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익두
金益斗
항목체계 종교일반종교학
[정의] 1920년대 신유의 능력으로 개신교 부흥운동을 이끈 장로교 목사.
[내용] 김익두(金益斗, 1874-1950)는 1907년 대부흥운동부터 1920년대 초까지 길선주 목사와 더불어 우리 민족의 성령 체험을 통해 기독교 부흥을 위해 왕성하게 활동한 부흥목사였다.
김익두는 황해도 안악에서 태어나 일찍 부친을 여의고 청년시절 좌절하여 술과 노름을 하며 방탕하게 살다가 1900년 안악교회에서 스왈론(W. L. Swallen) 선교사의 영생에 대한 설교에 감화를 받고 신앙에 입문하였다. 그러나 얼마 안 되어 다시 옛 생활로 되돌아간 자신을 회개하며 산중기도를 하던 중 가슴을 칼로 찢던 성령의 임재를 경험하고 회심하였다. 김익두는 이후 금욕, 열성적 기도생활, 개척전도, 성경강독으로 준비하여 1901년 세례를 받고 재령읍교회 전도사 활동과 신천교회 개척전도 등에도 열심을 다하였다. 1906년에는 평양 장로회 신학교에 입학하여 1911년 졸업한 후 1913년부터 황해도 신천교회 목사로 시무하며 교회를 크게 성장시켰고, 기도로써 병 고치는 신유와 전도의 능력으로 교회 지도자로서 인정을 받아 1920년에는 예수교장로회 총회장으로 피선되기도 하였다.
김익두가 전국적인 신유부흥목사가 된 결정적 계기는 1919년 경북 달성 현풍교회 사경회 때 안수기도로 불구자를 고친 신유의 역사부터이다. 그 뒤 김익두의 부흥회에서 중풍환자, 앉은뱅이, 혈루병, 반신불수의 환자들이 치유되는 역사가 있었다. 전국 각지의 부흥회마다 성령의 은혜와 안수기도를 받기 위해 사람들이 운집했으며, 그가 시베리아와 만주의 간도까지 순회하며 이끈 부흥회가 776회나 되었다. 그러나 신유의 기적에 대해 교회 내에서도 이견이 있어서 그런 기적을 조사하던 ‘이적명증회’가 조직되었으며, 일본 경찰의 훼방과 감시의 대상이 되었고, 또한 사회주의 인사들로부터는 고등무당이라는 비판도 받았다.
그런 상황 속에서 1930년대부터 부흥집회가 크게 위축되었다. 더욱이 김익두는 일제 말기 강압에 이끌려 신사참배를 하였고, 해방 후 공산당의 강요로 기독교도연맹의 총회장이 되는 등 말년에는 실책으로 평가되는 행보를 보이다가 1950년 후퇴하던 공산당에 의해 죽음을 맞이했다.