며, 시간이 날 때마다 말씀을 훈독하며 정성을 들였다. 옥중에서 『충효지원』 책자를 8회 정독하였으며, 『하나님의 뜻과 세계』 말씀을 선정하고 훈독하였다. 화요일과 수요일을 제외하고 오전 8시 30분부터 오후 3시 30분까지는 면회실에서 참어머님, 참가정, 세계 지도자와 식구들을 면회하였다. 일요일에는 경배식을 하였으며 평소에 외국어 공부, 산책, 당구와 탁구, 수영 등 운동을 통한 건강관리도 하였다. 다른 수인들과의 대화를 통해 옥중에서 인격적인 지도도 해 주었다. 그 결과 참아버님에 대한 호칭은 ‘헤이 문(hey Moon)’에서 ‘미스터 문(mister Moon)’, ‘레버런 문(reverend Moon)’, ‘파더 문(father Moon)’으로 변화되었다. 가미야마 씨가 출감한 뒤에는 다른 수인들이 참아버님을 모시고 함께 지내게 되었다.
옥중 평화운동과 기독교 지도자들의 규합
참아버님은 참어머님과 함께 옥중에서 평화운동을 지도하는 한편 기독교 지도자들을 규합하였다. 제4차 세계종교일치회의와 제3차 세계종교청년세미나(1984.8.10-16), 제13차 국제과학통일회의(1984.9.3), 제1회 원리연구회 세계대학생총회(1984.11.2-8), 제7회 세계언론인회의(1984.11.20-22), 제2회 세계평화교수협의회 국제회의(1985.8.13-17) 등 섭리적 대회를 주관한 것이다. 또한 특별휴가 때에는 교회 섭리의식을 집전하기도 하였다. 1985년 1월 1일 하나님의 날, 1월 2일 애승일, 2월 25일 참부모님 탄신일, 4월 20일 부모의 날 행사 등을 주관하였다. 1985년 2월 1일에는 뉴욕 이스트가든의 참어머님과 전화통화로 개천문의 날을 선포하여 지옥과 영계를 직통하는 문을 여는 의식을 가졌으며, 1985년 8월 16일에는 일승일을 선포하였고, 8월 20일 출감과 함께 성수식을 거행하였다. 옥중에서 니카라과 원조를 지시하여 워싱턴타임스를 통해 중남미의 공산화를 저지하기 위한 여론 환기와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또한 30만 명의 기독교 목사들에게 서한을 보내고 ‘통일원리’ 소개 자료를 배부하여 기독교 지도자들을 규합하기도 하였다. 1984년 5월 30일부터 1985년 6월 25일까지 종교의 자유대회가 지속적으로 실시되었다.
댄버리 출감과 참부모님의 승리
참아버님은 1985년 8월 20일 완전히 출감하였다. 모범수로 선정되어 형기 5개월을 단축 받고 세계적 탕감복귀의 노정을 승리한 것이다. 1985년 8월 20일의 출감은 1945년 8월 15일 이후의 40년 광야노정을 승리한 특별한 의미를 지녔다. 2세권을 중심한 가나안 정착시대가 출발하며 하나님의 한을 해원 성사하는 새로운 시대의 출발기대를 갖추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