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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EONWONS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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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연합 대사전은 천일국학술원에서 제공합니다.
이 사전은 2019년까지의 내용을 수록하였고 섭리의 변화에 따라 항목을 추가할 예정입니다.

dictionary_pt1-390

김활란

金活蘭 / Helen Kim

항목체계 인물

이칭/별칭 기득(己得), 우월(又月) 성별

생년월일 1899.1.18

[정의] 참부모님의 초창기 섭리와 신자들의 활동을 조직적으로 박해한 기독교 여성 지도자.

[내용] 김활란은 준비된 기독교 여성 지도자였으나 섭리적 사명을 알지 못하고 통일교회에 나간다는 이유만으로 교수의 퇴직과 학생의 퇴학조치를 내린 과오를 남긴 지도자이다.

1899년 인천에서 태어나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던 어머니의 영향으로 세례명 헬렌(Helen)을 한국식 이름으로 고쳐 ‘활란’이라고 하였다. 1908년 서울로 이사해 이화학당에서 초·중고등학교 과정을 마치고 1918년 이화학당 대학과를 졸업해 최초의 여성 대학 졸업자가 되었다. 대학 졸업 후 이화학당의 교사로 재직하면서 1919년 3·1운동에 비밀리에 참여하였다. 1922년 웰치 선교사의 추천으로 미국 웨슬리언대학교에 편입하여 철학과 교육학 등을 공부하였고, 1924년 보스턴대학교 대학원 철학과에 입학해 다음해 석사학위를 받았다. 귀국 후 조선여자기독교청년회연합회(YWCA)를 창설하는 것을 비롯하여 여러 기독교 단체들에 관련된 활동을 전개하였다. 1930년 컬럼비아대학교 대학원 철학연구과에 입학하여 1931년 우리나라 여성 최초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귀국 후 1932년부터 1939년까지 이화여자전문학교 학감 및 부교장을 지내며 친일 반민족행위에 나섰다. 특히 1937년부터 이화애국자녀단을 결성하고 단장을 맡았으며, 1938년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의 발기인으로 참여하였다. 친일단체의 활동뿐만 아니라 강연, 좌담, 논설, 기고 등을 통해 일본의 아시아 침략전쟁을 미화하고 강제징집을 찬양하기까지 하였다. 1939년 이화여자전문학교와 이화보육학교의 교장에 취임하였다. 해방 후 이화여자전문학교가 이화여자대학교로 승격 인가를 받은 후 초대총장에 취임하여 1961년까지 재임하였다. 이 기간에 이화여대에 통일원리의 바람이 불어 많은 교수와 학생들이 말씀을 접하였다. 이화여대와 연세대가 하나 되어서 서양 선교사들과 함께 통일교회를 받아들였다면 섭리적 흐름에 기여할 수 있었으나 이러한 사명을 다하지 못하고 통일교회를 박해하여 교수들은 퇴직, 학생들은 퇴학시키는 초유의 극단적 조치를 취하였다. 친일 반민족행위 이후 잘못을 바로잡을 수 있는 귀한 기회였으나 이를 알지 못하여 참부모님을 모시지 못하는 섭리적 과오를 범하였다. 결국 1970년 2월 10일 뇌출혈로 사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